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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누마타 마호카루라는 작가의 책이 올해에만 3권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라는 다소 밋밋한 문장으로 서평을 시작하려고 한다.
보통은 사진도 좀 특이한 걸 넣고, 책에서 인상깊었던 말 같은 것도 좀 초반부에 배치해서 나도 멋부리고 싶은 맘이 들지만 이번엔 아니다. 자고 일어나서도 조금 찝찝한 것이, 빨리 이 끈적끈적한 것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주 이례적으로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경쟁하듯이 한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서울문화사에서 <유리고코로>, 블루 엘리펀트에서 이 책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 이미 나왔고 하반기쯤에는 북홀릭에서 <그녀가 그 이름을 모르는 새들>이 발매예정이다. 작년 일본에서 누마타 마호카루 붐이 일어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작가라고 하는데 이 작가의 이력이 아주 가관이다.

나이 56세에 발표한 첫 소설 (9월이~)이 제 5회 호러 서스펜스 대상을 받으면서 데뷔, 그 전에는 주부, 회사경영, 승려 등을 했다고 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누마타 마호카루. 나이 어린 유망주들에게 주는 보너스 점수 같은 것도 눌러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필력으로 아야츠지 유키토와 기리오 나쓰오 등의 극찬을 받으며 데뷔한다. 처음에는 이 책이 묻히는 분위기였지만 작년 <유리고코로>가 히트를 치면서 재조명되며 인기작가가 되었다고.
사실 그 어떤 말보다, 기리오 나쓰오의 심사평이 이 책의 정체를 '경고' 하는 정확한 표현일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라는 것을 주저함 없이 사뿐이 뛰어넘는다."
정말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했어야 되나 싶을 정도로 지독한 스토리. 기리노 나쓰오의 저 심사평은 그냥 넘겨 들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집단 강간의 결과로 정신병을 앓는 마성의 여인 아사미에게 남편을 빼앗긴 주인공 사치코에게 연이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상실이 일어난다. 쓰레기 봉투를 버리러 간 외아들이 실종되고, 다음 날 자신의 젊은 애인이 지하철에 치여 죽게된다. 아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흔적을 더듬는 사치코는 그녀를 둘러싼 세계가 이미 변질되어 버렸음을 깨닫지만 한번 열려버린 문틈 사이로 부패한 공기는 이미 스며들고 있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 알고 싶지 않는 진실을 마주해 나가면서 사치코의 정신은 믹서기에 갈아버린 돼지고기처럼, 밟힌 생선의 창자처럼 흐물흐물 하게 흘러내려 버린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그 추악한 냄새...
이야기를 읽으면서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 '눈의 여왕' 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대충적인 스토리는 쉽게 파악이 가능할 수 있었지만 김이 빠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작가의 글솜씨가 말 그대로 '농밀'해서인지 서스펜스가 고조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책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책의 결말부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동화라는 점, 반영된 현실은 그렇지 않을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끝은 그야말로 잔혹하고 읽는 사람의 정신을 붕괴시켜 버린다.
너만 왠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얽힌 사랑문제 따위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철저하게 남성을 가학적으로 여성을 피학적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이다. 실제 세상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크고 작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점차 무감각해져버리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일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또 남성에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 보다 같은 여성을 향한 질투와 시기, 혹은 그 모든 것조차 무기력하게 속으로 삭혀버리는 여성들의 태도는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내게는 힘의 역학관계가 아닌 동물의 세계, 수컷들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저 주변의 평화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암컷의 이야기로 보였으니까.
말이 조금 심했나 싶지만 분명히 이 책의 결말부는 그런 의도로 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내내 휘청거리면서 아들의 흔적을 더듬던 주인공에게 밝혀지는 진실이나 등장인물의 태도 (핫토리는 이야기 밖의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테니)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 냉혹하다. 아니, 작가의 눈길 자체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풀 길이 없는 사치코의 악의, 분노조차도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추악한 존재에게 향해버리지 않았던가.
미치오 슈스케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 끈적끈적한 글과 뇌내에 남아 떠들어대는 듣기 싫은 목소리에 진저리가 났었는데, 이 책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뒤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어떤 독서는 해롭다고 분류하는데,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은 분명 해롭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에서, 그 강렬함을 그리워할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 날을 부끄러워 할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
별 다섯에 별 넷. 아, 작품을 읽는 내내, 아사미 역할로는 김민희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