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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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마타 마호카루라는 작가의 책이 올해에만 3권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라는 다소 밋밋한 문장으로 서평을 시작하려고 한다.  

 보통은 사진도 좀 특이한 걸 넣고, 책에서 인상깊었던 말 같은 것도 좀 초반부에 배치해서 나도 멋부리고 싶은 맘이 들지만 이번엔 아니다. 자고 일어나서도 조금 찝찝한 것이, 빨리 이 끈적끈적한 것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주 이례적으로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경쟁하듯이 한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서울문화사에서 <유리고코로>, 블루 엘리펀트에서 이 책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 이미 나왔고 하반기쯤에는 북홀릭에서 <그녀가 그 이름을 모르는 새들>이 발매예정이다. 작년 일본에서 누마타 마호카루 붐이 일어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작가라고 하는데 이 작가의 이력이 아주 가관이다.

 

 

 나이 56세에 발표한 첫 소설 (9월이~)이 제 5회 호러 서스펜스 대상을 받으면서 데뷔, 그 전에는 주부, 회사경영, 승려 등을 했다고 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누마타 마호카루. 나이 어린 유망주들에게 주는 보너스 점수 같은 것도 눌러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필력으로 아야츠지 유키토와 기리오 나쓰오 등의 극찬을 받으며 데뷔한다. 처음에는 이 책이 묻히는 분위기였지만 작년 <유리고코로>가 히트를 치면서 재조명되며 인기작가가 되었다고.

 

 

 사실 그 어떤 말보다, 기리오 나쓰오의 심사평이 이 책의 정체를  '경고' 하는 정확한 표현일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라는 것을 주저함 없이 사뿐이 뛰어넘는다."

 

 정말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했어야 되나 싶을 정도로 지독한 스토리. 기리노 나쓰오의 저 심사평은 그냥 넘겨 들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집단 강간의 결과로 정신병을 앓는 마성의 여인 아사미에게 남편을 빼앗긴 주인공 사치코에게 연이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상실이 일어난다. 쓰레기 봉투를 버리러 간 외아들이 실종되고, 다음 날 자신의 젊은 애인이 지하철에 치여 죽게된다. 아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흔적을 더듬는 사치코는 그녀를 둘러싼 세계가 이미 변질되어 버렸음을 깨닫지만 한번 열려버린 문틈 사이로 부패한 공기는 이미 스며들고 있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 알고 싶지 않는 진실을 마주해 나가면서 사치코의 정신은 믹서기에 갈아버린 돼지고기처럼, 밟힌 생선의 창자처럼 흐물흐물 하게 흘러내려 버린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그 추악한 냄새...

 

 

 

 이야기를 읽으면서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 '눈의 여왕' 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대충적인 스토리는 쉽게 파악이 가능할 수 있었지만 김이 빠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작가의 글솜씨가 말 그대로 '농밀'해서인지 서스펜스가 고조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책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책의 결말부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동화라는 점, 반영된 현실은 그렇지 않을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끝은 그야말로 잔혹하고 읽는 사람의 정신을 붕괴시켜 버린다. 

 

 너만 왠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얽힌 사랑문제 따위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철저하게 남성을 가학적으로 여성을 피학적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이다. 실제 세상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크고 작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점차 무감각해져버리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일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또 남성에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 보다 같은 여성을 향한 질투와 시기, 혹은 그 모든 것조차 무기력하게 속으로 삭혀버리는 여성들의 태도는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내게는 힘의 역학관계가 아닌 동물의 세계, 수컷들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저 주변의 평화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암컷의 이야기로 보였으니까.

 

 말이 조금 심했나 싶지만 분명히 이 책의 결말부는 그런 의도로 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내내 휘청거리면서 아들의 흔적을 더듬던 주인공에게 밝혀지는 진실이나 등장인물의 태도 (핫토리는 이야기 밖의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테니)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 냉혹하다. 아니, 작가의 눈길 자체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풀 길이 없는 사치코의 악의, 분노조차도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추악한 존재에게 향해버리지 않았던가.

