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야기 4-2 - 신앙의 시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4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박혜원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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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야기 4-2 이 책들을 읽은지가 1달 보름정도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나의 지식과 지성의 확장이라는 놀라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벤트와 인물들을 의미하는데 1달 보름이라는 시간이 아주 먼지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읽음으로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데 의미가 있는것 같다. 거두절미하고 윌 듀런트 작가의 마친글을 적고자 한다.

중세 시대의 유산

 여기저기 돌아가며 길게 이루어진 우리 이야기가  이렇게 단테를 끝으로 마무리된다는 건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다.  단테가 죽은 바로 그 세기부터, 웅장하게 있던 신앙을 비롯해 자신이 가슴이 간직해 온 희망까지 산산히 깨부수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러게 해서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 개혁의 필두에 섰고 ,죠토,크리스솔라스,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본격적으로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렸다. 인간은 수도 많고 종류도 참 다양한데, 그 역사를 보면 몇몇 사람 혹은 어떤 장소에는 한가지의 특정 사조가 줄기차게 살아남는 걸 볼수가 있다. 다른 이들이나 나라는 이미 그 사조를 구식 취급한지 오랜인 때에 말이다. 유럽의 경우, 신앙의 시대에 마지막 꽃송이를 활짝 피워 낸 이는 단테였다. 그러다 이후14세기에 들면서는 오캄을 만나 " 면도날"에 치명상을 입게 되고 그렇게 상처를 입은 몸으로 브루노와 갈리레오,테카드트와 스피노자,성의 시대가 참극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때에 신앙의 시대가 다시 막을 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서유럽이 까마득하게 펼쳐진 이성의 바다를 헤쳐 가는 동안에도,세상에는 여전히 신앙의 기치와 지배 아래 살고 있는 곳들이 수두룩했다. 서유럽의 경우 신앙의 시대는 콜럼버스와 함께 막을 내려야 옳지만,러시아에서는 표트로 대제 시대까지가 중세이며, 인도는 우리가 사는 오늘까지도 중세에 있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로마제국이 서양에서 몰락한 때부터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까지의 사이에 낀 별 볼일 없는 시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아벨라르의 추종자들도 자기네들을 이른바 "현대인'이라 칭했었고, 액서터의 주교 역시 1287년에 자기가 살던 시대를 "현대"로 명명한바 있다는 것이다. "중세"와 "현대"를 가르는 경계는 언제나 앞으로 밀려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야 지금이 현대이지만 ,언제가 보다 청정한 연료를 쓰고 보다 품위있는 삶을 살게 되는때에는 석탄과 석유를 때면서 숯검정의 허름한 집에 사는 오늘이 중세로 취급받을지 모를 일이다. 중세 시대는 결코 한 문명이 다른 문명으로 넘어가면서 거치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수용되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을 중세의 시작으로 잡는다면, 중세는 실로 긴 시간을 포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달을 거듭해 13세기에 하나의 온전하고 풍성한 문명으로 성숙하기까지의 과정, 나아가  그 문명이 다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라는 상반되는 문화로 쪼개지는 과정까지도 모두 중세를 들어간다. 이런 중세에 대해 우리가 깔보는 듯한 태도르 취하는 것은 전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중세에는 남녀 모두에게서 위대한 인물들이 수도없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야만성이 모든 것을 짓밟아 놓은 그 폐허 속에서 교황제도며, 유럽의 근대 국가, 그리고 중세만이 힘들어 얻어 낼수 있던 그 소중한 유산들이 이룩되었으니까.

