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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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대표하는 남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서울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의 화려한 반역아라고 불린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님을 대표하는 저작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을 때도 마음속에는 중세 천 년의 시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황제 프리드리히 2>는 중세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세를 대표하는 성격을 교황의 권한과 왕권과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관계를 제대로 그리고 있다.

 

최고의 역사 소설 중 한편으로 꼽히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흡입력 있게 풀어놓는 나나미 작가 특기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마치 프리드리히 2세의 곁에서 그의 출생에서 역경을 딛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마침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영웅소설이자, 한 사람의 성장소설이다.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던 중세 시대,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학자를 벗으로 삼고 매에 관한 과학적인 책을 직접 저술했을 뿐 아니라, 법치국가와 정교분리를 목표로 세계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문서를 발표했다.

 

개인적으로 9차례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는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성공한 건 1차 십자군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하지 않고도 성지 탈환에 성공한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라는 어둠의 시절 한 줄기 빛과 같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를 이해하는 좋은 소설임이 틀림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1194년 이탈리아 북부 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였고, 어머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였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 즉위식에 아내보다 먼저 출발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9년이 지나 아이를 가졌다. 산모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남편보다 뒤늦게 출발했다. 가능도중 예나에서 산기를 느껴 광장에 대형 천막을 펴고 출산을 준비했다.

 

프리드리히는 예시 마을의 대표 입회하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가 세례식에 참석한지 1년 후,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은 지 3년째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어머니 콘스탄차 역시 프리드리히가 네 살이 되던 해 갑자기 돌아가신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1198년 로마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접근한다. 교항이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리드리히의 왕위를 인정해주면 혈통상 프리드리히에게 권리가 있는 독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콘스탄차가 아들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리 로마 교황의 영유지임을 인정하고, 프리드리히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 비용을 내는 조건으로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그만큼 프리드리히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법이라는 질서가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중세에서 교황이라는 보호자는 커다란 방패막이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 교황의 주된 관심사는 제4차 십자군을 동방에 보내는 것이었다.

 

 

중세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9, 1차 십자군으로 오랫동안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돌아왔다. 이 쾌거를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88년이 흐른 1187,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의 반격이 성공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었다.

 

3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웅 리처드 사자심왕 사이에서 꽃의 제3라 불릴 정도의 화려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끝내 예루살렘 탈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로 향하지 않고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는 해산해버린다.

 

그 뒤로는 제후와 왕 모두 성지 해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도 영국 왕 존도, 유럽에서의 영토 쟁탈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프리드리히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올린 1215년까지의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국은 아들인 하인리히가 맡는다는 소식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전한지 2주 뒤 교황은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는 팔레르모 대주교 베라르도와 튜턴 기사단 단장 헤르만은 측근으로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들이 통치하던 시칠리아 왕국을 다시 공식적으로 자기 수중에 넣고 싶었다.

 

그는 교황에게 수시로 십자군 참여에 관한 말을 바꿈으로써 여든여덟 살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미치게 만든다.

 

호노리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를 십자군 원정에 보내고자 했으나, 프리드리히는 한시도 가만이지 못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집요할 정도로 추궁하는 교황의 십자군 원정 요구를 달래고 연기까지 인정받아야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없는 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로마 교황이 보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최우선 임무는 오리엔트로 원정해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한편 황제 프리드리히가 생각하는 최우선 임무는 자기 영토의 통치권 확립이었다.

 

 

122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숨을 거두었고, 다음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와 처절한 항쟁을 이어가는 그레고리우스 9세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2년 설치되는 이단 재판소의 창설자로도 유럽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아가 된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 독일 왕에 이어 황제가 되었던 것이 교황 덕분인데 이를 모르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작센공 오토에게 넘긴 것도 교황이라 생각했다.

이 사실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분노는 참을 수 없었고, 두 번째 파문을 발표한다.

 

교황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생각했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을 믿었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은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하고 종교적인 부분은 교황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정교분리세속주의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시대에서 30년이나 지난 시기에 십자군을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의 적은 더는 살라딘이 아니었다. 살라딘 이후 이슬람 세계를 이끈 것은 친동생 알 아딘인데, 이 사람의 장남이자 이집트 술탄 자리에 있는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의 적이었다.

