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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彼(he)와 彼女(she). 번역과 중역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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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성립사정>과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독후감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역사와 문화가 다른 서구의 용어를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가령 ‘love’에 근접한 한자어는 ‘연(戀)’이나 ‘애(愛)’인데 ‘연’은 남녀간의 육체적 열정을 뜻하고 ‘애’는 부모의 자식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에 유럽풍의 낭만적인 청춘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젊은 이성간의 아름다운 열망을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이런저런 역어가 사용되다가 1890년 한 잡지사의 편집자가 ‘연애’를 사용한 글을 발표한 이후 이 말이 번져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연애’는 ‘연’이나 ‘애’가 기왕에 갖고 있던 것과 다른, 보다 고상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신선한 말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어의 성립 사정을 소개하면서 저자 야나부 아키라는 ‘연애’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일본에서도 비로소 서구적 연애가 하나의 풍속으로 생겨났다고 말한다. ‘로맨스’나 ‘파우스트’에서 볼 수 있는 그런 ‘love’는 일본 전통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기표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것의 기의는 그 후에 일구어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처럼 먼저 말이 있고 그에 따라 실체가 생겨났다는 이 관점은 동양 사회에는 없던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개인’ ‘근대’ ‘존재’ ‘자연’ 등,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워진 용어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령, ‘society’는 19세기 전반부터 ‘반려’ ‘교제’ ‘집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도 ‘인간교제’라고 옮겼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단체’를 뜻하는 ‘사’와 ‘모임’을 가리키는 ‘회’를 합성해서 ‘사회’란 말로 옮겨졌고 그게 번지면서 일정한 용어로 정착했다. 이렇게 번역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은 당시 일본에서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도, 역사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번역어가 지시하는 기의의 모호성은 ‘카세트(cassette, 작은 보석함,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 효과에 따른 유행을 낳았다. 그 유행은 번역어에 걸맞는 기의(현실)를 사후적으로 창출하는 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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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어 ‘彼(he)․彼女(she)’는 직접적으로 우리 근대문학의 형식과 내용에 직결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의 근대문학’이 우리 근대문학의 주조틀로 기능했다는 김윤식의 이른 시기 주장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염상섭의 「암야」․「재야」 등 초기 소설의 난해한 내면 고백체는,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의 근대소설”에 의해 쓰여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옮겨 온다.

  이 3부작이 한결같이 <피>와 <피녀>의 주박(呪縛)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 숨길 수 없는 증거이다. 이 두 단어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대명사도 아니다. 이 두 단어를 에워싸고 모든 문체가 형성되었던 것인 만큼 이 두 단어는 일본의 언문일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언문일치란 무엇인가. 이 물음 없이 일본의 근대소설을 논의할 수는 없다. 동시에 개화기 이래 우리 근대소설 및 언문일치도 논의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출판부, 1987, 188쪽)     

