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장에 ‘후설의 복귀‘는 방법론의 발명, 특히 철학의 본질이 밝혀지는 질문의 발명에서 유지되는 지성의 힘의 복귀이다. 현상학은 독일 관념론이 19세기에, 경험론이 18세기에, 데카르트주의가 17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와둔스 스코투스가 스콜라 철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전철학에 속하는 것처럼 20세기에 속할 것이다. 이제 현상학도 저 위대한 사유의 모델들처럼 과거에 속하여 찬란하고 지고한 사유들의화랑에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는가? - P9
현상학의 갱신은 오늘날 하나의 조건에서만, 현상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질문, 그 철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질문 자체가 갱신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갱신은 확장, 교정, 더 나아가 다른 것을 위해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의존하는 것을 전복해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현상학을 근본화하는 것이다. - P10
다시 말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남 그 자체와 관계한다. 이 후자를 통각하고 그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상학에 대한 진정한 기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주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 제기, 즉 고전적인 의식이나 그리스적 진리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 P10
물질 현상학은 이 비가시적인 현상학의 실체를 지시할 수 있다.이 실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어떤 정감un affect), 더 자세히말하면 모든 정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모든 촉발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 현상학의 관점에서 현상학적인 실체는 삶이 자기를 느끼는 정념적인pathétique" 직접성이다. 이런삶은 정념적인 밀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런 방식으로 삶은본래적인 현상화의 ‘어떻게‘에 의한 현상성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P12
역설적이게도자기 속에서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삶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상호주체성을 완성할 수 있는 환경e milieu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역설은, 삶이 자기에 이르고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획득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주체성의 시련‘épreuve‘ 에서라는 것을 이해하면 생각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 시련으로부터 자기는 자기이고, 이런 방식으로 자기는 자기로부터 불어나고 성장한다. 이것은 이 장의 두 번째 텍스트에서 다뤄지는 것으로, 특히 타자의 ‘존재‘를 촉발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속에서 본래적으로 도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아와 타이는 공통의 탄생, 즉 같은 본질을 가진다 - P16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삶으로 기울고 삶 속에 존재하며 모든 것은 살아있다.물질 현상학의 과제는 거대하다. 그것은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문제인 경우, 지금까지 무시된 현상들의 질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실재의 각각의 영역은 새로운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분석은 실재 속에서 그것의비가시적인 영역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결국 살아있는 우주로 우리가 물질적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연관된다. - P20
코플랜드는 그 자체로 우리 음악의 역사이자 우리의 집단적 음악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전시와 평시平時를 불문하고 코플런드는미국이라는 나라가 겪고 있는 느낌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그가 쓴 사실상 거의 모든 작품에서 우리는 코플랜드만의 개성이 배어나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코플런드의 음악은 오로지 코플런드만이 쓸 수있었다. - P7
결국 핵심은 음악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음악을 즐기는 것으로 압축된다. 코플런드는 음악을 그저 생각없이 흘려듣는 대신 정신을 집중하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이 특별한 음악가는 본 저작을 통해 작가로서의 또 다른 목소리를우리 모두에게 들려준다. - P11
과거의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 것인지(그리고 무엇을 들어 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쳤고, 습득한 음악적 기술을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음악에 어떻게 접목해낼 것인지를 지도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을 둘러싼세계에서 새로운 음악적 원천을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과거의 모델을 맹종하여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대량생산해내기보다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용감하게 발을 내디딜 줄 알아야 한다는가르침이었다. - P13
나디아 불랑제는 문하생들로 하여금 미국이라는 나라의 뿌리를 인식케 했고, 또한 이러한 인식을 위대한 음악에 접목시킬 기술을 길러주었다. 불랑제의 독려 덕분으로 미국 음악은 마침내 본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중서부 지방의 발라드와 춤곡은 로이 해리스의 교향곡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찾았고, 버질 톰슨의 피아노 소품과 풀 스케일 오페라에서는 남부 침례교도의 성가를 들을 수 있다. - P15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알면 더많이 즐길 수 있다. - P29
작곡가가 작곡을 가르치는 경우 본인의 견해를 학생에게 강요하거나 본인의 작곡 기법을 맹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코플런드는 그런 면에서 참으로 드문 타입의 교사라고 하겠다. 제자의 재능과 궁합이 맞을지 어떨지 불확실한 본인의 기법을 강요하는 법은 결코없고, 제자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승이다. - P31