 

알 아딘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다마스쿠스와 알 카밀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카이로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를 잘 활용해 무혈 십자군을 이끌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1229년에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진행해 예루살렘 땅을 되찾았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늦게 예루살렘 국왕으로서의 즉위식도 거행하도록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온 유럽이 칭송했다.

 

그는 나폴리에 세속 학자를 모아 로마법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하고, 아라비아 수학의 보급에 힘쓰고, 십자군 원정조차 황제나 왕, 제후라는 세속의 사람이 하는 것으로 정교 분리주의자이자 세속주의자였을지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원정을 완수하고, ‘법에 근거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훌륭한 인품을 소유했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또 강한 이미지를 풍겼으며 합리적이며 자연과학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직책과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백작의 권한과 지방 성주들의 권력을 통제했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다.

 

이 남자를 알면 세계사를 보인다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 시대, 교황에 대항해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불을 밝힌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즐거운 시간을 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황제프리드리히2세의생애 #시오노나나미 #민경욱 #서울문화사 #역사 #중세 #프리드리히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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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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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대표하는 남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서울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의 화려한 반역아라고 불린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님을 대표하는 저작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을 때도 마음속에는 중세 천 년의 시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황제 프리드리히 2>는 중세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세를 대표하는 성격을 교황의 권한과 왕권과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관계를 제대로 그리고 있다.

 

최고의 역사 소설 중 한편으로 꼽히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흡입력 있게 풀어놓는 나나미 작가 특기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마치 프리드리히 2세의 곁에서 그의 출생에서 역경을 딛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마침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영웅소설이자, 한 사람의 성장소설이다.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던 중세 시대,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학자를 벗으로 삼고 매에 관한 과학적인 책을 직접 저술했을 뿐 아니라, 법치국가와 정교분리를 목표로 세계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문서를 발표했다.

 

개인적으로 9차례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는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성공한 건 1차 십자군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하지 않고도 성지 탈환에 성공한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라는 어둠의 시절 한 줄기 빛과 같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를 이해하는 좋은 소설임이 틀림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1194년 이탈리아 북부 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였고, 어머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였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 즉위식에 아내보다 먼저 출발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9년이 지나 아이를 가졌다. 산모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남편보다 뒤늦게 출발했다. 가능도중 예나에서 산기를 느껴 광장에 대형 천막을 펴고 출산을 준비했다.

 

프리드리히는 예시 마을의 대표 입회하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가 세례식에 참석한지 1년 후,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은 지 3년째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어머니 콘스탄차 역시 프리드리히가 네 살이 되던 해 갑자기 돌아가신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1198년 로마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접근한다. 교항이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리드리히의 왕위를 인정해주면 혈통상 프리드리히에게 권리가 있는 독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콘스탄차가 아들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리 로마 교황의 영유지임을 인정하고, 프리드리히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 비용을 내는 조건으로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그만큼 프리드리히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법이라는 질서가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중세에서 교황이라는 보호자는 커다란 방패막이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 교황의 주된 관심사는 제4차 십자군을 동방에 보내는 것이었다.

 

 

중세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9, 1차 십자군으로 오랫동안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돌아왔다. 이 쾌거를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88년이 흐른 1187,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의 반격이 성공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었다.

 

3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웅 리처드 사자심왕 사이에서 꽃의 제3라 불릴 정도의 화려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끝내 예루살렘 탈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로 향하지 않고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는 해산해버린다.

 

그 뒤로는 제후와 왕 모두 성지 해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도 영국 왕 존도, 유럽에서의 영토 쟁탈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프리드리히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올린 1215년까지의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국은 아들인 하인리히가 맡는다는 소식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전한지 2주 뒤 교황은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는 팔레르모 대주교 베라르도와 튜턴 기사단 단장 헤르만은 측근으로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들이 통치하던 시칠리아 왕국을 다시 공식적으로 자기 수중에 넣고 싶었다.

 

그는 교황에게 수시로 십자군 참여에 관한 말을 바꿈으로써 여든여덟 살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미치게 만든다.

