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재灰 > 彼(he)와 彼女(she). 번역과 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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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ㅣ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평점 :
<번역어 성립사정>과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독후감
1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역사와 문화가 다른 서구의 용어를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가령 ‘love’에 근접한 한자어는 ‘연(戀)’이나 ‘애(愛)’인데 ‘연’은 남녀간의 육체적 열정을 뜻하고 ‘애’는 부모의 자식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에 유럽풍의 낭만적인 청춘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젊은 이성간의 아름다운 열망을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이런저런 역어가 사용되다가 1890년 한 잡지사의 편집자가 ‘연애’를 사용한 글을 발표한 이후 이 말이 번져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연애’는 ‘연’이나 ‘애’가 기왕에 갖고 있던 것과 다른, 보다 고상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신선한 말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어의 성립 사정을 소개하면서 저자 야나부 아키라는 ‘연애’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일본에서도 비로소 서구적 연애가 하나의 풍속으로 생겨났다고 말한다. ‘로맨스’나 ‘파우스트’에서 볼 수 있는 그런 ‘love’는 일본 전통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기표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것의 기의는 그 후에 일구어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처럼 먼저 말이 있고 그에 따라 실체가 생겨났다는 이 관점은 동양 사회에는 없던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개인’ ‘근대’ ‘존재’ ‘자연’ 등,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워진 용어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령, ‘society’는 19세기 전반부터 ‘반려’ ‘교제’ ‘집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도 ‘인간교제’라고 옮겼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단체’를 뜻하는 ‘사’와 ‘모임’을 가리키는 ‘회’를 합성해서 ‘사회’란 말로 옮겨졌고 그게 번지면서 일정한 용어로 정착했다. 이렇게 번역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은 당시 일본에서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도, 역사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번역어가 지시하는 기의의 모호성은 ‘카세트(cassette, 작은 보석함,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 효과에 따른 유행을 낳았다. 그 유행은 번역어에 걸맞는 기의(현실)를 사후적으로 창출하는 근간이었다.
2
번역어 ‘彼(he)․彼女(she)’는 직접적으로 우리 근대문학의 형식과 내용에 직결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의 근대문학’이 우리 근대문학의 주조틀로 기능했다는 김윤식의 이른 시기 주장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염상섭의 「암야」․「재야」 등 초기 소설의 난해한 내면 고백체는,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의 근대소설”에 의해 쓰여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옮겨 온다.
이 3부작이 한결같이 <피>와 <피녀>의 주박(呪縛)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 숨길 수 없는 증거이다. 이 두 단어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대명사도 아니다. 이 두 단어를 에워싸고 모든 문체가 형성되었던 것인 만큼 이 두 단어는 일본의 언문일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언문일치란 무엇인가. 이 물음 없이 일본의 근대소설을 논의할 수는 없다. 동시에 개화기 이래 우리 근대소설 및 언문일치도 논의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출판부, 1987, 188쪽)
김윤식은 염상섭의 중요성을 위와 같은 彼․彼女의 사용에 따른 내면의 형성에서 찾고 있다. 이는 일본 사소설(私小說)의 원조라 평해졌던 타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彼小說’이라고 부르는 야나부 아키라의 맥락과 이어져 있다. 그는 “이 피소설은 단지 작자인 ‘나’를 얘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나’를 ‘그(彼)’에 의탁하고 있다. 이 ‘그’가 3인칭의 특성을 갖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작자인 ‘나’도 이 ‘그’를 통해서 3인칭화되고, 객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어 ‘彼’가 사소설 속 ‘나’의 ‘내면풍경’을 만들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같은 사정이 위 김윤식이 주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 근대문학’의 일면을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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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개화기 지식인들은 일본에는 없는 서구적 개념을 어떻게 한자어로 옮길 것인가로 고심하며 이것저것 써 보다가 새 말을 만들었으며, 그 신조어가 거꾸로 실체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저자는 번역어의 역사를 통해 흥미롭게 짚어 내었다. 우리의 근대기 지식인들은 대체로 일본을 통해 서구와 근대의 문화를 수용했고 그것도 같은 한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겪은 고민의 과정을 건너뛰며 어렵지 않게 서구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서구적 개념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고뇌도 희미했고 근대적인 가치의 실체화에서도 그만큼 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 ‘사회주의’ 같은 용어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오래지만 그 말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이 실제로 우리에게 확인된 것은 겨우 반 세대 전이었던 사실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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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은 제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고 했다. 김용옥의 센세이셔널한 행보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 이전에 그의 번역에 대한 발언은 숙고의 대상일 듯하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지난 19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학계의 천황으로 불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문예비평가이자 작가인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의 문답을 엮은 책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서로 다른 행로를 간 중요한 배경에, 번역을 통한 서구문화의 수용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근대화의 창(窓)’으로서 번역의 문제는 아직까지 고쳐야할 문제점이 많은 현재진행형의 사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도 중기 이래의 란가쿠(蘭學)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은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 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상당수와 학문적으로 쓰는 대부분의 전문 용어, 즉 자유(自由), 평등(平等), 권리(權利), 인권(人權), 정의(正義), 민주주의(民主主義), 시간(時間), 공간(空間), 의무(義務), 책임(責任), 도덕(道德), 원리(原理), 철학(哲學), 사회학(社會學), 미학(美學) 등은 모두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문화를 수용하면서 번역해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말들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번역 작업을 통해 서양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일본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근대 일본만이 아니다. 역사상 어느 문명이든 다른 문명과 처음 접촉할 때 가장 먼저 수행되는 작업은 바로 번역이다. 예컨대 서양 세계는 중국과 접촉을 시작했을 때, 중국 고전을 서양어로 번역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영국인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이미 19세기에 중국 고전 상당수를 영역하여 정본화 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중국 연구는 레그의 번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라고 말하듯이 외부의 충격에 의해 근대의 길에 들어선 비서구권 국가들의 지식인들은 서양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번역을 통해 서양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습속까지 수용한 동아시아의 근대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이 앞장서서 직접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의 근대는 힘겨운 ‘투쟁’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근대사상을 구축했다.
