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8

 

1. 영화를 통해 본 일본 대중 문화


현대 산업사회를 바꾼 발명품으로 꼽히는 키네토스코프는 1893년 커다란 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사진을 일인 가시용으로 볼 수 있었던 기계이다. 이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스크린에 영사된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는 프로젝션 시스템의 개발로 영화의 탄생과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 이후 영국, 독일 등 유럽 선진국가에서는 영화기구의 독자적인 발명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기계를 만들기보다는 외국의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적으로 영화의 기구를 수입하였으는 이는 1896년의 일이다. 그들이 신문에 최초로 사진을 실은 것이 1894년이니 서구의 가장 첨단의 문물을 가장 일찍 수입한 나라가 일본인 셈이다.


앞서 살펴본 만화/애니메이션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영상산업이 꽃 피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선진문물의 적극적이고 발빠른 수용도 있지만, 가부키로 대표되는 그들의 공연문화가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상 기구의 도입으로 탄력을 받은 일본은 이후 빠테사와 영화수입계약을 맺음으로써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교역의 터전을 마련한다. 이어 1903년 일본 최초의 극장인 아사쿠사 전기관을 개관함으로써 간다, 오사카에서도 속속 극장이 문을 열게 된다. 이때 영화의 해설을 돕는 '변사'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초반 발성영화가 도래할 때까지 유지된다. 1910년에는 신파극과 가부키극을 제작하는 자체 영화사가 만들어지고 1912년 드디어 도쿄 촬영소가 생겨나면서 메이저 회사가 생기고 배우가 양성되는가 하면 서양 작품을 번안하여 새로운 영화로 상영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이후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며 극장도 많아지고 다양한 작품이 실험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잠시 주춤했던 영화산업은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도시의 계획과 새로운 질서에 힘입어 20년대 후반에는 일반 관객이 5배 이상 증가하는 이변을 낳기도 한다.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계급문학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서도 리얼리즘 영화가 양산되도 프르키노 단체가 등장한다.


1927년 세계 최초의 사운드 영화인 <재즈싱어>의 등장으로 일본도 1930년에 들어서는 토키영화체제로 바뀌게 된다. 배우의 연기나 목소리, 배경음악 등이 중요해짐에 따라 영화제작이 확대되고 대형 영화사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경연극 배우가 연기하던 자리를 메꿀 전문적인 배우의 등장이 시급해졌다. 그러면서 멜로영화나 소시민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소개되었고 영화는 점점 현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치르며 일본 사회는 천황제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전시체제로 바뀌게 된다. 다이쇼 시대에 꽃 피었던 각종 문화산업은 쇼와기에 들어서는 모든 것이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퇴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전쟁영화인 <5인의 척후병>, <흙과 병정> 등을 보면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사쿠라 동기생들이 '사쿠라가 지면 만나자'고 외치는 그들만의 죽음의 미학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영웅이나 검객이 등장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전후 영화는 미군정하에서 전쟁, 군국주의, 원폭, 반민주주의, 칼 등이 등장하는 영화는 검열의 대상이 된다. 검열을 피해가기 위한 예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의 첫 영화 <스카타 산시로>의 배경을 메이지시대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천황의 패전 발표와 함께 일본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는 문화 예술 사회 전반에 혼란과 갈등을 남겼지만 미군에 의해 흘러들어온 락이나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 등은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문화양식으로 표출된다. 50년대는 구로자와 아키라, 오즈 야스시로. 미조구치 겐지로 대표되는 세계 영화사에 있어 길이 남을 세 명의 거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2. 전후 일본 영화의 특징


전후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1949년 사실상 미군의 검열제가 폐지되고 이후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원폭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소개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50년대는 전국민이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 이시하라 유지로가 등장하였고, 60년대는 단카이세대의 주도하에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순수한 극영화(ATG)와 영화사인 쇼치쿠를 중심으로 한 누벨바그가 새로운 흐름으로 실험되었다. TV의 보급으로 영화만의 특징이 더욱 고민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영화(협객영화, 로망 포르노, 샐러리맨 테마의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70년대에는 독립영화는 많아졌지만 오일쇼크로 인해 상대적으로 영화는 침체기였으며 일본판 007이라 불리는 <남자는 괴로워>,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낚시꾼 이야기> 나 추리영화가 제작되었다. 80년대는 버블경제가 드러나면서 영화시장은 더욱 축소된다.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 또한 나름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장례식>이나 <병원> , <남극 이야기> 류의 시리즈물과 멜러, 코믹물이 생산된다. 90년대는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영화(다케시 류의)와 미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같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영화, 사회성을 테마로 한 영화 등이 다채롭게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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