  김윤식은 염상섭의 중요성을 위와 같은 彼․彼女의 사용에 따른 내면의 형성에서 찾고 있다. 이는 일본 사소설(私小說)의 원조라 평해졌던 타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彼小說’이라고 부르는 야나부 아키라의 맥락과 이어져 있다. 그는 “이 피소설은 단지 작자인 ‘나’를 얘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나’를 ‘그(彼)’에 의탁하고 있다. 이 ‘그’가 3인칭의 특성을 갖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작자인 ‘나’도 이 ‘그’를 통해서 3인칭화되고, 객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어 ‘彼’가 사소설 속 ‘나’의 ‘내면풍경’을 만들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같은 사정이 위 김윤식이 주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일본 근대문학’의 일면을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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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개화기 지식인들은 일본에는 없는 서구적 개념을 어떻게 한자어로 옮길 것인가로 고심하며 이것저것 써 보다가 새 말을 만들었으며, 그 신조어가 거꾸로 실체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저자는 번역어의 역사를 통해 흥미롭게 짚어 내었다. 우리의 근대기 지식인들은 대체로 일본을 통해 서구와 근대의 문화를 수용했고 그것도 같은 한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겪은 고민의 과정을 건너뛰며 어렵지 않게 서구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서구적 개념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고뇌도 희미했고 근대적인 가치의 실체화에서도 그만큼 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 ‘사회주의’ 같은 용어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오래지만 그 말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이 실제로 우리에게 확인된 것은 겨우 반 세대 전이었던 사실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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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옥은 제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고 했다. 김용옥의 센세이셔널한 행보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 이전에 그의 번역에 대한 발언은 숙고의 대상일 듯하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지난 19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학계의 천황으로 불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문예비평가이자 작가인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의 문답을 엮은 책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서로 다른 행로를 간 중요한 배경에, 번역을 통한 서구문화의 수용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근대화의 창(窓)’으로서 번역의 문제는 아직까지 고쳐야할 문제점이 많은 현재진행형의 사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도 중기 이래의 란가쿠(蘭學)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은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 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상당수와 학문적으로 쓰는 대부분의 전문 용어, 즉 자유(自由), 평등(平等), 권리(權利), 인권(人權), 정의(正義), 민주주의(民主主義), 시간(時間), 공간(空間), 의무(義務), 책임(責任), 도덕(道德), 원리(原理), 철학(哲學), 사회학(社會學), 미학(美學) 등은 모두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문화를 수용하면서 번역해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말들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번역 작업을 통해 서양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일본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근대 일본만이 아니다. 역사상 어느 문명이든 다른 문명과 처음 접촉할 때 가장 먼저 수행되는 작업은 바로 번역이다. 예컨대 서양 세계는 중국과 접촉을 시작했을 때, 중국 고전을 서양어로 번역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영국인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이미 19세기에 중국 고전 상당수를 영역하여 정본화 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중국 연구는 레그의 번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라고 말하듯이 외부의 충격에 의해 근대의 길에 들어선 비서구권 국가들의 지식인들은 서양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번역을 통해 서양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습속까지 수용한 동아시아의 근대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이 앞장서서 직접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의 근대는 힘겨운 ‘투쟁’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근대사상을 구축했다.

