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음악가들
장옥님 지음 / 형설미래교육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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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어난 클래식 명곡들

 

오늘 소개할 책은 형설미래교육원에서 출판한 장옥님 작가님의 <위기의 음악가들>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KBS 클래식FM을 청취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장옥님 작가님이 클래식 FM의 프로듀서로 재직했다고 하니, 괜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음악을 들으면서 막연하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작곡가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과 곡을 만들 때 상황이나 창작 의도를 알면 음악을 좀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작가님은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듯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14명의 대표곡과 그들의 인생사, 시대적 배경을 치밀하게 설명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14명의 작곡가는 다음과 같다.

 

헨델, 바로크 시대의 글로벌 스타

바흐, 음악의 바다

모차르트, 천재 중의 천재

베토벤, 음악의 성인聖人과 거룩한 괴짜 사이

슈베르트, 영원한 겨울 나그네

베를리오즈, 환상 속의 그대

쇼팽, 피아노의 시인

슈만, 로맨티시즘의 꽃

베르디, 희망은 금빛 날개를 타고

바그너, 시대의 풍운아

차이콥스키, 행복한 시작… 비극적 결말

말러, 세상 모든 것을 교향곡에 담아내고자

라흐마니노프, 러시안 멜랑콜리

쇼스타코비치, 20세기의 붉은 베토벤

 

 

근래 재미있게 시청했던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곡으로 등장해 두 작곡가에 관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있어 가장 큰 시련은 1905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었다. 부르주아 출신인 그에게는 혁명은 부담스러운 사건이었다. 1917년 또다시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조국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 힘들 거라는 생각으로 핀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조국을 등지고 낯선 땅에서 새 출발을 해야 했다.

 

드라마에 등장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곡으로 선정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러시아에 거주할 당시 역경을 극복하고 탄생한 곡이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이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고, 대중은 그에게 혹평을 가했다. 사촌이자 동료 피아니스트였던 나탈리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지만, 러시아 정교회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시름을 커져갔다.

 

급기야 그의 증세는 신경쇠약으로까지 발전해 가족과 주위 사람의 걱정과 그를 치료하기에 이른다.

 

많은 방법으로 그를 치료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당시 최면술의 신봉자였던 니콜라스 달 박사의 ‘자기 암시요법’으로 최면으로 치료한 결과 탄생한 곡인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슈만과 클라라, 브람스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슈만의 사후, 브람스가 클라라의 생계를 많이 도와준 거로 묘사되지만, 작가님은 클라라가 당시 독일 전역으로 연주하러 다녔고, 리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는 견해를 밝힌다.

 

말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용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에 가깝다.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의 템스강 뱃놀이에 <수상 음악>을 작곡해 바친다.

 

모차르트는 장남을 잃고 다시 셋째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기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버지 레오폴트가 돌아가시고 남긴 재산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누나에게 부탁한다.

 

베토벤은 자신의 청력이 서서히 잃어가는 사실을 알았지만, 주위 사람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점차 악화하는 청력으로 사람들을 피하게 되면서 생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에서부터 간경화, 신장 질환, 폐 질환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저자는 제한된 지면에서도 이들 작곡가에 관해 자세하고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기의 음악가들>은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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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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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책과함께에서 출판하고 KBS 다큐 인사이트 제작팀에서 저술한 <1950 미중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1950년 한국전쟁이 미중전쟁의 전초전이라는 사실을 지목한다.

 

작년 10월 두 가지 사건이 불안한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중국의 파워 블로거 요리사가 계란볶음밥 레시피를 소개했다가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서 계란볶음밥을 만들다 사망한 마오안잉을 조롱했다는 비난과 함께 요리사의 인신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는 미국은 국부의 아들을 죽인 원수로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10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6·25 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의 묘소에 참배한 김정은 위원장은 ‘항미원조보가위국(미국에 대항에 북한을 돕는 것은 내 집과 나라를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앞으로 미중전쟁이 일어난다면 최고 유력한 곳은 타이완의 진먼섬과 인근 지역이다. 북한은 그때 중국이 미국에 항전해 자신을 도와준 것을 계속해서 인지시키고 다음번에도 중국이 북한을 도와줘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1950년 미국과 중국이 참전한 것은 여러 가지 오산과 오판으로 비극이 벌어졌다. KBS 다큐 인사이트 제작팀은 1950년 한국전쟁을 미중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있다.