 

호노리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를 십자군 원정에 보내고자 했으나, 프리드리히는 한시도 가만이지 못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집요할 정도로 추궁하는 교황의 십자군 원정 요구를 달래고 연기까지 인정받아야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없는 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로마 교황이 보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최우선 임무는 오리엔트로 원정해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한편 황제 프리드리히가 생각하는 최우선 임무는 자기 영토의 통치권 확립이었다.

 

 

122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숨을 거두었고, 다음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와 처절한 항쟁을 이어가는 그레고리우스 9세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2년 설치되는 이단 재판소의 창설자로도 유럽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아가 된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 독일 왕에 이어 황제가 되었던 것이 교황 덕분인데 이를 모르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작센공 오토에게 넘긴 것도 교황이라 생각했다.

이 사실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분노는 참을 수 없었고, 두 번째 파문을 발표한다.

 

교황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생각했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을 믿었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은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하고 종교적인 부분은 교황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정교분리세속주의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시대에서 30년이나 지난 시기에 십자군을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의 적은 더는 살라딘이 아니었다. 살라딘 이후 이슬람 세계를 이끈 것은 친동생 알 아딘인데, 이 사람의 장남이자 이집트 술탄 자리에 있는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의 적이었다.

 

알 아딘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다마스쿠스와 알 카밀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카이로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를 잘 활용해 무혈 십자군을 이끌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1229년에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진행해 예루살렘 땅을 되찾았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늦게 예루살렘 국왕으로서의 즉위식도 거행하도록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온 유럽이 칭송했다.

 

그는 나폴리에 세속 학자를 모아 로마법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하고, 아라비아 수학의 보급에 힘쓰고, 십자군 원정조차 황제나 왕, 제후라는 세속의 사람이 하는 것으로 정교 분리주의자이자 세속주의자였을지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원정을 완수하고, ‘법에 근거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훌륭한 인품을 소유했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또 강한 이미지를 풍겼으며 합리적이며 자연과학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직책과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백작의 권한과 지방 성주들의 권력을 통제했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다.

 

이 남자를 알면 세계사를 보인다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 시대, 교황에 대항해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불을 밝힌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즐거운 시간을 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황제프리드리히2세의생애 #시오노나나미 #민경욱 #서울문화사 #역사 #중세 #프리드리히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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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소 - 채식의 불편한 진실과 육식의 재발견
다이애나 로저스.롭 울프 지음, 황선영 옮김 / 더난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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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의 불편한 진실과 육식의 재발견

 

오늘 소개할 책은 더난콘텐츠에서 출판한 다이애나 로저스, 롭 울프 지은이, 황선영 옮긴이의 <신성한 소>이다.

 

이번 주 나에게 눈에 띄는 뉴스는 호주 멜보른에 위치한 KFC 매장에 채식주의자들이 침입해 가짜 피를 뿌리고 과격한 시위를 한 동영상을 공개한 뉴스였다. 이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당신은 동물학대자라는 비난과 함께 매장에 있는 손님들에게 동물 학대 영상을 틀어 보여주었다.

 

시대적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세상이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동시에 채식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식단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동시에 인간가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육식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공인 영양사이며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는 다이애나 로저스와 전직 연구 생화학작인 롭 울프의 <신성한 소>는 육식과 채식에 관한 놀라운 진실을 전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가까운 진실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채식을 옹호하는 그룹의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두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현재 농장을 운영하며 느낀 점을 소개한다.

 

신성한 소는 특히 부당하게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생각이나 관습, 제도라는 점에서 이 책은 폭넓게 퍼져있는 채식의 우월성에 대해 도전한다.

 

이 책에는 채식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은 실리지 않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공장제 사육 방식이 아닌 목초를 먹인 동물이 포함된 식량 시스템이 환경과 건강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위한 탄탄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육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영양으로 보는 육식, 환경으로 보는 육식, 윤리로 보는 육식으로 구분하고 각 주제에 맞는 육식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실과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가 가장 궁금하게 아래 15가지 질문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을 싣고 있다. 잘못된 인식을 퍼지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까지 분석하고 있어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1)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자보다 오래 살까?

2) 고기를 먹으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까?

3) 우리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아닐까?

4) 단백질을 얼마나 먹어야 할까?