  민족문학사연구소가 1894년부터 1910년 사이에 공간된 서적의 서문과 발문을 뽑아 엮은 󰡔근대 계몽기의 학술·문예사상󰡕(소명출판, 2005)에 실린 77종의 책 중 번역서는 20종이 채 못 된다. 그나마 일본인이 쓴 󰡔폴란드망국사󰡕를 번역한 󰡔파란말년전사󰡕와 󰡔월남망국사󰡕나, 󰡔중동전기󰡕와 같은 중국인이 번역한 책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을 제외하면 서구의 텍스트를 판본으로 삼아 직접 번역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위에 언급한 일본의 그런 과거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찰단이라고 해야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이나 ‘영선사’정도였고, 일본처럼 유학생 파견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설립된 ‘조선장학회’는 구한말 정쟁의 와중에서 일본에 파견된 유학생들에 대해 조선정부가 지원을 중단하자 일본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장학회 단체다. 조선왕조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전략에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번역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서구문화의 오퍼상’이라는 극단적인 평가처럼 외국학문과 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면서도 제대로 된 번역서나 이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이 우리 현실의 일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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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즈음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 만에 이르니 한우충동(汗牛充棟)이 무색할 지경이다.” 야노 후미오가 쓴 번역서 가이드북 ‘역서독법(譯書讀法)’(1883)의 이 말은 일본의 ‘근대’를 형성한 저력이 ‘번역’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마루야마와 가토에 따르면, 아편전쟁에서 중국 청(淸)나라의 패전을 목격하고 양이론(攘夷論)을 포기한 일본이 서양을 배우자는 근대화의 분위기를 타고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외국인 교사의 수용과 유학생·시찰단의 파견, 그리고 번역을 통해서였다. 메이지시대 불과 6∼7년 사이에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수 만권의 책이 번역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토의 표현대로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일본인들의 극적인 사고 전환이 있었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중국의 늦장대응과 일본은 달랐다고 한다. 일본은 지친 열강이 가져다 준 행운과 중국을 통한 반면교사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같은 인적 자원과 함께 내적으로는 17세기말 일본에서 처음으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의식한 오규 소라이의 존재가 메이지 번역문화의 확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오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라며 기존의 인식을 거부했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다언어가 존재하고 그런 만큼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소라이는 의식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을 두고 대담자들은 ‘의식혁명’이라고 평했다. 이는 소라이학을 통해 일본에서는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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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지성의 대담을 통해, 메이지 시기 번역이 일본의 근대화와 그 근대화의 주체로서의 국민의 정체성을 두고 이뤄진 투쟁의 장이었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각축전은 서양에서 장구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정착했던 다양한 정치경제적․이데올로기적 체제와 사유에 대한 근대 일본인들의 매혹과 고민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의 근대 지식인들이 느꼈을, 혹은 건너 뛰었을 그런 매혹의 맹목과 고민의 밀도를 확인하는 것은 소중한 작업일 것이다. 근대 일본은 프랑스학과 영국학에서 독일의 국가주의로 귀결되었다. 번역을 통한 투쟁의 장에서 일본은 제국주의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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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여파가 급진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정학』(社會靜學 Social Statics)을 마쓰시마 쓰요시가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이라 번역했다. “statics란 표현은 dynamics와 반대되는 말로서 ‘정태학’(情態學)이라는 의미인데 ‘평권론’이라고 번역해 놓음으로써 마치 ‘평등주의’인 양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번역의 오류가 스펜서의 보수적 성향의 책을 자유민권운동가의 성전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번역한 조어들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쓰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슌다이는 『경제록』에서 물질적인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당시까지 패러다임이던 '도리'의 대립으로 ‘물리’라는 조어를 내세웠는데, 이는 physics의 번역어다.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 니시 아마네는,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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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담의 번역을 맡은 임성모의 시각에서도 계발되는 바가 많다. 한국의 근대를 두고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라고 지적하는 대목이 그러하며, 한국의 근대가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번역의 행로’를 통해 재구되어야함을 지적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에 대한 긴 대담을 자국의 문화자립을 위한 고찰이라고 했을 때, 임성모는 그런 문화적 자립과 정체성의 확립은 이미 쌍방적이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의 장(場)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장의 분석을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 ‘번역’론이었다. 이 대담의 번역을 통해, “번역을 통한 각 언어들 사이의 연쇄, 나아가 번역을 통해 형성되는 제반 학문들의 지역간․국가간 연쇄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근대는 온전히 복원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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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시아의 근대화를 읽는 서브 텍스트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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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근대화연쇄점"을 기억하시는가?

내가 어렸을 때 "근대화"는 오늘날의 세계화 혹은 지역화처럼 유행어였던 모양이다. 구멍가게보다는 조금 크고 오늘날 우리가 마트 혹은 수퍼마킷이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잡화점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가게들 중에 일종의 체인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근대화연쇄점이라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굳이 "근대화의 역군"이라든지 하는 우리 주변의 떠들석했던 여러 구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근대화""반공"과 함께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근대화가 의도하고자 했던 숨겨진 정서는 아마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더 못산다"던 이승만 정권 시절의 지긋지긋한 가난, 우리 민족 반만년을 억누른 배고픈 설움을 극복해보자는 것이었을 게다.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란 책에 대해 말하면서 왜 느닷없이 "근대화" 타령인가, 그것은 "만철", 아니 "만주국"이 우리 근대화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따라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쉽게 정의되기 어려운 말이면서 시대 상황과 그 말이 쓰이는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생각하는 근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근대화는 크게 두 가지을 의미한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막스 베버식의 관점을 차용했을 때 근대화란 봉건사회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아 혹은 다른 여타 후진 사회에 도입했을 때 근대화는 단순하게 보자면 서구화 혹은 서유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협소한 개념으로 보는 이들은 어느 한 사회가 다른 단계로 전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응당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근대화는 단순하게 서구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근대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해 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근대화는 어찌 보자면 서구화(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와 착각하지 마시길 -  교수는 "대동아공영권, 쇼와 파시즘, 중일전쟁" 등 일제 침략사를 연구해온 일본의 중량급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 제목들이 알려주듯 그는 전쟁전 일본의 과거를 탐문하고 있다. 그의 저서 "만철"에서 종종 일본에 의해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묻어나는 것은 역시 그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탓이다. 스티븐 E. 앰브로스의 저서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남북전쟁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을 대륙횡단철도 부설에 놓고 있다.