 

제작팀은 2000년, 2010년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즉 북한의 남침,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국군 개입과 전선의 고착, 그리고 지루한 정전 협상과 고지전이라는 흐름 속에서는 국제적인 힘의 역학 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빠져있는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시각은 미중전쟁으로 확대해석한 결과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내용을 인식했고, 미중전쟁이 ‘오판’, ‘충동’, ‘대치’로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미국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은 서태평양 마셜 제도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이 섬에서 67번이나 핵실험이 진행되었다. 핵폭탄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핵심 전력이었다.

냉전 시대가 시작되고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치닫던 1949년 3월, 김일성이 북한 지도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김일성은 지속해서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선제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만든 38선을 넘는 순간 미군이 참전할 것이었다.

 

1949년 8월, 상황이 변했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소련도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갖게 되었다.

 

1949년 9월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5년 이후 4년이나 이어진 치열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가야 했다. 중국은 두 개로 나뉘었으나 사실상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앨저 히스 사건으로 반공주의 열풍이 불었고 매카시는 반공 열풍을 미국에 불어넣었다.

 

하지만 애치슨은 미국의 주안점을 서유럽에 두고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작전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9년 6월, 38선 이남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1년 전에 한반도에는 미 군사고문단 5백여 명을 제외한 주한미군은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지만,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세워지고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이 사라졌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었다.

이 방위선에 한반도와 타이완은 빠져있었다.

 

이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을 오판하게 했다. 스탈린은 1950년 2월에 갱신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으로 마오쩌둥이 요구한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항구의 이용권을 회수했다.

 

그 대가는 한국전쟁에 중국을 참전하게 하여 미국과 중국이 오랜 시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스탈린이 동의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한국전쟁의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원산까지 중국의 국경을 넓힐 기회로 보았다.

 

전쟁 당사자 모두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바라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강행했다.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 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여 명과 각종 포 1,600여 문, 전차 280여 대 등이 동시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했다.

소련과의 전면전이 아닌 것을 확인한 미국이 곧바로 한국전에 개입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1950년 7월, 미군 병력 5만여 명과 영국, 호주, 타이, 터키 등 16개국에서 파견한 유엔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북한군의 승승장구로 김일성이 호언장담한 대로 한반도는 공산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1950년 9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켰다.

마침내 9월 28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유엔군은 북상하기 시작해 38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다시 한번 움직였다. 중국군이 참전하면 소련이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맥아더는 정주와 함흥을 잇는 선을 북진 한계선으로 삼았다. 중국의 펑더화이는 미군이 평양-원산 인근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맥아더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참전하더라도 5만~6만여 명의 소규모 파병이라 예상했다.

 

마침내 중국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었다.

 

중국은 참전을 통해 ‘싸우지 않고 국경선을 확대’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중국의 오산이자 오판이었다.

 

중국은 30만 대군을 항미원조전쟁에 내보냈다. 중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았고, 경무장한 중국군을 빠르게 남하했다.

 

미군이 북진 한계선 너머로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의 예상, 그리고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개입하더라도 그 병력이 많지 않으리라는 미국의 예상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1950년 11월 26일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겨울 전투로 처절하고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가 시작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특히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미군의 이동과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우리에 주둔하던 미 2사단은 처절한 피해를 보았다. 3천여 사상자를 남긴 후, 맥아더는 “모든 전선에서 철수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미 7사단과 미 해병 1사단도 철수를 시작했다. 펑더화이는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야밤에 공격을 개시했다. 밤 온도는 영하 30도를 넘었다. 영하 30도 40도를 오가는 동안 치열한 공격을 하는 동안, 동사자가 속출했다. 5일간의 전투가 끝나고 많은 부대는 10%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동사자와 사상자가 속출했다.