민족문학사연구소가 1894년부터 1910년 사이에 공간된 서적의 서문과 발문을 뽑아 엮은 근대 계몽기의 학술·문예사상(소명출판, 2005)에 실린 77종의 책 중 번역서는 20종이 채 못 된다. 그나마 일본인이 쓴 폴란드망국사를 번역한 파란말년전사와 월남망국사나, 중동전기와 같은 중국인이 번역한 책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을 제외하면 서구의 텍스트를 판본으로 삼아 직접 번역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위에 언급한 일본의 그런 과거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찰단이라고 해야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이나 ‘영선사’정도였고, 일본처럼 유학생 파견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설립된 ‘조선장학회’는 구한말 정쟁의 와중에서 일본에 파견된 유학생들에 대해 조선정부가 지원을 중단하자 일본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장학회 단체다. 조선왕조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전략에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번역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서구문화의 오퍼상’이라는 극단적인 평가처럼 외국학문과 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면서도 제대로 된 번역서나 이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이 우리 현실의 일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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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 만에 이르니 한우충동(汗牛充棟)이 무색할 지경이다.” 야노 후미오가 쓴 번역서 가이드북 ‘역서독법(譯書讀法)’(1883)의 이 말은 일본의 ‘근대’를 형성한 저력이 ‘번역’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마루야마와 가토에 따르면, 아편전쟁에서 중국 청(淸)나라의 패전을 목격하고 양이론(攘夷論)을 포기한 일본이 서양을 배우자는 근대화의 분위기를 타고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외국인 교사의 수용과 유학생·시찰단의 파견, 그리고 번역을 통해서였다. 메이지시대 불과 6∼7년 사이에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수 만권의 책이 번역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토의 표현대로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일본인들의 극적인 사고 전환이 있었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중국의 늦장대응과 일본은 달랐다고 한다. 일본은 지친 열강이 가져다 준 행운과 중국을 통한 반면교사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같은 인적 자원과 함께 내적으로는 17세기말 일본에서 처음으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의식한 오규 소라이의 존재가 메이지 번역문화의 확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오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라며 기존의 인식을 거부했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다언어가 존재하고 그런 만큼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소라이는 의식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을 두고 대담자들은 ‘의식혁명’이라고 평했다. 이는 소라이학을 통해 일본에서는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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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성의 대담을 통해, 메이지 시기 번역이 일본의 근대화와 그 근대화의 주체로서의 국민의 정체성을 두고 이뤄진 투쟁의 장이었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각축전은 서양에서 장구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정착했던 다양한 정치경제적․이데올로기적 체제와 사유에 대한 근대 일본인들의 매혹과 고민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의 근대 지식인들이 느꼈을, 혹은 건너 뛰었을 그런 매혹의 맹목과 고민의 밀도를 확인하는 것은 소중한 작업일 것이다. 근대 일본은 프랑스학과 영국학에서 독일의 국가주의로 귀결되었다. 번역을 통한 투쟁의 장에서 일본은 제국주의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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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여파가 급진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정학』(社會靜學 Social Statics)을 마쓰시마 쓰요시가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이라 번역했다. “statics란 표현은 dynamics와 반대되는 말로서 ‘정태학’(情態學)이라는 의미인데 ‘평권론’이라고 번역해 놓음으로써 마치 ‘평등주의’인 양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번역의 오류가 스펜서의 보수적 성향의 책을 자유민권운동가의 성전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번역한 조어들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쓰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슌다이는 『경제록』에서 물질적인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당시까지 패러다임이던 '도리'의 대립으로 ‘물리’라는 조어를 내세웠는데, 이는 physics의 번역어다.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 니시 아마네는,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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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의 번역을 맡은 임성모의 시각에서도 계발되는 바가 많다. 한국의 근대를 두고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라고 지적하는 대목이 그러하며, 한국의 근대가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번역의 행로’를 통해 재구되어야함을 지적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에 대한 긴 대담을 자국의 문화자립을 위한 고찰이라고 했을 때, 임성모는 그런 문화적 자립과 정체성의 확립은 이미 쌍방적이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의 장(場)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장의 분석을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 ‘번역’론이었다. 이 대담의 번역을 통해, “번역을 통한 각 언어들 사이의 연쇄, 나아가 번역을 통해 형성되는 제반 학문들의 지역간․국가간 연쇄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근대는 온전히 복원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