1865년 미국에서 시작된 센트럴 퍼시픽과 유니온 퍼시픽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는 대사업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대의 삶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뀌게 되는 과정,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랄 수 있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의 도화선이자 바탕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되는 초석을 놓아기 때문이다. 중국은 상해와 같은 동부 해안으로부터 옌안과 같은 내륙으로 100km 들어갈 때마다 시대적으로 10년씩 뒤로 밀려난다고 한다. 근대화가 동부 해안 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국이 장강 삼협댐 건설과 같은 내륙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얼마전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만에 주파한다는 고속철도는 그러나 서울에서 멈춰버렸다. 만약 이 열차가 평양을 거쳐, 신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에서 파리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반도국가라는 지리점 잇점을 십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일제강점기였기는 하나 우리의 선조들이 열차를 타고 만주와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만주와 고구려사,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도 이 책은 재미난 도입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주국과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만철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서부개척의 총본부였던 것처럼, 만철이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일제의 만주경영을 맡은 사실상 식민기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만들고 싶었던 나라 만주국의 실질적인 브레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화 모델 박정희의 사상적 뿌리와 모델이 바로 그곳 만주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8·15광복 이전까지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만철보다는 만주국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저자 자신이 만철을 이야기하며 만철을 통해 만주국 경영 문제가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잇는 주요 맥락으로 살피고 있는 이유이다. 만주국은 전후인 1950년대 일본이 이룩한 경제기적의 기본 정책을 실험했던 곳이고, 현재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들의 양대 뿌리를 이룬 박정희와 김일성이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만주는 동북아 근/현대사의 블랙박스인 것이다. 박정희만 만주 출신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최장기 국무총리를 지냈던 최규하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국 관리 출신이란 점에 주목해 보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원형이 시작된 곳,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이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근대화의 두 얼굴 - 착취와 풍요

이 책을 읽노라면 종종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간과하고 있는 몇 가지가 느껴져서 개운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고바야시 히데오가 만철의 낭만적인 면모에 몰입한 나머지 만철의 기본적인 속성과 숨겨진 의도를 적절하게 노출시키지 못하거나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이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건립한 뒤에 네덜란드를 식민지배했고, 영국인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뒤 인도를 식민지배했다. 만철은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일본은 민간회사를 가장해 제국주의적 침식의 한 수단으로서 만철을 이용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일본 정부는 만철이 주도한 식민 침탈을 단지 민간회사의 실수로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잡아 뗄 수 있었다.

앞서 우리 사회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말했다.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만철의 경제개발, 경제발전에 주목하면서 만주철도와 근대화가 지닌 다른 어두운 측면을 손쉽게 건너띈다. 오늘날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유통업체들이 지역 사회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질식시키듯,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서점들이 지역 사회의 영세 서점들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철도를 통해 이룩한 근대화(산업화)는 지역 혹은 한 국가, 민족의 자급자족적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팽창을 좀더 손쉽게 만들어 준다. 조선의 근대화가 단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철도 부설을 위해 저임금과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근대화 역군들의 얼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우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싼 값, 최단기간에 건설되었다는 근대화의 업적에 도취해 종종 그 뒤안길에서 살인적인 노동강도, 안전없이 강행된 공사로 인해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기존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동북아시대위원회'로 개칭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크게 확대)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미래 비전은 종종 과거 만철과 일본이 추진하고자 했던 '대동아공영권'- 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 다른 성질의 유사한 지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북아네트워크 건설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의 두 가지 덕목 중 한 가지인 산업화는 분명하게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추진한 근대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절름발이 근대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통과해왔고,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된 "민족국가" 건설이란 측면에서 아직 절름발이 상태에 놓여 있고, 식민지 지배 마인드 속에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의 후유증 속에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민주화의 추진과정에서 끊임없이 박정희 모델이라는 이전의 망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싯점마다 되풀이 되는 과거 청산과 수구보수세력의 역공은 물론 그들 자체가 이땅의 견고한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지만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세력, 민주화를 성취하겠다는  개혁세력이 박정희 모델로 표현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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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1