 

해가 뜨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괴한 자세로 몇 분 안에 얼어버린 시체가 지천으로 널렸다. 중국군은 이동 속도로 높이기 위해 경무장으로 진군한 것이 동사자가 속출한 원인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에 대한 군수지원품도 빈약했다.

 

유일한 탈출구인 흥남으로 살아있는 인원은 모두 집결했다. 원산은 이미 중국군이 집결했기 때문에 흥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피란하려는 수많은 민간인이 흥남 부두에 몰려와 있었다.

 

미 10군단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수백 톤의 물자와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의 승선을 허락했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는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군인 10만 5천여 명, 피란민 9만 8천여 명, 물자 35만 톤과 차량 1만 7,500대가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미군 수송선들이 부두를 떠나자 흥남 부두 전체가 폭발했다. 모든 기반 시설이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이 책은 이후 대치 국면을 지나 휴전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책을 보는 것처럼 느끼듯 수많은 사진 자료를 첨부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국제전인 미중전쟁으로 바라보니 스탈린의 노림수가 보였다. 스탈린은 중국군을 한반도에 참전시킴으로써 미국이 한반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19세기 말의 청일전쟁이나 20세기 초의 러일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강대국의 주도권 경쟁에 전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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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ㅣ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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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대표하는 남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서울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의 ‘화려한 반역아’라고 불린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님을 대표하는 저작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을 때도 마음속에는 중세 천 년의 시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중세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세를 대표하는 성격을 교황의 권한과 왕권과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관계를 제대로 그리고 있다.

 

최고의 역사 소설 중 한편으로 꼽히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흡입력 있게 풀어놓는 나나미 작가 특기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마치 프리드리히 2세의 곁에서 그의 출생에서 역경을 딛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마침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영웅소설이자, 한 사람의 성장소설이다.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던 중세 시대,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학자를 벗으로 삼고 매에 관한 과학적인 책을 직접 저술했을 뿐 아니라, 법치국가와 정교분리를 목표로 세계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문서를 발표했다.

 

개인적으로 9차례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는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성공한 건 1차 십자군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하지 않고도 성지 탈환에 성공한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라는 어둠의 시절 한 줄기 빛과 같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를 이해하는 좋은 소설임이 틀림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1194년 이탈리아 북부 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였고, 어머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였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 즉위식에 아내보다 먼저 출발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9년이 지나 아이를 가졌다. 산모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남편보다 뒤늦게 출발했다. 가능도중 예나에서 산기를 느껴 광장에 대형 천막을 펴고 출산을 준비했다.

 

프리드리히는 예시 마을의 대표 입회하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가 세례식에 참석한지 1년 후,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은 지 3년째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어머니 콘스탄차 역시 프리드리히가 네 살이 되던 해 갑자기 돌아가신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1198년 로마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접근한다. 교항이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리드리히의 왕위를 인정해주면 혈통상 프리드리히에게 권리가 있는 독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콘스탄차가 아들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리 로마 교황의 영유지임을 인정하고, 프리드리히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 비용을 내는 조건으로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그만큼 프리드리히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법이라는 질서가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중세에서 교황이라는 보호자는 커다란 방패막이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 교황의 주된 관심사는 제4차 십자군을 동방에 보내는 것이었다.

 

 

중세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으로 오랫동안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돌아왔다. 이 쾌거를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88년이 흐른 1187년,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의 반격이 성공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었다.

 

제3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웅 리처드 사자심왕 사이에서 ‘꽃의 제3차’라 불릴 정도의 화려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끝내 예루살렘 탈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제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로 향하지 않고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는 해산해버린다.

 

그 뒤로는 제후와 왕 모두 성지 해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도 영국 왕 존도, 유럽에서의 영토 쟁탈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프리드리히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올린 1215년까지의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국은 아들인 하인리히가 맡는다는 소식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전한지 2주 뒤 교황은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는 팔레르모 대주교 베라르도와 튜턴 기사단 단장 헤르만은 측근으로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들이 통치하던 시칠리아 왕국을 다시 공식적으로 자기 수중에 넣고 싶었다.

