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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청년문화의 변화

1. 일본은 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자행하였는가?

현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패전'이다. 현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청년문화 또한 이러한 패전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나, 태평양전쟁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점이 일본의 청년문화의 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은 제공권 장악이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투기 생산력이 전쟁의 키 포인트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전쟁 초기 군의 입장을 들어보자.

 "일본이 연간 2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쟁 참모의 보고에 대해 일본군 수뇌부는 "일본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이 무리를 해서라도 2만 대 생산능력을 갖춘다면 미국은 10만 대 생산체제를 만들 것이다"라고 일축한다.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에 질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도대체 왜? 이것은 앞서 말한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부국을 꿈꾸는 그들의 식민사관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장비와 화력면의 열세를 병사 개개인의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2000발의 실탄을 장전한 미전투기에 맞선 일본의 전투기에는 고작 70발이 장전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그들이 광기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기도 한다. 지는 전쟁에서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신일도 하사불성' '소수 정예주의' '엘리트주의'가 강조된 정신무장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무장을 가장 확실히 세뇌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지하드, 즉 성전聖戰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신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게 된다.

2. 패전과 천황의 항복 선언이 일본 청년문화에 미친 영향

태양족

항복 선언과 더불어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신 10대였던 청년들의 반응은 대체로 불쾌함이었다. 그들의 불쾌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원폭피해 소년이 주인공인 당시 유행하던 소년만화 <맨발의 겐>이 있다. 성인들의 다양한 반응과는 다르게 청년들은  '귀축미영 타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선생들이 하루아침에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가르치겠다고 돌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죽창을 들고 미군과 싸우겠다'던 어른들 또한 금새 미군을 환호하며 반기는 자세로 돌아섰다. 이전의 가치관과 교육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상황에서 그들은 반항과 일탈을 꿈꾼다. 이는 폭주하는 젊은이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대히트를 기록한  <태양의 계절>을 통해 '태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단카이세대-원시신인류-신인류

넓은 의미에서 전후 베이비 붐에 의해 1945년에서 1954년 사이에 태어난 약 2천만 명을 지칭하는 단카이세대는 어른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간다. 이 단카이세대는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보다는 농촌 지역에서 더 많은 출생률을 보이는데 이후 이들이 성장하여 1970년대에는 도시로 상경하게 되면서 도시는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젊은이 문화(소비, 저항, 감성)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화를 위한 학원투쟁과 사회적 이슈였던 안보투쟁은 원시신인류라는 새로운 물결을 형성하기도 한다. 단카이세대의 상경에는 도시 제조업 회사의 적극적인 알선도 한몫하게 되는데 회사는 한 지역의 청년들을 집단 취직시키고 상경 열차편을 마련해주어 같은 날, 같은 열차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한 회사에서 평생 일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강조, 조장할 수 있는 새로운 풍토를 만들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연대와 동질성을 강조한 단카이세대의 뒤를 이어 1970년대 태어난 이들은 이후 세대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신인류라는 조어를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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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타쿠는 왜 생겨났는가?

80년대 일본 문화는 70년대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펼친 오타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원래 '당신/댁'이라는 의미의 오타쿠는 가타카나로 쓰이고 서양에 소개되면서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국제어가 되었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광적인 팬이나 마니아를 넘어선 비평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좋아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여러 의미로 재배열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다. 때문에 이 오타쿠의 존재는 일본 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독특한 문화로 평가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래사회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생비자(prosumer)가 등장할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예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일본의 오타쿠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일본에서 이러한 오타쿠가 생겨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들의 전통과 관계가 있다. 첫째 그들의 장인정신은 익히 알고 있듯이 에도 시대 상인과 수공업자의 학문이었던 심학心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술을 하는 것도 道라고 생각한 이들은 물건을 잘 만들지 못하면 인격이 낮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어내려는 그들만의 장인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이 현대로 오면 '무언가 정통하여야 한다'는 通( つ)정신으로 확장되어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오타쿠가 영상 문화에 끼친 영향