5) 100퍼센트 목초 사육 소고기가 일반 소고기보다 건강에 좋을까?

6) 고기를 먹지 않아도 식물에서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7) 실험실에서 만든 배양육과 수경 재배한 고기가 좋은 대안일까?

8) 소가 메탄가스를 너무 많이 내뿜는 것은 아닐까?

9) 소가 탄소를 어떻게 격리할까?

10) 소를 키울 때 사료가 많이 드는데 가성비가 괜찮은 것일까?

11) 소가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12) 소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닐까?

13) 식물만 먹고도 살 수 있으면 고기를 먹을 필요가 있을까?

14) 100퍼센트 목초 사육 소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이 충분할까?

15) 인간의 건강과 지구를 생각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그냥 알려 달라!

 

과거에는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던 소고기가 밥상에 올라오면서 우리는 소고기가 가지고 오는 질병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고기가 심장 질환을 유발한다는 주장 뒤에는 포화 지방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심장 질환에 잘 걸린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점은 앤셀 키스가 식이 포화 지방을 심장 질환의 원인으로 잘못 지목한 것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와 관련한 연구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증거는 고도 불포화 지방산을 많이 섭취하고 전체적인 포화 지방 섭취량은 줄이라는 심혈관 질환 지침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지 못한다.” (90)

 

채식하는 사람이 육식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까? 라는 의문에도 채식주의자는 흡연이나 음주를 자제하고 운동을 열심히 할 확률이 더 높다. 가공식품이나 설탕도 덜 먹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고기가 질병을 유발하는 유일한요인이라는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 (94)

 

 

오늘날 고기를 먹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두 저자는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재생농업에 기반을 둔 목초를 먹고 자란 소를 먹는 방식이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다. 고기를 먹지 않고도 다른 사람과 잘 지낸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처음에 등장하는 사건처럼 고기를 먹는 이웃을 백안시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연의 원리를 생각할 때 옳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물은 종속영양을 하는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자기보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먹고 살면서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다른 동물의 살을 먹는 육식동물, 식물을 먹는 초식동물, 둘 다 먹는 잡식동물이 있다. 인간은 대표적인 잡식동물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환 사이클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명은 다른 개체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진실이다.

 

육식과 채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신성한 소>를 통해 저자의 놀라운 주장을 접해보길 바랍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신성한소 #사회학 #다이애나로저스 #롭울프 #황선영 #더난콘텐츠 #채식 #육식 #리뷰어스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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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소 - 채식의 불편한 진실과 육식의 재발견
다이애나 로저스.롭 울프 지음, 황선영 옮김 / 더난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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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환경, 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육식과 채식에 관한 진실과 편견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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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의 이의신청 - 영화감독 켄 로치, 다른 미래를 꿈꾸다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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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켄 로치, 다른 미래를 꿈구다

 

오늘 소개할 책은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은 틈새의시간에서 출판판 박홍규 교수님의 <비주류의 이의신청>이다.

 

저자인 박홍규 교수님은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이자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이며 인문·예술의 부활을 꿈꾸는 르네상스맨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아내와 함께 작은농사를 짓는다. 자유·자연·자치의 삶을 실천하고자 늘 노력한다.

[ 비주류의 이의신청 책날개 중 ]

 

그는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교수님의 강의를 애청하는 독자이자 평소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 적이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감독 켄 로치의 작품 세계를 통해 감독이 가진 정신과 영향을 소개한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해 시청할 영화 목록으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챙겨보았다.

 

황금종려상을 2회 이상 받은 감독은 지금까지 7명이 있다. 그중 최근까지 활동한 감독은 다르덴 형제, 미카엘 하네케, 켄 로치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들 감독의 영화를 보며 특히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2019<미안해요, 리키>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주인공과 실업과 자영업을 하기 위해 택배 차량을 구입하고 가족 모두가 그를 도우려 했던 일이, 규정에 어긋나 오히려 일자리를 뺏기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이 쫓기는 주인공은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어 우유병에 소변을 처리해야 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지만 삶은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경험한 하루하루에 너무나 많은 공감과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는데 저자는 켄 로치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켄 로치를 찾아서, 켄 로치를 따라서

영화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제게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사십여 년간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저는 언제나 그의 영화를 수업의 기본 교재이자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꼭 필요한 사고와 실천

의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가령 2019년의 미안해요, 리키>는 노동법, 2016년의 <,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회보장법의 교과서였어요. 아니,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이 그렇습니다. 그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는 중요한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17)

 

 

1942년 영국 노동부 차관 윌리엄 베버리지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고, 1970년대 노동조합의 투쟁에 따른 임금 상승, 국영 기업의 방만한 경영은 영국을 소위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악순환에 빠지게 했다.