 

그는 교황에게 수시로 십자군 참여에 관한 말을 바꿈으로써 여든여덟 살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미치게 만든다.

 

호노리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를 십자군 원정에 보내고자 했으나, 프리드리히는 한시도 가만이지 못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집요할 정도로 추궁하는 교황의 십자군 원정 요구를 달래고 연기까지 인정받아야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없는 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로마 교황이 보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최우선 임무는 오리엔트로 원정해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한편 황제 프리드리히가 생각하는 최우선 임무는 자기 영토의 통치권 확립이었다.

 

 

122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숨을 거두었고, 다음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와 처절한 항쟁을 이어가는 그레고리우스 9세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2년 설치되는 ‘이단 재판소’의 창설자로도 유럽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아가 된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 독일 왕에 이어 황제가 되었던 것이 교황 덕분인데 이를 모르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작센공 오토에게 넘긴 것도 교황이라 생각했다.

이 사실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분노는 참을 수 없었고, 두 번째 파문을 발표한다.

 

교황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생각했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을 믿었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은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하고 종교적인 부분은 교황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정교분리’ 즉 ‘세속주의’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시대에서 30년이나 지난 시기에 십자군을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의 적은 더는 살라딘이 아니었다. 살라딘 이후 이슬람 세계를 이끈 것은 친동생 알 아딘인데, 이 사람의 장남이자 이집트 술탄 자리에 있는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의 적이었다.

 

알 아딘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다마스쿠스와 알 카밀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카이로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를 잘 활용해 무혈 십자군을 이끌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1229년에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진행해 예루살렘 땅을 되찾았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늦게 예루살렘 국왕으로서의 즉위식도 거행하도록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온 유럽이 칭송했다.

 

그는 나폴리에 세속 학자를 모아 로마법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하고, 아라비아 수학의 보급에 힘쓰고, 십자군 원정조차 황제나 왕, 제후라는 세속의 사람이 하는 것으로 정교 분리주의자이자 세속주의자였을지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원정을 완수하고, ‘법에 근거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훌륭한 인품을 소유했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또 강한 이미지를 풍겼으며 합리적이며 자연과학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직책과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백작의 권한과 지방 성주들의 권력을 통제했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다.

 

이 남자를 알면 세계사를 보인다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 시대, 교황에 대항해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불을 밝힌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즐거운 시간을 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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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ㅣ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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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대표하는 남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서울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의 ‘화려한 반역아’라고 불린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님을 대표하는 저작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을 때도 마음속에는 중세 천 년의 시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중세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세를 대표하는 성격을 교황의 권한과 왕권과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관계를 제대로 그리고 있다.

 

최고의 역사 소설 중 한편으로 꼽히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흡입력 있게 풀어놓는 나나미 작가 특기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마치 프리드리히 2세의 곁에서 그의 출생에서 역경을 딛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마침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영웅소설이자, 한 사람의 성장소설이다.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던 중세 시대,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학자를 벗으로 삼고 매에 관한 과학적인 책을 직접 저술했을 뿐 아니라, 법치국가와 정교분리를 목표로 세계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문서를 발표했다.

 

개인적으로 9차례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는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성공한 건 1차 십자군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하지 않고도 성지 탈환에 성공한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라는 어둠의 시절 한 줄기 빛과 같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를 이해하는 좋은 소설임이 틀림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1194년 이탈리아 북부 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였고, 어머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였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 즉위식에 아내보다 먼저 출발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9년이 지나 아이를 가졌다. 산모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남편보다 뒤늦게 출발했다. 가능도중 예나에서 산기를 느껴 광장에 대형 천막을 펴고 출산을 준비했다.