오타쿠 문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된 <우주전함 야마토>다. 야마토가  <마징가 Z>를 비롯한 이전의 다른 애니매이션과 구별되는 점은 오타쿠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물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준 데 있다. 야마토는 당시 기존의 어린이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26회를 끝으로 중도 하차했다. 하지만 그 반향은 애니메이션의 주대상이 어린이들뿐 아니라 성인들까지도 포섭할 수 있다는 데로 꽂혔다. 야마토는 실재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전함으로 장대한 SF적 설정과 배경을 기반으로 매회마다 수수께끼를 끼워넣어 최종회에서 그 실마리가 풀리는 대하 스토리로 짜여져 있다. 이는 30분짜리 1회 방영분에 영웅이 악을 물리치는 완결형 드라마 형식으로 짜여져 있던 이전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과감히 깬 것이다. 때문에 텔레비젼에서는 중도 하차하기는  했지만 이후 야마토에 대한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애니매이션의 주대상층의 연령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0년대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영 컬처 전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크리에이터의 산실이 된 오타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신세기 에반게리온>(30만 명), <원령공주>(1,200만 명)의 예를 보면,오타쿠 시장의 파워와 수용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상대적으로 많은  <원령공주>의 관객수가 많은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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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7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성공비결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홍길동>. 1967년 상영 나흘 만에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후 <호피와 차돌바위>, <손오공>, <황금철인> 등이 1968년에 상영되었지만 1971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끝으로 제1차 애니메이션 역사는 끝난다. 물론 1976년 <로보트 태권 V>가 등장해 잠깐 붐이 일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본격적인 역사를 <백사전>이 등장한 1958년으로 본다면 우리도 그리 뒤지지 않은 것 아닌가?

한국 애니메이션이 중간에 단절되고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정부의 지원이 현재 애니메이션의 침체를 살릴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영상물의 침체기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독립프로덕션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죽었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본을 끌어모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자본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있다. 일본은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에 성공했다. 상황이 열악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그들만의 노하우다.

첫째, 일본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과 뱅크 시스템을 택하였다. 이는 텔레비젼 방영분의 경우(1회 30분) 1초에 24장이라는 디즈니영화와는 달리 1초에 2~3장 정도의 그림만을 사용하는 절약형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건비가 저렴한 우리나라에 동화와 채색을 하청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불어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뱅크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재활용인 셈인데 화면상 같은 장면이 나오도록 줄거리 배치를 고려하는 것이 이것에 속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떨어졌느냐? 물론 정교한 장면은 포기하는 대신 다른 재미거리를 포진해놓았다.(뒷부분 작품에서 다르어질 것이다)

둘째, 애니메이션만으로는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 타입 업Type up 방식이다. 비디오, 비디오 CD, 디스크, 케이블, 지역민방 등 2차 배급망을 구축함과 동시에 TV용 제작물을 재활용해 극장판을 만들어 개봉함으로써 수익을 추가시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이 업Tie up 방식을 채택해 제휴 업체를 확보하고 부가산업을 재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는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으며 같은 작품의 애니메이션보다 한 달 정도 일찍 연재를 시작하는 잡지(<소년 점프>)와 단행본 만화의 시장을 활성화시킨다.

셋째, 세계적인 캐랙터 기업인 반다이에서 볼 수 있듯 방영된 애니메이션을 장난감을 통해 다시 선보이는 캐릭터 비즈니스를 꼽을 수 있다. 다분히 기업적 상술로 재탕되는 악폐를 낳기도 하였지만 반다이는 여전히 뻔한 스토리의 슈퍼 히어로 시리즈로 20년이 넘도록 같은 제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2. 일본 애니메이션이 발달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이면에는 위와 같은 살아남으려는 노력 이외에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뿌리를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이 무엇을 보고 재미와 오락을 느꼈는가를 알 수 있는 에도시대의 문화를 살펴보자.

우선 분라쿠를 보자. 이는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인형극이 아동물로 전락한 데 반해 유독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그들의 전통을 고수란히 이어가는 성인용 인형극이다. 분라쿠좌에서 상연하는 분라쿠는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시대물과 연애를 다루는 세와물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당시 민중들은 이러한 상연극을 통해 지방 곳곳의 숨은 이야기와 시대적인 문제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뿐 아니라 그들을 울고 웃기는 대중물로 자리잡으면서 인형을 통한 무생물의 움직임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그들만의 특징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림을 영상으로 보는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는데 이는 두루마리 그림에 글과 그림이 함께 들어간 에마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겐지모노가타리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의 겐지모노가타리에마끼로 유통되었으니 만화의 초기 형태가 이미 상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에마끼와 더불어 본격적인 만화 그림의 원형이 되는 우키요에의 발달과 향유는 그들의 만화가 현대적인 산물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또한 고급의 문화와 대치되는 대중의 문화로 우키요에가 받아들여지고 발전한 것에서 보여지듯 우리가 흔히 저급/저질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문화 저변에는 대중의 욕구와 욕망, 그들의 이야기와 기호를 적극 수용하여 보급시킨 우키요에와 같은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만화의 기본 바탕이 되는 대중이 선호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킬 수 있는 그들의 전통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통의 맥락 이외에도 전쟁 이후 많은 화가들이 만화의 세계(영상물도 마찬가지)에 투신하였다는 점도 그들의 만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육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 지금 잠깐 든 생각 :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장난감 사장이 될 테다. 똑같은 걸로 20년을 우려먹는 걸 보면 안 될 것도 없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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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를 통해 본 일본 대중 문화