 

 미치오 슈스케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 끈적끈적한 글과 뇌내에 남아 떠들어대는 듣기 싫은 목소리에 진저리가 났었는데, 이 책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뒤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어떤 독서는 해롭다고 분류하는데,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은 분명 해롭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에서, 그 강렬함을 그리워할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 날을 부끄러워 할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 

 

 별 다섯에 별 넷. 아, 작품을 읽는 내내, 아사미 역할로는 김민희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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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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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런 코벤의 신작 <용서할 수 없는> (Caught, 2010)



 

 이번에도 평범한 가정에서 누군가 실종되고, 각지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고, 거기엔 뭔가 악의로 가득차 있고, 알고보면 과거에 누군가 저지른 실수가 있고, 반전이 두번 세번 나오고! 그렇다. 전형적인 할런 코벤식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군더더기 없는 짜임새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해주는 이야기 소재들, 허튼 행동을 하지 않는 주인공과 매력적인 주변 캐릭터들. 정말 스탠드 얼론으로 끝내기에 너무나도 아까운 완성도라고 생각한다.

 

 정작 재미면에서 스탠드 얼론보다 한 수 위로 친다는 시리즈물은 접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비채에서 꾸준히 소개해 주는 스탠드 얼론만 간간히 읽었었다. <단 한번의 시선>을 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결백><아들의 방>에서도 항상 유사한 패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느낌을 받아서 어느샌가 할런 코벤의 작품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할런 코벤의 이야기들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작가들이 자신의 아바타로 마초적인 사립탐정이나 거친 형사 등을 선택해서 시스템 안팎을 마음껏 누비는 이야기를 써낸다면, 할런 코벤은 언제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우리에게도 일어날 법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은 인터넷 시대에 익명으로 행해지는 폭로, 특히 진위여부가 판별되지 않은 폭력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여론을 형성하고, 황색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개인의 신용이 몰락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타블로 사건을 비롯, XX녀  등의 마녀사냥과도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대중들에게 그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났는지 또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이미 실추된 명예는 회복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억눌린 개인의 이런저런 감정들은 희생양이 생기면 그 틈으로 모두 집중되고 더 큰 균열을 만들고 이윽고 터져버린다. 그리고 또 더 큰 폭발을 위해 다른 곳을 향해 흐를 뿐이다. 거대한 메뚜기 떼의 모습으로...어쩌면, 현대 사회의 재앙일지도 모른다.

 

 아동성애자로 낙인 찍혀 인생이 무너진 댄 머서와, 그를 몰락시킨 장본인인 방송인 웬디, 갑자기 사라져버린 소녀 헤일리의 가족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묘한 긴장감을 주고 받으면서 엇갈려 간다. 십대를 기르는 부모들의 스트레스 가득한 삶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들의 자녀들, 일류의 삶에서 점점 소외되어 가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과거들이 이 이야기가 보이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한다. 매력적인 언론인 웬디의 끈기와 책임감 넘치는 추적, 집중력이 독자를 압도해나가며, 수많은 반전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지탱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준다.

 

 무리한 반전이 아닌, 관련 인물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제시해 나갔다는 점 또한 이 책의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에게도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구축한 이야기들에도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반전 하나하나가 즐거웠다.

 

 할런 코벤은 미국 사회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해치면서도 그것을 소설에 쓰기 위해 과장하지도 위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섣불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면서도 그것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어찌되었던 책을 읽는 독자는 저마다의 느낌과 결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색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할런 코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싶은 걸 참는 순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원제인 Caught 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어판 제목인 <용서할 수 없는>은 참 괜찮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에게 '용서'라는 것의 의미를 묻는 이 책의 질문과도 맞아 떨어지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이 책이 내어놓는 대답에 대한 또 하나의 반전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꽤 재밌다. 과연 용서 받지 못할 자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에서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희생당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끼리의 희생과 구원을 세상은 축하해 줄것인가 비웃을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할 것인가.

 

 이 어렵고 민감한 문제에 관해서도, 할런 코벤은 나름의 멋진 대답을 준비해 놓았다. 처음부터 흡입력과 속도감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훌륭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내 나름대로 할런 코벤에게 주는 첫 별 다섯의 책이라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확실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최신작을 읽는 일은 만족을 넘어선 짜릿함마저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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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 나이트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 1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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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 미스터리는 꽤 이것저것 찾아 읽는 편인데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작품은 고작 출간 몇달 전에야 알게 되었던 작품이다. 기시 유스케의 <다크 존>이 신생 출판사인 '씨엘북스'에서 출간된다는 소문을 듣고 출판사 카페에 찾아가 본 게 계기였다.