nationalism의 형성 배경

1. 대중은 언제 출현하는가?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분리시켜주는 것을 총괄하여 '문화'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유기체를 넘어서서 공유되고 전달되는 정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대중은 크게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로 번역된다. mass culture는 대량으로 복제되는 문화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개념(문화의 생산과정, 대량복제가 가능한 매스미디어가 등장한 근대자본주의 이후의 문화산물로 한정되는 개념)이라면 popular culture(문화의 소비 또는 수용과정, 산업화 이전의 민중문화 내지 민속문화를 포괄하는 개념)는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향유하는 문화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는 '대중mass'이라는 존재 자체, 대중사회mass society를 전제로 성립된다. 대중의 등장은 대량생산, 대량전달, 대량소비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대중이란 누구인가?

2. 대중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성립되었는가?

이는 전통적인 공동체(게마인샤프트)의 해체, 기존 사회의 공간적, 사회적 제약에서 풀려난 개인들이 광범위하게 이동하면서 형성되는 매우 새로운 인간관계의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서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면서 일정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동질감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민주주의 의식을 갖은 '시민'으로 칭했고 근대국가에서는 이들을 '국민'이라고 칭했다. 여기서 근대 국민국가가 나타날 때 형성되는 '민족주의nationalism'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는 국경, 주권, 영토에 의해 형성된 국민국가에서 자국민의 애국심과 소속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념이 된다. 이는 그들의 동질감과 정체성을 강조하여 강력한 국가의 기반이 되는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

근대사회에서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카를 도이체는 "광범위한 지역에 확장하는 경제 교류의 결과 중심지역이 주도권을 잡는 방식으로 문화적 동화(언어의 동질화)가 일어나 '소수민족'이 보다 커다란 지배적인 내셔널리즘에 흡수되어간다"고 논했다.

이를 이어받아 민족주의를 공업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이해한 에른스트 게르너는 "사람들의 아이덴티티의 원천은 지역색이 농후한 공동체와 그 안에서 주어지는 생득적 역할에 있다"고 보았다. 그 안에서는 엘리트와 서민의 사이가 문화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국가가 생길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유동적인 노동인구를 필요로 하는 공업화 과정, 즉 많은 사람들이 혈연과 지연으로 맺어진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대거 이동하면서 민족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공용어의 확보는 그들의 협동과 분업에 필요한 요소였고 때문에 언어와 문화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통합이 요구되는데 이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참고> 에른스트 게르너,  <민족과 민족주의>(예하)   백낙청 엮음,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창비)

3. 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가?

그렇다면 왜 민족주의인가? 민족주의의 기원을 민족주의 특질과 연결시킨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사회에 들어 교통과 커뮤니케이션(신문, 잡지, 책)의 급속한 진전 속에서 사람들은 국민적 정체성을 획득했다고 본다. 그는 원거리를 넘어 타자를 공감시키는 능력과 심리적 동원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보된 공통의 정체성은 의사소통수단의 발달로 역사적 동력을 얻는다고 본다. 그는 '국민'이라는 것은 이미지로서 마음에 그려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고 피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 단위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문화적 장치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만은 아니라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의 문제이다. 홉스봄은 우리들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하기 쉬운 '전통'이 사실은 많은 경우 근대에 접어들어 인위적으로 '창조된'(다시 말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홉스봄은 전통이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참고>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나남),  홉스봄, <전통의 창조>/<전통의 날조와 창조>(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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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2

일본적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일본의 시대 구분

상대上代(~794) : 아마토, 나라시대

중고中古(794~1192) : 헤이안시대

중세中世(1192~1603) : 가마쿠라시대--남북조시대--무로마치시대

근세近世(1603~1868) : 에도시대

근대近代(1868~) : 메이지시대(1866~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89)--헤이세이(1989~)

 

2. 일본적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일본은 엄격한 의미에서 개국을 받아들인 근대 이전에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는 왕 중심의 봉건적인 중앙집권국가 체제였던 한국, 중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구별점이 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영주나 무사가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지방분권 체제를 유지한 봉건사회였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강력한 구심점이자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된 천황를 중앙에 세움으로써(천황제) 비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국을 단행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각각의 나라) 유지의 반발과 통합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근대문화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민'을 이러한 민족주의에 동원한다.