현대 산업사회를 바꾼 발명품으로 꼽히는 키네토스코프는 1893년 커다란 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사진을 일인 가시용으로 볼 수 있었던 기계이다. 이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스크린에 영사된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는 프로젝션 시스템의 개발로 영화의 탄생과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 이후 영국, 독일 등 유럽 선진국가에서는 영화기구의 독자적인 발명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기계를 만들기보다는 외국의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적으로 영화의 기구를 수입하였으는 이는 1896년의 일이다. 그들이 신문에 최초로 사진을 실은 것이 1894년이니 서구의 가장 첨단의 문물을 가장 일찍 수입한 나라가 일본인 셈이다.


앞서 살펴본 만화/애니메이션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영상산업이 꽃 피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선진문물의 적극적이고 발빠른 수용도 있지만, 가부키로 대표되는 그들의 공연문화가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상 기구의 도입으로 탄력을 받은 일본은 이후 빠테사와 영화수입계약을 맺음으로써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교역의 터전을 마련한다. 이어 1903년 일본 최초의 극장인 아사쿠사 전기관을 개관함으로써 간다, 오사카에서도 속속 극장이 문을 열게 된다. 이때 영화의 해설을 돕는 '변사'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초반 발성영화가 도래할 때까지 유지된다. 1910년에는 신파극과 가부키극을 제작하는 자체 영화사가 만들어지고 1912년 드디어 도쿄 촬영소가 생겨나면서 메이저 회사가 생기고 배우가 양성되는가 하면 서양 작품을 번안하여 새로운 영화로 상영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이후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며 극장도 많아지고 다양한 작품이 실험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잠시 주춤했던 영화산업은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도시의 계획과 새로운 질서에 힘입어 20년대 후반에는 일반 관객이 5배 이상 증가하는 이변을 낳기도 한다.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계급문학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서도 리얼리즘 영화가 양산되도 프르키노 단체가 등장한다.


1927년 세계 최초의 사운드 영화인 <재즈싱어>의 등장으로 일본도 1930년에 들어서는 토키영화체제로 바뀌게 된다. 배우의 연기나 목소리, 배경음악 등이 중요해짐에 따라 영화제작이 확대되고 대형 영화사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경연극 배우가 연기하던 자리를 메꿀 전문적인 배우의 등장이 시급해졌다. 그러면서 멜로영화나 소시민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소개되었고 영화는 점점 현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치르며 일본 사회는 천황제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전시체제로 바뀌게 된다. 다이쇼 시대에 꽃 피었던 각종 문화산업은 쇼와기에 들어서는 모든 것이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퇴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전쟁영화인 <5인의 척후병>, <흙과 병정> 등을 보면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사쿠라 동기생들이 '사쿠라가 지면 만나자'고 외치는 그들만의 죽음의 미학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영웅이나 검객이 등장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전후 영화는 미군정하에서 전쟁, 군국주의, 원폭, 반민주주의, 칼 등이 등장하는 영화는 검열의 대상이 된다. 검열을 피해가기 위한 예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의 첫 영화 <스카타 산시로>의 배경을 메이지시대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천황의 패전 발표와 함께 일본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는 문화 예술 사회 전반에 혼란과 갈등을 남겼지만 미군에 의해 흘러들어온 락이나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 등은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문화양식으로 표출된다. 50년대는 구로자와 아키라, 오즈 야스시로. 미조구치 겐지로 대표되는 세계 영화사에 있어 길이 남을 세 명의 거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2. 전후 일본 영화의 특징


전후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1949년 사실상 미군의 검열제가 폐지되고 이후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원폭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소개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50년대는 전국민이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 이시하라 유지로가 등장하였고, 60년대는 단카이세대의 주도하에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순수한 극영화(ATG)와 영화사인 쇼치쿠를 중심으로 한 누벨바그가 새로운 흐름으로 실험되었다. TV의 보급으로 영화만의 특징이 더욱 고민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영화(협객영화, 로망 포르노, 샐러리맨 테마의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70년대에는 독립영화는 많아졌지만 오일쇼크로 인해 상대적으로 영화는 침체기였으며 일본판 007이라 불리는 <남자는 괴로워>,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낚시꾼 이야기> 나 추리영화가 제작되었다. 80년대는 버블경제가 드러나면서 영화시장은 더욱 축소된다.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 또한 나름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장례식>이나 <병원> , <남극 이야기> 류의 시리즈물과 멜러, 코믹물이 생산된다. 90년대는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영화(다케시 류의)와 미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같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영화, 사회성을 테마로 한 영화 등이 다채롭게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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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근대문학의 흐름 1