 

 

 일본 누계 160만부, 후지 TV에 의해 드라마화가 되어 2012 년 1분기 일본 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성했을 정도로 화려한 전력을 갖고 있는 책이었다. 등장인물들도 눈에 익은 배우들. 여주인공인 히메카와 레이코 역에 다케우치 유코, 라이벌(?)역인 카쓰마타 켄사쿠 역에 타케야 테츠야... 책을 읽고 등장인물을 들여다 본 순간 이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이 두 배우로 치환이 되어 버릴 정도였다. 다른 배우들은 잘 모르는 배우들에다가 아직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인지 생각할만 한 여유는 없었고.

 

 <스트로베리 나이트>는 경찰소설이다. 여주인공 히메카와 레이코의 카리스마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사 1과의 형사들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균형적인 활약을 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형사들 이미지와도 다르고 유명한 미드 CSI 류의 수사팀과도 약간 다른 전형적인 일본 형사들의 이미지를 잘 살린 것 같다. 다른 작품들에서 종종 보이는 커리어와 논커리어 간의 갈등보다는 고위급 여자 간부의 직장내 치열한 투쟁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승승장구하는 히메카와 레이코에게 대부분의 경찰들은 우호적인 자세를 취한다. 단 한명 카쓰마타 켄사쿠를 제외하고 말이다. 공안 출신의 구시대 형사로 그려지는 속물 캐릭터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형사들이라기 보다는 기업 사원의 이미지를 풍기는 집단에 이질적인 존재다. 하지만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히메카와의 팀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감과 지금까지 쌓아온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호러 서스펜스 대상 출신답게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잔혹한 묘사는 읽는 이의 목 뒤를 훑으며 소름돋게 만든다. 단서를 모아 차근차근 사건에 다가서는 형사들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살인쇼 중계는 예상치를 훌쩍 뛰어 넘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우타노 쇼고의 <밀실 살인게임>에서 살의보다 더 우선하는 유희적 감정으로서의 살인에서 엄청난 충격을 경험했는데, 이 작품의 살인쇼 또한 만만치 않은 장면이다.

 

 하지만 자극적인 사건과 흥미로운 인물소개들로 초중반을 사로잡았던 것과 별개로 후반부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행히도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카쓰마타의 행동들이 긴장감을 유지해주긴 하지만, 사건 자체의 해결 부분에서는 실망하는 독자와 만족스러운 독자의 의견이 꽤 나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트로베리 나이트>는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라는 인기 시리즈의 첫번째 타이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각 등장인물이 갖는 성격이나 스타일을 확립하는데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면서도 작품 자체의 재미를 떨어뜨리지 않는 스토리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경찰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범인보다도 형사들 각자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리즈의 형사들은 히메카와 레이코의 카리스마 아래 잘 뭉치고 또는 대항하는 꽤 괜찮은 캐릭터들이다.

 

 

 빈번히 등장하는 한문들과 조금 어색한 사투리 (실제로 쓰이는 사투리와 소설인물 대사로 쓸법한 사투리는 엄연한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가 거슬리지만 후속편들에서는 많이 고쳐질 것으로 믿는다.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경우는 SP 드라마 에피소드였다고 하니 한번 봐야겠다. 물론 후속편에 영향을 줄 본 드라마는 나중까지 남겨둬야 겠지만 말이다. 별 다섯에 별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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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유키 쇼지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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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얼마전에 구했던 팀 와이너의 <잿더미의 역사>에서 CIA와 베트남에 관한 부분을 펼쳐 읽었다.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통해 동남아의 공산주의화를 막아보겠다던 미국. 그들의 군사적, 정치적 노력은 때로는 부패정권의 부정축재로, 때로는 베트콩들에게 역이용 당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유키 소지의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는 1963년 응오 딘 디엠 대통령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전, 사회적 긴장감이 팽팽하던 시절의 베트남을 무대로 하고 있다. 작품의 집필시기가 1962년으로, 당시의 베트남 정세를 어쩌면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외부의 일본 작가가 당시 베트남의 혼란기의 시작을 꽤 논리적 비약없이 그려나가는 모습이, 후에 일어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과 실패로 돌아갈 전쟁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무섭다. 모두가 냉정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광기에 가려, 미국은 자신들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편견과 오만함으로 대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말 같아서다.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는 베트남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이외에도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인임을 버린 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걱정어린 눈길 또한 담고 있다. 작가의 관점이 패전국인 일본에 대한 변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서 하나의 인생이 망가져 버린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키 소지가 어떤 작가인지는 그 행보를 출판사 측에서 나름대로 검토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적인 관점이 문제가 있었다면 한국에서 만나볼 수는 없었을테니까.