물론 에도시대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이나 한국사람과는 다르다는 종족적 정체성ethmic identity은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학國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양의식은 중국(명나라-청나라)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아비의 나라인 명나라의 뒤를 이어 오랑캐국인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호란을 통해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小중화의식은 일본에서는 에도 말기 일본중심의 국학을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계층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의식의 성립은 메이지 30년간의 정치, 행정, 교육 제도의 중앙집권화와 공업화,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수단의 발달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3.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야만'을 극복한 '문명' 국가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문명사관은 대대적인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교를 통해 문명개화를 교육하고(이는 '순행'의 전통을 만들고 신민에게 천황을 선보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군대를 통해 천황의 국가를 결집시키며, 철도를 깔고 전신망을 구축하면서 각 지방을 중앙으로 모음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의식과 정서를 하나의 커다란 세계 속으로 통합해가는 토대를 마련한다.

1)문명개화정책

이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주체인 대중이 형성되는데, 이는 개혁에 필요한 근대적 개인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신분차별 타파(사민평등사상)를 통해 얻어진다. 이와 함께 징병제를 통해 국가방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여기서 군대는 새로운 문물(침대, 서양의 기술, 전투력)을 선전하고 익히는 학교가 된다. 또한 서양동요의 음을 따온 창가를 교과시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노래를 통한 일체감, 소속감을 부각시킨다. 각 지역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오마와리상(경찰관)을 둠으로써 지역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들의 소속을 중앙으로 응집시킨다(파출소제도). 그리고 긴자와 같은 서양식 거리를 조성하여 서양의 건축, 문화를 소개한다. 긴자에 시계탑을 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부수고 정시법에 따른 표준시를 정한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시간을 관리함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끌어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다든지 매장풍습을 화장으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는 등의 일상의 감각을 바꾸는 개혁을 통해 근대적 대중을 만들어나간다.

2) 식산흥업정책

이러한 일상적인 환경의 변화는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서 더욱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박람회이다. 이는 동물원이나 박물관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각(기린이나 코끼리의 등장은 전화나 라디오의 등장 못지않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대중에게 진기한 것들,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통로가 된다. 이는 분명 소비하고 싶은 충동과 연결되고 황무지에 떨어진 자전거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동차로 둔갑할 수 있는 생산 핫라인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들의 식산흥업정책이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외칠 수 있는 국민적 합의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러한 일말의 개혁 단행 조치에 맞선 지방 유지들의 반발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역민들의 소외 문제는 당연히 있어왔다. 특히 개혁의 첫 단계에서 실시된 판적봉환(구영주들로 하여금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납하도록 하고, 구영주를 구영지의 지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함)과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놓음 : 임명한 지사들을 면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정부가 임명한 부지사, 현령을 파견하여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인 부나 현을 다스리게 한 제도)은 사실상 봉건적인 지방 분권 체제를 종식하는 제도로 그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반발을 잠식시키는 가장 주된 힘은 문명개화정책과 맞물려 돌아간 식산흥업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전신(우정국:우체국)과 철도

하지만 박람회는 아무리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 해도 일부층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바, 국민의 체험을 공통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와 군대이다. 그들은 수학여행, 운동회, 소풍의 전통을 여기서 새로 새웠으며 이를 통해 집단적인 일본인 의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우편제도를 알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가교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학여행이나 군대에서 고향으로 보내는 엽서(이후 인쇄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한다)를 무료로 함으로써 엽서에 그려진 천황과 서양문물을 고스란히 지방 곳곳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또 엽서를 보내는 사람의 눈에 보인(수학여행과 소풍)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동경 등을 전국적으로 배달하게 된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중 확보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질문, '천황은 왜 중요한가?'에 대해 전국민이 '만세일계'를 외칠 수 있는 일체성을 은연중에 주입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들, 지방 곳곳까지 그러한 것을 국가가 심어줄 수는 없는 법. 국가는 여기서 지방과 중앙을 잇는 철도사업을 진행해 지방의 노동력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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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3

1. 다이쇼기를 전후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메이지시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비일상적인 여가문화로 자리잡아가던 서양풍은 다이쇼기에 접어들면서 대중들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공간에서 근대적 소비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데 도심과 교외 주택지를 연결하는 사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백화점문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근대 물리학에 주목했는가?