1. 근대문학의 여명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유신에서부터 태평양전쟁(1868~1945년)의 패전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갑오경장을 시초로 8.15 해방까지를 근대라고 보는 우리의 근대 구분과 대략 같은 궤에 있다. 메이로쿠샤(明六社, 모리 아리노리가 중심이 되어 1873년 결성된 계몽된 학술 단체.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쓰다 마마치 등이 핵심 인물이며 서유럽 문명 도입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해나갔다.)는 근대화의 완성을 위해 계몽을 주장했고 이는 부국강병의 국가 이데올로기 구현으로 이어진다. 초기 계몽사상의 핵심은 평등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로 대변된다. 여성, 아이, 상인들 사이 형성된 세속 문학이었던 전근대 문학양식이었던 게사쿠(戯作, 장난삼아 지은 작품이라는 뜻으로 샤레본西落本, 곳케이본, 기뵤시黃表紙, 고칸合券, 요미혼, 닌조본人情本 등이 이에 속한다.)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덕목에 밀려 무용한 것으로 냉대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재빨리 부응한 게사쿠 작가로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 있다. 게사쿠 작가로는 나가키 로분(1829~1894)이 대표적이며 그는 사양 문물을 소개한 『서양만유』, 쇠고기 요리점에서 서민들의 입을 빌어 개화기 풍속을 풍자한 『책상다리 냄비』와 같은 글을 썼으며 이후 케사쿠 작가들은 신문의 연재를 맡기도 하였다.

『메이지 문학사』를 쓴 나카무라 미츠오는 "메이지라고 하는 시대는 서양의 영향으로 일본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바뀐 시대"라고 하였는데 문화 면에서 이를 반영하는 것이 번역물이다. 입신출세 청년의 이야기인 새무얼 스마일스 『자조론』(1871), 피터 팔리 『서양야화』(1874), 기조 『유럽 문명사』(1874) 등은 근대국가와 문명의 성립과정, 그리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며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번역된 문학작품으로는 에드워드 리튼의 『어네스트 맬트라버스』(1878),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1878), 『달나라 여행』(1878),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872),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880), 알렉상드르 뒤마의 『바스티유 탈취』(1882), 『어떤 의사의 회상』(1882), 폴 베르니에의 『허무당 퇴치기당』(1882), 디즈레 일리의 『크닝스비』(1884) 등이 있다. 이는 과학에 기초한 문명의 경이, 강점, 서양 법률 과제, 생활상 등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을 여성이나 아이들, 상인들의 오락거리로 생각하던 당시 문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20년을 근대 이식 과도기라고 하는데 이때 문학의 양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정치소설의 등장이다. 1880년대는 자유당, 입헌재헌당이 창립되고 정치활동의 연장선으로 정치소설이 쓰여졌다. 대표적인 것이 민권운동의 승리 과정을 다룬 『설중매』(1886)이며 스에히로 데츠초는 속편 『화간앵』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개진당으로 대표되는 당시 국권운동의 연장으로 야노 류케이의 『경국미당』(1883~1884)이 있다. 그리스 약소국인 테베가 스파르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권회복'을 역설하는 정치 슬로건이 된다. 도카이 산시는 『기인이 기우』(1885~1897)에서 강대국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다. 셋째는 부국강병을 내세운 '계몽'이다. 이는 당시 여권신장과 맞물려 있으며 사카자키 시란의 『미인국』(1889)을 탄생시키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주류는 역시 정치소설이며 정치소설의 효시라 평가받는 도다 긴도의 『정해파란』(1880) 이후 10년 동안 약 220편의 정치소설이 출간되었음은 이를 반영한다.

1890년대의 특징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정치소설뿐만이 아니라 순수문학의 번역이 활발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호프만, 빅토르 위고, 알프레드 테니슨, 알퐁스 도데, 레오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투르게네프와 같은 세계문학 전집에 속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는 지식인, 엘리트층의 소설 창작 의욕을 자극하고 통속적이라고 던져놓았던 소설의 주제에 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20년간을 흔히 "화혼한재和魂漢才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궤도 수정하는 과도기"라고 하는데 고바야시 히데오는 좀더 정확히 말해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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