https://m.blog.naver.com/syeong21/223790293572어느 시점에서든 성장은 필요한 것 같다. 새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으며, 청소년판 부제에 붙은 ‘성장 소설’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성장은 10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20대로, 그리고 중년을 향해 나아가는 40대에도 여전히 요청된다.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는 입학식과 졸업식이라는 명확한 ‘마디’가 주어지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는 그런 외부적 이정표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어른에게는 어떤 성장이 필요한가? 어쩌면 자기 삶의 마디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린다. 인간의 의식은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성장하고, 세계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진정한 성숙은 지배가 아닌 ‘노동’을 통해 세계에 관여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어른의 삶에서 성장을 증명하는 방식은 바로 이 변증법적 자기 형성이 아닐까. 2월, 졸업식과 입학식이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나는 ‘교원 워크숍’이라는 행사를 준비하며 사유한다. 단순한 의례를 넘어서, 이것이 내 삶의 또 하나의 성장의 마디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셈 아닐까. 결국 이런 고민 자체가 내가 자기주도형 학습을 추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코기토는 우리에게 의식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의식과 혼동된다는 것, 따라서 의식의 존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도 그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으로 자신이 확실하게 아는 모든 것을 의식의존재는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경험의 진리성과 허위성은 외부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성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존재 속에서 내적 명칭들로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거니와, 이것이 없으면 경험의 진위성은 결코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 P504
우리는 타인의 상황을 떠맡을 수 없고 과거를 실재성의 과거 그대로 다시 체험할 수 없으며, 병을 병자가 체험하는 그대로 다시 체험할 수 없다. 타인의 의식, 과거, 병은 내가 그것에대해 인식하는 것에 의해 그 존재 그대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하고 참여하는 한에 있어서의 나 자신의 의식은 더 이상 내가 그것에대해 인식하는 것에로 환원되지 않는다. - P506
환각은 세계 안에 있지 않고 세계 ‘앞에‘ 있는데, 왜냐하면 환각을 겪는 사람의 신체는 현상의 체계에 자신을 삽입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모든 환각은 우선 고유한 신체의 환각이다. "마치 내가 입으로 듣는 것 같다." "말하는 사람은 나의 입술위에 있다""고 환자들은 말한다. - P509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정상적 의미에서 보고 듣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각적 장들을이용하고 세계로 자연적으로 삽입해 들어가서 그 세계의 편린들로자기 존재의 전 의도에 일치된 인위적 환경을 구축한다. - P512
그러나 우선,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의문화적 세계의 경험, 나의 문화의 경험을 가질 수 있는가를 알지않으면 안 된다. 또 한 번 사람들은 내가 나의 주위의 타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들을 이용하는 것을 본다고. 내가 그들의 행동을, 지각된 동작의 의미와 의도를 나에게 가르치는 나의 친숙한경험과 행동에 유비해서 해석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타인의 행동들은 언제나 나의 것에 의해서 이해될 것이다. 즉 나에의한 ‘사람들‘ 또는 ‘우리들‘이다. - P521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세계에서 의식들이 서로 의사 소통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실상, 타인은세계에 대한 나의 조망에 갇혀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조망 자체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고, 자발적으로 타인의 조망에 스며들며, 이것들이 우리 모두가 지각의 익명적 주체들로서 참여하는 유일한 세계에서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 P528
직접적 기술로 이해된 현상학에 현상학의 현상학이 추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코기토로 복귀해서 그 속에서 객관적 사고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로고스를 추구해야 하고, 이것이 객관적 사고에 상대적 권리를 부여하며 동시에 그것의 자리를매김한다. 존재의 수준에서 보면, 사람들은 주체가 능산자이자 소산자이며 무한자이자 유한자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주체 아래에서 재발견하고 시간의 역설에 신체의 역설, 세계의 역설, 사물과 타인의 역설을 연결시킨다면, 우리는 이것을 넘어 이해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해하게 될 것이다. - P548
따라서 방금 우리에게드러난 현상들을 숙고하고 이것들이 상호 전체적 지각에서 어떻게동기화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사람들이 조명이라 부르는바 빛이나 색깔의 특수한 현상 방식을 고찰해보자. 그 특수함이란무엇인가? 한 줌의 빛이 그 자체로서 고려되는 대신 조명으로 포착되자마자 무엇이 일어나는가? 눈의 반사가 없으면 원주민의 그림에서처럼 눈은 흐릿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눈의 반사를 깨닫는 데 이르기까지는 수백 년간의 그림이 필요했다. - P464
우리의 모든 지각은 세계의 확실성을 그 토대로 한다. 이러한관점에서 우리는 마침내 지각의 항상성의 참다운 의미를 통각한다. 색깔의 항상성은 사물의 항상성의 추상적 한 계기일 뿐이고,사물의 항상성은 우리의 모든 경험의 지평으로서의 세계에 대한원초적 의식에 기초한다. 따라서 내가 사물을 믿는 것은 내가 다양한 조명 아래에서 항상적 색깔을 지각하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사물은 항상적 특성들의 총합이 아닐 것이다. 정반대로, 내가 항상적색깔을 발견하는 것은 나의 지각이 그 자체로서 세계 및 사물에로열림에 따라서이다. - P470
신체는 자신의 모든 표면과 기관을 통해서 동시에 촉각적 경험을 향해 나아가고 자기 자신과 더불어 어떤 유형의 촉각적 ‘세계‘를 가진다. - P475
지각된 것은 인식되어야 할 항으로서 반드시 내 앞에 현존하는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천적으로만 나에게 현존하는 가치의 통일성일 수 있다. - P481
꽃은 분명히 사랑의 꽃인데, 그 속의 무엇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바로 모르소프 부인이 맹세를 어기지 않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그것을 보는 것 이외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은 없으며, 그러나 바로 그때 그것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한다. 그 의미는 실존의 흔적이고 그것은 타인에 대해서도 해독 가능하며 이해 가능하다. 자연적 지각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근거하는 사물들을 정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들을 관찰하기위해 그것들을 멀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들과 함께 살고 우리의 일부로서의 우리의 세계에 우리를 결합하는 ‘속견‘ 또는 ‘발원적 신앙‘이다. 지각된 것의 존재는 선술어적 존재인데, 우리의 실존 전체가 이 존재를 향해 성극된다. - P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