 

프리드리히는 예시 마을의 대표 입회하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가 세례식에 참석한지 1년 후,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은 지 3년째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어머니 콘스탄차 역시 프리드리히가 네 살이 되던 해 갑자기 돌아가신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1198년 로마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접근한다. 교항이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리드리히의 왕위를 인정해주면 혈통상 프리드리히에게 권리가 있는 독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콘스탄차가 아들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리 로마 교황의 영유지임을 인정하고, 프리드리히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 비용을 내는 조건으로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그만큼 프리드리히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법이라는 질서가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중세에서 교황이라는 보호자는 커다란 방패막이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 교황의 주된 관심사는 제4차 십자군을 동방에 보내는 것이었다.

 

 

중세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으로 오랫동안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돌아왔다. 이 쾌거를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88년이 흐른 1187년,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의 반격이 성공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었다.

 

제3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웅 리처드 사자심왕 사이에서 ‘꽃의 제3차’라 불릴 정도의 화려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끝내 예루살렘 탈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제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로 향하지 않고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는 해산해버린다.

 

그 뒤로는 제후와 왕 모두 성지 해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도 영국 왕 존도, 유럽에서의 영토 쟁탈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프리드리히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올린 1215년까지의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국은 아들인 하인리히가 맡는다는 소식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전한지 2주 뒤 교황은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는 팔레르모 대주교 베라르도와 튜턴 기사단 단장 헤르만은 측근으로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들이 통치하던 시칠리아 왕국을 다시 공식적으로 자기 수중에 넣고 싶었다.

 

그는 교황에게 수시로 십자군 참여에 관한 말을 바꿈으로써 여든여덟 살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미치게 만든다.

 

호노리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를 십자군 원정에 보내고자 했으나, 프리드리히는 한시도 가만이지 못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집요할 정도로 추궁하는 교황의 십자군 원정 요구를 달래고 연기까지 인정받아야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없는 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로마 교황이 보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최우선 임무는 오리엔트로 원정해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한편 황제 프리드리히가 생각하는 최우선 임무는 자기 영토의 통치권 확립이었다.

 

 

122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숨을 거두었고, 다음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와 처절한 항쟁을 이어가는 그레고리우스 9세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2년 설치되는 ‘이단 재판소’의 창설자로도 유럽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아가 된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 독일 왕에 이어 황제가 되었던 것이 교황 덕분인데 이를 모르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작센공 오토에게 넘긴 것도 교황이라 생각했다.

이 사실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분노는 참을 수 없었고, 두 번째 파문을 발표한다.

 

교황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생각했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을 믿었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은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하고 종교적인 부분은 교황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정교분리’ 즉 ‘세속주의’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시대에서 30년이나 지난 시기에 십자군을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의 적은 더는 살라딘이 아니었다. 살라딘 이후 이슬람 세계를 이끈 것은 친동생 알 아딘인데, 이 사람의 장남이자 이집트 술탄 자리에 있는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의 적이었다.

 

알 아딘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다마스쿠스와 알 카밀이 술탄으로 다스리던 카이로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를 잘 활용해 무혈 십자군을 이끌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1229년에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진행해 예루살렘 땅을 되찾았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늦게 예루살렘 국왕으로서의 즉위식도 거행하도록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온 유럽이 칭송했다.

 

그는 나폴리에 세속 학자를 모아 로마법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하고, 아라비아 수학의 보급에 힘쓰고, 십자군 원정조차 황제나 왕, 제후라는 세속의 사람이 하는 것으로 정교 분리주의자이자 세속주의자였을지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원정을 완수하고, ‘법에 근거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훌륭한 인품을 소유했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또 강한 이미지를 풍겼으며 합리적이며 자연과학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직책과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백작의 권한과 지방 성주들의 권력을 통제했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다.

 

이 남자를 알면 세계사를 보인다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중세 시대, 교황에 대항해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불을 밝힌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즐거운 시간을 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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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소 - 채식의 불편한 진실과 육식의 재발견
다이애나 로저스.롭 울프 지음, 황선영 옮김 / 더난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채식의 불편한 진실과 육식의 재발견

 

오늘 소개할 책은 더난콘텐츠에서 출판한 다이애나 로저스, 롭 울프 지은이, 황선영 옮긴이의 <신성한 소>이다.

