모킹버드 월터 테비스 시리즈
월터 테비스 지음, 나현진 옮김 / 어느날갑자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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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중 불현듯 학창 시절에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를 배웠던 기억이 났다.

다른 이유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 하나의 이유가 기억에 남는데, 바로 '즐거움'을 준다는 이유였다.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한참 되었지만 '읽기'라는 행위가 주는 원초적인 즐거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뜬금없이 문학의 즐거움을 이야기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읽기'라는 행위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가 1980년대였는데, 극한의 개인주의를 향해 치닫는 현대의 우리 사회 모습이 지속된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제대로 상상하고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의 세계에서는 로봇 기술 발달이 극에 달해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로봇까지 제작하기에 이른다.

'메이크'라는 시리즈 이름에 넘버링이 붙어 얼마나 발전된 로봇인지를 모델명으로 알 수 있는데, 그중 '메이크 나인' 모델인 '스포포스'라는 로봇이 작품의 시작을 연다.

그는 설정상 가장 발전된 형태의 로봇이며, 로봇이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되자 자신의 동력을 끊거나 핵심 부속을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여 스스로는 죽을 수도 없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역할을 도맡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로봇이 세상에 등장하자 진짜 인간들은 마약과 안정제를 공급받으며 마치 사육되듯,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도 해방되며 심지어는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와 사유의 괴로움마저 거세된 채 살아가고 있다.

마약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표현할 수 없는 허기를 느끼는 자들은 심지어 분신이라는 행위를 통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 사회에 어느 날 스스로 읽기를 깨친 '벤틀리'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읽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읽기는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기묘하고 신이 나는 어떤 감정을 일깨운다.

(pg 128)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끊임없이 언어를 흡수하듯 그는 글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세뇌된 사회에 저항하며 한 동물원에서 노숙자처럼 살아가던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둘은 끝없는 읽기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읽기는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교묘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공유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심각한 개인 영역 침범에 해당되며 3세대와 4세대, 5세대 헌법을 직접 위반합니다.

읽기 교육도 마찬가지로 개인 영역과 인격 보호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pg 158)

무언가 계속 고장 나기만 하는 세상을 끝없이 고쳐야만 하는 '스포포스'는 죽음을 꿈꾸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그 꿈에 다다를 수 없다.

제목인 '모킹버드'는 다른 동물의 울음을 따라 하는 '흉내지빠귀'라는 새인데, 제목처럼 그는 능력 면에서는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을지 모르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인간 대체품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이 영원한 사유의 고통에 시달리는 로봇과 이제 막 사유의 즐거움을 깨달아버린 인간이 보여주는 갈등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라는 작품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서 쇠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이 작품 속 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즉 인간은 사유를 포기하고 로봇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되자, 그 로봇이 고장 났을 때 고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인간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로봇을 고치는 로봇이 필요해지고, 그 로봇을 고치는 로봇을 고칠 또 다른 로봇이 필요해지는 무한궤도의 사회가 이어지다가 결국엔 그 궤도가 어디서부턴가 끊기기 시작한 사회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모든 것이 로봇이지만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 사회에서 오직 인간이 살아갈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포포스'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곧 인간을 천천히 절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글을 배운 유일한 인류인 두 사람이 그 길에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다.

"이 하늘 아래에서 대체 나는 뭘까?" 목소리가 대답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냥 당신 자신입니다." 목소리가 기분 좋게 말했다.

"당신은 성인 남자고 인간입니다. 사랑에 빠졌고, 행복해지길 원하고 있죠.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pg 413-414)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읽은 저자의 작품인데, 먼저 읽었던 '지구에 떨어진 남자'가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라면 이 작품에는 꿈과 희망이 모두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400페이지 중반 정도의 길이로 이 작품이 더 긴 편인데 오히려 읽는 데에는 시간이 덜 걸린 것 같고 읽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도 훨씬 긍정적이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재미의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꽤나 오래된 작품임에도 그가 보여주는 미래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와 꽤 가까운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태여 약물 따위를 이용하지 않아도 점점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하는 대신 영상이 사유를 집어넣어 주기를 바라며,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는 스스로 출산을 통제하며 절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들만 들여다보아도 그렇다.

물론 조금만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와 비슷한 AI가 탄생할 시점은 아직도 멀었고, 또 그런 AI를 구태여 인간형 로봇에 탑재할 이유도 마땅히 없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까지 어두워지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주제를 던져 주기에는 충분했으며, 또한 그저 '재미'를 위한 '읽기'를 위해서는 매우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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