 

1979년 대처 총리의 취임 후 정부와 노조의 강경 대응은 걷잡을 수 없었고, 1985년 석탄산업 노조는 조건 없이 항복했다. 이후 대처 정부는 가스, 전기, 철도, 수자원 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실업자 수는 300만 명에 이르게 되어 복지 천국에서 제조업이 쇠락한 국가로 전락했다.

 

켄 로치 감독은 계급이 분명한 영국에서 노동자의 아들로서는 보기드물게 법학부에 진학했다. 졸업 후 연극을 하다 1963년에 BBC에 입사해 정치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켄은 무조건 노동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노동당의 우경화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는 더욱 싫어했다. 그는 대처 총리 시절 보수당 집권하에서 여러 번 검열을 당하고 몇 번이나 상영 금지를 당했다.

 

스페인 전쟁을 다룬 1995년 작 <랜드 앤 프리덤>의 상영 당시 제목은 <대지와 자유>였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니카라과 민중투쟁을 소재로 한 <칼라 송>, 1920년대의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인상적이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팔백 년 동안 침략하고 지배했다.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침략은 아일랜드가 노르만 왕조의 직할령이 된 116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완전 정복은 1542년 헨리 8세에 의해 마무리된다. 그 뒤 1641년에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자 신교도 왕당파와 함께 국왕을 지지했다. 이에 올리버 크롬웰은 항복을 거부하는 지역을 정복하고 수비대와 시민 모두를 학살했으며, 1650년 여름까지 대다수 지역을 정복하면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이때 아일랜드인의 약 20%인 이삼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652년 아일랜드인에게 잉글랜드 이주민 삼천 명이 학살당하자 크롬웰은 탄압을 시작한다. 아일랜드 본토의 켈트족과 대립시키겠다는 흑심을 품고 청교도 스코틀랜드계 켈트족을 아일랜드 북쪽인 얼스터 지방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현재까지 계속되는 아일랜드 분단의 시작이었다. 학창 시절 지금의 IS처럼 IRA는 테러를 대표하는 단체였고,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한 가정에 미치는 영화가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이었다.

 

 

<,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목수인 블레이크가 실직해서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이야기는 사회 체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을 경우,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거짓 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저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류로 받아들이는 한국 영화시장에서 유럽 영화는 비주류에 인정하고 특히 영국 영화 시스템을 소개하는 부분은 기억할 만하다.

 

문학을 기반으로 한 영국 영화는 신분 계층이 높은 사람이 주로 연기를 하고 좋은 배역을 맡는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영국에서는 암암리에 뿌리 깊은 사회 계층에 따른 역할이 배우나 말투, 행동, 생활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영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는 켄 로치 감독은 그런데도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에게 주목한다.

 

영화 촬영 현장 스태프도 힘들게 일을 한다. 우리나라의 봉준호 감독은 표준 근로계약을 준수하며 영화 촬영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유명한 이유는 이런 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밤샘 촬영이 일반적이고 근무 외 작업이 자주 일어나는 영화 현장에서 근무 시간과 표준 계약을 지키는 것이 특별해 보이는 것이다.

 

켄 로치 감독도 철저히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한두 명의 스타에게 엄청난 출연료를 지급하면서 나머지 수많은 스태프로부터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마적인 시스템은 없다고 한다.

 

켄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하층민들(1991)>은 각지에서 런던의 공사판으로 모여든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대처리즘 하의 비전 없는 삶을 다룬다.

 

저자는 켄 로치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 많은 작품을 이 책을 통해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본 3편의 영화 모두 인생 영화에 속하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켄 로치 감독의 다른 영화를 통해 당시 영국의 모습을 되새기고 싶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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