 

이번 주 나에게 눈에 띄는 뉴스는 호주 멜보른에 위치한 KFC 매장에 채식주의자들이 침입해 가짜 피를 뿌리고 과격한 시위를 한 동영상을 공개한 뉴스였다. 이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당신은 동물학대자”라는 비난과 함께 매장에 있는 손님들에게 동물 학대 영상을 틀어 보여주었다.

 

시대적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세상이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동시에 “채식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식단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동시에 인간가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육식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공인 영양사이며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는 다이애나 로저스와 전직 연구 생화학작인 롭 울프의 <신성한 소>는 육식과 채식에 관한 놀라운 진실을 전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가까운 진실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채식을 옹호하는 그룹의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두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현재 농장을 운영하며 느낀 점을 소개한다.

 

“신성한 소”는 특히 부당하게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생각이나 관습, 제도라는 점에서 이 책은 폭넓게 퍼져있는 채식의 우월성에 대해 도전한다.

 

이 책에는 채식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은 실리지 않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공장제 사육 방식이 아닌 목초를 먹인 동물이 포함된 식량 시스템이 환경과 건강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위한 탄탄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육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영양으로 보는 육식, 환경으로 보는 육식, 윤리로 보는 육식으로 구분하고 각 주제에 맞는 육식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실과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가 가장 궁금하게 아래 15가지 질문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을 싣고 있다. 잘못된 인식을 퍼지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까지 분석하고 있어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1)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자보다 오래 살까?

2) 고기를 먹으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까?

3) 우리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아닐까?

4) 단백질을 얼마나 먹어야 할까?

5) 100퍼센트 목초 사육 소고기가 일반 소고기보다 건강에 좋을까?

6) 고기를 먹지 않아도 식물에서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7) 실험실에서 만든 배양육과 수경 재배한 고기가 좋은 대안일까?

8) 소가 메탄가스를 너무 많이 내뿜는 것은 아닐까?

9) 소가 탄소를 어떻게 격리할까?

10) 소를 키울 때 사료가 많이 드는데 가성비가 괜찮은 것일까?

11) 소가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12) 소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닐까?

13) 식물만 먹고도 살 수 있으면 고기를 먹을 필요가 있을까?

14) 100퍼센트 목초 사육 소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이 충분할까?

15) 인간의 건강과 지구를 생각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그냥 알려 달라!

 

과거에는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던 소고기가 밥상에 올라오면서 우리는 소고기가 가지고 오는 질병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고기가 심장 질환을 유발한다는 주장 뒤에는 포화 지방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심장 질환에 잘 걸린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점은 앤셀 키스가 식이 포화 지방을 심장 질환의 원인으로 잘못 지목한 것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와 관련한 연구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증거는 고도 불포화 지방산을 많이 섭취하고 전체적인 포화 지방 섭취량은 줄이라는 심혈관 질환 지침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지 못한다.” (90쪽)

 

채식하는 사람이 육식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까? 라는 의문에도 채식주의자는 흡연이나 음주를 자제하고 운동을 열심히 할 확률이 더 높다. 가공식품이나 설탕도 덜 먹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고기가 질병을 유발하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 (94쪽)

 

 

오늘날 고기를 먹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두 저자는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재생농업에 기반을 둔 목초를 먹고 자란 소를 먹는 방식이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다. 고기를 먹지 않고도 다른 사람과 잘 지낸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처음에 등장하는 사건처럼 고기를 먹는 이웃을 백안시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연의 원리를 생각할 때 옳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물은 종속영양을 하는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자기보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먹고 살면서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다른 동물의 살을 먹는 육식동물, 식물을 먹는 초식동물, 둘 다 먹는 잡식동물이 있다. 인간은 대표적인 잡식동물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환 사이클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명은 다른 개체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진실이다.

 

육식과 채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신성한 소>를 통해 저자의 놀라운 주장을 접해보길 바랍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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