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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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책과함께에서 출판하고 KBS 다큐 인사이트 제작팀에서 저술한 <1950 미중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1950년 한국전쟁이 미중전쟁의 전초전이라는 사실을 지목한다.

 

작년 10월 두 가지 사건이 불안한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중국의 파워 블로거 요리사가 계란볶음밥 레시피를 소개했다가 195010월 한국전쟁에서 계란볶음밥을 만들다 사망한 마오안잉을 조롱했다는 비난과 함께 요리사의 인신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는 미국은 국부의 아들을 죽인 원수로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10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6·25 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의 묘소에 참배한 김정은 위원장은 항미원조보가위국(미국에 대항에 북한을 돕는 것은 내 집과 나라를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앞으로 미중전쟁이 일어난다면 최고 유력한 곳은 타이완의 진먼섬과 인근 지역이다. 북한은 그때 중국이 미국에 항전해 자신을 도와준 것을 계속해서 인지시키고 다음번에도 중국이 북한을 도와줘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1950년 미국과 중국이 참전한 것은 여러 가지 오산과 오판으로 비극이 벌어졌다. KBS 다큐 인사이트 제작팀은 1950년 한국전쟁을 미중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있다.

 

제작팀은 2000, 2010년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즉 북한의 남침,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국군 개입과 전선의 고착, 그리고 지루한 정전 협상과 고지전이라는 흐름 속에서는 국제적인 힘의 역학 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빠져있는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시각은 미중전쟁으로 확대해석한 결과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내용을 인식했고, 미중전쟁이 오판’, ‘충동’, ‘대치로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미국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은 서태평양 마셜 제도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이 섬에서 67번이나 핵실험이 진행되었다. 핵폭탄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핵심 전력이었다.

냉전 시대가 시작되고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치닫던 19493, 김일성이 북한 지도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김일성은 지속해서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선제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만든 38선을 넘는 순간 미군이 참전할 것이었다.

 

19498, 상황이 변했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소련도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갖게 되었다.

 

19499월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5년 이후 4년이나 이어진 치열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가야 했다. 중국은 두 개로 나뉘었으나 사실상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앨저 히스 사건으로 반공주의 열풍이 불었고 매카시는 반공 열풍을 미국에 불어넣었다.

 

하지만 애치슨은 미국의 주안점을 서유럽에 두고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작전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96, 38선 이남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1년 전에 한반도에는 미 군사고문단 5백여 명을 제외한 주한미군은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지만,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세워지고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이 사라졌다.

 

1950112,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었다.

이 방위선에 한반도와 타이완은 빠져있었다.

 

이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을 오판하게 했다. 스탈린은 19502월에 갱신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으로 마오쩌둥이 요구한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항구의 이용권을 회수했다.

 

그 대가는 한국전쟁에 중국을 참전하게 하여 미국과 중국이 오랜 시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스탈린이 동의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한국전쟁의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원산까지 중국의 국경을 넓힐 기회로 보았다.

 

전쟁 당사자 모두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바라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1950625,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강행했다.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 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여 명과 각종 포 1,600여 문, 전차 280여 대 등이 동시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했다.

소련과의 전면전이 아닌 것을 확인한 미국이 곧바로 한국전에 개입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19507, 미군 병력 5만여 명과 영국, 호주, 타이, 터키 등 16개국에서 파견한 유엔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북한군의 승승장구로 김일성이 호언장담한 대로 한반도는 공산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19509,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켰다.

마침내 928,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유엔군은 북상하기 시작해 38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다시 한번 움직였다. 중국군이 참전하면 소련이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맥아더는 정주와 함흥을 잇는 선을 북진 한계선으로 삼았다. 중국의 펑더화이는 미군이 평양-원산 인근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맥아더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참전하더라도 5~6만여 명의 소규모 파병이라 예상했다.

 

마침내 중국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었다.

 

중국은 참전을 통해 싸우지 않고 국경선을 확대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중국의 오산이자 오판이었다.

 

중국은 30만 대군을 항미원조전쟁에 내보냈다. 중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았고, 경무장한 중국군을 빠르게 남하했다.

 

미군이 북진 한계선 너머로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의 예상, 그리고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개입하더라도 그 병력이 많지 않으리라는 미국의 예상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19501126일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겨울 전투로 처절하고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가 시작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특히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미군의 이동과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우리에 주둔하던 미 2사단은 처절한 피해를 보았다. 3천여 사상자를 남긴 후, 맥아더는 모든 전선에서 철수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7사단과 미 해병 1사단도 철수를 시작했다. 펑더화이는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야밤에 공격을 개시했다. 밤 온도는 영하 30도를 넘었다. 영하 3040도를 오가는 동안 치열한 공격을 하는 동안, 동사자가 속출했다. 5일간의 전투가 끝나고 많은 부대는 10%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동사자와 사상자가 속출했다.

 

해가 뜨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괴한 자세로 몇 분 안에 얼어버린 시체가 지천으로 널렸다. 중국군은 이동 속도로 높이기 위해 경무장으로 진군한 것이 동사자가 속출한 원인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에 대한 군수지원품도 빈약했다.

 

유일한 탈출구인 흥남으로 살아있는 인원은 모두 집결했다. 원산은 이미 중국군이 집결했기 때문에 흥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피란하려는 수많은 민간인이 흥남 부두에 몰려와 있었다.

 

10군단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수백 톤의 물자와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의 승선을 허락했다.

 

19501224일 크리스마스이브는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군인 105천여 명, 피란민 98천여 명, 물자 35만 톤과 차량 17,500대가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미군 수송선들이 부두를 떠나자 흥남 부두 전체가 폭발했다. 모든 기반 시설이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이 책은 이후 대치 국면을 지나 휴전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책을 보는 것처럼 느끼듯 수많은 사진 자료를 첨부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국제전인 미중전쟁으로 바라보니 스탈린의 노림수가 보였다. 스탈린은 중국군을 한반도에 참전시킴으로써 미국이 한반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19세기 말의 청일전쟁이나 20세기 초의 러일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강대국의 주도권 경쟁에 전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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