오랫동안 쇄국을 유지해온 일본(지역국가)이었지만 개국을 단행하면서는 서구문화의 채용을 국책사업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발맞추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과학 및 테크놀로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독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생긴 것이긴 하지만 그는 유럽 근대문명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불가결한 '도구'이며 그 도구에는 물질문명뿐 아니라 근데 테크놀러지를 만들어낸 근대 자연과학(물리학)이라는 학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근대 물리학에서 일본의 독립을 복돋우는 정신, 즉 '동양에 없는 것은 유형의 차원에서는 수리학이고, 무형의 차원에서는 독립심' 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초유의 베스트셀러 <학문의 장려>를 살펴보자. 그는 여기서 '신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또한 당시 일본인 3천만 명 중 글 읽는 사람은 대략 다 보았다는(70만 부)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적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이후 그의 글들을 살펴보자. <문명론 개략>에는 그는 인도인을 원숭이인 줄 알고 죽였다고 주장하는 영국인과 독일군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인도인과 같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하루 빨리 문명을 배워 서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 김옥균의 쿠데타(갑신정변) 실패를 보고 <탈아론>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나쁜 친구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쁜 친구들이란 당연 조선과 더 나아가서는 중국대륙을 뜻한다. 이후 그의 논문은 일본 정부도 곤혹스러워 할 정도의 찬신민지론으로 치닿는다. 그는 1885년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사관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한다.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한다>, <조선의 형편을 다시 걱정할 필요가 있나?>,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마지막 두 개의 논문은 일본 정부에서도 판매 금지를 시킬 정도로 그들의 식민지화 정책에 도움이 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내부의 논란을 막아보겠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일본 사회 좌파 지식인의 활동은 별도로 다음 번에). 작년에 바뀐 신화폐에서도 그가 여전히 1만엔 권 주인공이라는 것은 현재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라는 점을 다시금 시사한다.

참고>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이토 나리히코, 행복한책읽기)

 

3. 다이쇼 문화는 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였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이쇼 문화는 메이지 문화에 비해 소비 중심적이고 사생활 중심적이며 향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측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도시중간층이 주도적인 개혁 주체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그 문화를 주도했다고 본다. 청일, 러일전쟁 이후 전쟁이 싫어진 대중들의 요구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집중화를 낳았다. 이들은 문화생활을 중시하고 서양식으로 지어진 문화주택에 거주하면서 대중적, 소비적인 문화에 흡수(소비자) 내지는 소비의 재창조자(생산자)가 된다.

 

관동대지진이 문화에 미친 영향

그러나 이러한 도시문화는 동경의 반 이상을 폐허로 만든 1923년 관동대지진(대진재)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다. 이러한 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특징 중 하나가 도로공사로 도시는 새롭게 구획되고 정리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도시로 나고야를 꼽는다. 도시의 발달에서 중요한 것은 동경과 요코하마, 시부야와 신주쿠를 잇는 도시근교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간 사철이 급속히 놓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철의 정거장에는 어김없이 대형 백화점이 자리를 잡게 된다.

 

백화점 문화의 발달

사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백화점은 당시 사회의 유행을 리드하고 대중의 생활을 규격화, 획일화하는 데 기여한다. 백화점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향해 뻗어나가던 근대 일본 문화를 새로운 모델에 대한 동경 또는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한 기호품으로 채워 넣는다. 일본의 백화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전통백화점으로 그들의 전통문화(혼수품으로 평생 입을 기모노 옷감을 해가지고 간다든지 하는)에 기반한 포목상을 중심으로 한 백화점. 둘째, 사철을 중심으로 한 쇼윈도에 진열된 물픔을 구입하는 백화점으로 나뉜다. 전통백화점은 현재에도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층의 대표적인 소비통로가 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

또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는 도시의 새로운 복구와 더불어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해 지진 당시 라디오가 충분히 보급되었더라면 지진의 피해뿐 아니라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비롯한 대내 외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반 대중의 마녀사냥과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각성이 그것이다. 때문에 관동대지진 이후 철도의 보급과 함께 라디오를 비롯한 출판문화, 인쇄문화가 꽃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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