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5
전후 일본의 청년문화의 변화
1. 일본은 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자행하였는가?
현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패전'이다. 현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청년문화 또한 이러한 패전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나, 태평양전쟁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점이 일본의 청년문화의 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은 제공권 장악이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투기 생산력이 전쟁의 키 포인트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전쟁 초기 군의 입장을 들어보자.
"일본이 연간 2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쟁 참모의 보고에 대해 일본군 수뇌부는 "일본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이 무리를 해서라도 2만 대 생산능력을 갖춘다면 미국은 10만 대 생산체제를 만들 것이다"라고 일축한다.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에 질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도대체 왜? 이것은 앞서 말한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부국을 꿈꾸는 그들의 식민사관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장비와 화력면의 열세를 병사 개개인의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2000발의 실탄을 장전한 미전투기에 맞선 일본의 전투기에는 고작 70발이 장전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그들이 광기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기도 한다. 지는 전쟁에서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신일도 하사불성' '소수 정예주의' '엘리트주의'가 강조된 정신무장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무장을 가장 확실히 세뇌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지하드, 즉 성전聖戰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신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게 된다.
2. 패전과 천황의 항복 선언이 일본 청년문화에 미친 영향
태양족
항복 선언과 더불어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신 10대였던 청년들의 반응은 대체로 불쾌함이었다. 그들의 불쾌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원폭피해 소년이 주인공인 당시 유행하던 소년만화 <맨발의 겐>이 있다. 성인들의 다양한 반응과는 다르게 청년들은 '귀축미영 타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선생들이 하루아침에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가르치겠다고 돌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죽창을 들고 미군과 싸우겠다'던 어른들 또한 금새 미군을 환호하며 반기는 자세로 돌아섰다. 이전의 가치관과 교육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상황에서 그들은 반항과 일탈을 꿈꾼다. 이는 폭주하는 젊은이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대히트를 기록한 <태양의 계절>을 통해 '태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단카이세대-원시신인류-신인류
넓은 의미에서 전후 베이비 붐에 의해 1945년에서 1954년 사이에 태어난 약 2천만 명을 지칭하는 단카이세대는 어른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간다. 이 단카이세대는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보다는 농촌 지역에서 더 많은 출생률을 보이는데 이후 이들이 성장하여 1970년대에는 도시로 상경하게 되면서 도시는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젊은이 문화(소비, 저항, 감성)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화를 위한 학원투쟁과 사회적 이슈였던 안보투쟁은 원시신인류라는 새로운 물결을 형성하기도 한다. 단카이세대의 상경에는 도시 제조업 회사의 적극적인 알선도 한몫하게 되는데 회사는 한 지역의 청년들을 집단 취직시키고 상경 열차편을 마련해주어 같은 날, 같은 열차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한 회사에서 평생 일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강조, 조장할 수 있는 새로운 풍토를 만들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연대와 동질성을 강조한 단카이세대의 뒤를 이어 1970년대 태어난 이들은 이후 세대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신인류라는 조어를 탄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