 

  이렇듯 흥미로운 국제정세와 일본인 패잔병들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잘 버무리고, '고메스'라는 이름이 중심이 된 미스터리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 또한 긴장감이 장점인 소설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본인 주인공이 베트남에 가서 직면한 진실이란 것의 임팩트가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것과 결국 두 이야기를 접목은 시켰지만 주인공은 그 이야기로부터 튕겨져 나가는 듯한 이미지를 준다는 점이다. 오래된 작품이고, 베트남 내전의 틈바구니에서 일본국적의 주인공의 한계가 명확할 수 밖에 없을테지만... 조금은 아쉽다. 스파이 소설에 바라는 흥미진진한 활약이 생각보다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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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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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날 일을 당신이 몰랐으면 좋겠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손으로 쓴 편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 거리와 시간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들이 있음에도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익숙하지 않은, 번거롭기 까지한 그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뭐가 있을까.

 

 편지는 자신의 말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전 갖는 여유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좀더 다듬을 수 있고 표현을 신중하게 고를 수 있다. 또 자신이 써내려간 편지를 스스로 읽어나감으로서 스스로의 생각을 잘 정리해 나갈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쓴 것이 상대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라 하더라도, 그 편지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은 과거의 민감한 문제에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으로 '편지'를 택한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주인공들의 주고받는 편지는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거기에 숨어있는 어떤 불편하고도 불안한 느낌의 진실이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젊은 날의 엇갈린 사랑과 뒤틀려버린 우정, 물에 빠진 남편을 구해내지 못한 선생님과 그녀의 제자들, 과거의 아픔을 덮고 살아가는 젊은 부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 되서야 과거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탓에 차라리 끄집어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가 들면서도 조심스럽게 시작한 편지는 멈출 수가 없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그동안의 작품들은 모두 그녀의 출세작과 비교를 당해야 했다. '왕복서간'은 '고백'과 흡사한 형식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 특유의 심리적 압박과 책에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 전개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 스타일로 돌아가서야 제대로 된 재미를 주는 건가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둘은 그저 비슷한 느낌일 뿐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왕복서간>은 끄집어내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를 시작해 독자에게 그저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일도 있는 거지 하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조금씩 격해지는 편지와 불안정하게 틀어지는 관계를 보는 일은 그만큼 조마조마하다. 망각과 오해로라도 위태위태하게 버티며 세워 놓은 서로의 인생이 섣불리 다가서는 어떤 이의 손길에 의해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다. 분명히 이 책이 주는 분위기는 어둡다. 과거 '고백'에서 스스로 잘 쌓아놓은 이야기를 매번 잔인하게 부서버리면서 독자에게 충격을 주었던 미나토 가나에 이기에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 <왕복서간>은 '고백'과는 약간 다른 길을 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조금 의도치 않은 재미를 얻게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책들이 '고백'과 비교를 당하면서 점수를 잃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 책은 '고백' 과 닮았지만 다른 덕분에 독특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매번 미나토 가나에의 책을 읽기 전에 '고백'만큼의 재미를 원하는 마음, 혹은 '고백'을 잊어야 한다는 강박과 다투어야 하는 독자에게 이 책 '왕복서간'은 어떤 치유 작용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포기가 아닌 색다른 기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꽤 오랜시간을 기다린 후에 도착한 미나토 가나에의 조심스러운 편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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