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격함의 의식은 그 나름의 어떤 진리가 아니며, 사실에 대한 고려도 아니다. 나의 부도덕성에 대한 최초의 의식은 사실에 대한 나의 종속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한에 대한나의 종속이다. 전체성의 관념과 무한자의 관념은 정확히 말해 전자는 순전히 이론적인 반면, 후자는 도덕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자유가 진리를 근거 짓는다(그래서진리는 진리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타인은 애당초 사실이 아니며, 장애도 아니다. 타인은 나를 죽이려 위협하지 않는다. - P113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고유한 불완전함을 알기 위해서는 무한자의 관념을 완전자의 관념을 가져야한다. 완전자의 관념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다. 타인을 맞아들임, 도덕적 의식의 시작은 나의 자유를 의문시한다. 무한자의 완전함에 비추어 스스로를 재는 이러한 방식은 그러므로 이론적 고려가 아니다. 그것은 수치로서 성취된다. 여기서 자유는 자신을 실행하는 가운데스스로가 살해자임을 발견한다. 그것은 수치 속에서 성취된다. - P113
그 의심은 그로 하여금 확실성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회의, 의심에 대한 이 의식은 완전한 것의 관념을 전제한다. 코기토의 앎은 그래서 스승과의 관계를 무한자 또는 완전자의 관념을 가리킨다. 무한의 관념은 나는 생각한다의 내재성도, 대상의 초월성도 아니다. 데카르트에서 코기토는 타자에 의지한다. 데카르트에게 이 타자는 신이고 무한의 관념을 영혼에 집어넣어 준 자다. 플라톤적 스승처럼 이전에 본 것들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관념을 가르쳐 준자인 것이다. - P117
앎은 피조물의 실존함 자체다. 앎은 그 조건을 넘어, 근거를 주는타자를 향해 거슬러 올라감이다. 앎을 이렇게 보는 것은, 자신의 근거지음을 자기 안에서, 타율적 의견 바깥에서 찾는 모든 철학적 전통과갈라서는 것이다. 우리는 대자적 실존은 앎의 최종적 의미가 아니라자기에 대한 의문의 제기며, 자기에 앞서 있는 것으로, 타인의 현전으로 되돌아감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현전특권적 타율성은자유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서임한다. 자기에 대한 수치, 타자의 현전과 타자에 대한 욕망은 앎의 부정이 아니다. 앎은 이러한 것들의 명료화 바로 그것이다. 이성의 본질은 인간에게 근거 지음과 권력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문제 삼고 정의로 초대하는데 있다. - P120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근본적으로 하이데거에 반대한다. 하이데거는 타인과의 관계를 존재론에 종속시켰다(게다가 그는 대화상대자와 맺는 관계와 스승과 맺는 관계가 존재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듯이 존재론을 규정한다). 그는 정의와 부정의에서 모든 존재론 너머의 타인에대한 본래적인 접근을 보지 못했다. - P122
타인은 극복해야 하고 포괄해야 하고 지배해야 할 자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서, 우리에게 독립적인 자로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유지할 수 있었을 모든 관계의 뒤에서, 절대적으로 재출현하면서 말이다. 절대적 존재자를 맞아들이는 이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정의와 부정의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가르침인 대화가 실현하는 것이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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