 물론 그 유산중에도 훌륭한 것도 있지만 몹쓸것도 없지 않다. 더구나 암흑시대의 병폐는 아직도 우리에게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이다. 여전히 우리 주위엔 아직도 우리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이다. 여전히 우리엔 불안이 살아 남은 탐옥은 부추기고 있고, 두려움은 잔혹의 자양분이 돼 주고 있으며, 빈곤에서는 불결과 무지가 잉태돼 나오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불결은 다시 질병을 만들어 내고, 무지는 또 맹신,미신, 주술을 낳고 있다. 여기다 교조주의는 이단 불용과 종교 재판이라는 악습을 만들고야 마니, 그것이 언제 다시 우리 곁에 나타나 사람드를 억압하고, 그 재산과 목숨을  앗고, 또 파멸시킬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따지면 중세의 정신은 여전히 곳곳에 숨어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 슬쩍 망토만 걸치고는 그것을 현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느 세대건 문명을  만들어 내는 건 어디가에서 피땀을 흘리는 소수이다. 그들로서는 문명이라는 곧 특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 들이기는 버거운 의무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해 종교 재판은 유럽 사회에 돌이키지 못할 악페를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이성의 모험길에 올라 있던 사람들을 겁주어 다시 조용히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앙의 시대가 낳은 유산 중 가장 빼어난 것 하면 역시 종교이다. 18세기까지 탈무드를 통해 그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유대교가 그렇고, 12세기에 코란이 철학을 이긴 이래로 비교적 잠잠하게 지내 온 이슬람교가 또 그렇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우에는 세계를 동서와 남북으로 갈라 놓은 면이 없지 않지만, 아직도 백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종교로 꼽히고 있다. 중세 교회가 만들어 놓은 교리를 오늘날까지(1950년) 소중하게 받드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아서, 그 숫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만 3억 3000만명, 그리스 정교회에만 1억 2800만명에 이른다. 또 논쟁에서는 번번이 결실을 거두지 못 했어도,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례만큼은 여전히 사람들의 영혼에 적잖은 감동을 주고 있다. 나아가 이제까지 교회는 교육 및 자선 사업, 그리고 야만인을 윤리적 인간으로 길들이는 데 여러가지 역활들을 해 왔고, 이는 현대 사회가 사회질서와 윤리 기강을 바로잡는 데에도 소중한 밑거름이 돼 주고 있다. 교황이 품었던 하나 된 유럽이라는 이상은 제국과 교황권이 맞붙어 싸우는 동안 어느 정도 빛이 바래긴 했으나,여전히 세대를 막론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설레는 꿈으로 남아있다. 제각각의 주권국들이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보다는 온 세계가 하나의 윤리적 질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염원속에서.

 교황의 이 꿈이 확실히 수포로 돌아가고 나서부터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별 변화없이 이어 오고 있다. 근대 민족 국가의 원리가 생겨나 현대 정치사를 써내려 갈 채비를 시작한것도 이즘부터였다. 한편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사이 중세의 지성은 위대한 제도로 많이 탄생시켜 놓았으니, 시민법 및 교회법,해상법및 상법, 지방 자치 규약, 배심 제도및 인신 보호법, 귀족의 대헌장 등이 그렇다. 또 중세의 궁궐과 교황청의 통치방식은 각 나라들 및 교회에 하나의 본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실제적으로 통치에 활용되고 있다. 스페이, 아일랜드, 프랑스, 잉글랜드 같은 경우에는 의회 기능을 가진 기구가 성립되면서 이른바 대의 정치라는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위대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의 유산이었다. 중세 시대에 들면서 인간은 비로소 황무지를 정복해 낼수 있었고,숲,정글,늪지,바다를 상대로 대전을 펼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세에는 서유럽 땅 대부분에서 노예제를 종식시켜 버렸고, 그것은 농노제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또 중세 시대에는 생산 활동이 길드를 중심으로 조직화될 수 있었으니, 무책임한 개인과 독재 국가 사이의 중도라는 점에서 이는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이 이상적인 경제 활동 방식의 하나로 꼽는다.  재단사와 제화공의 경우에는 극히 최근까지만해도 개인 작업실에서 수공업을 하는 형태였는데 중세 시대의 방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대규모 생산 공정 및 자본주의 조직에 예속된 것은 극히 최근 들어 우리 눈앞에서 진행된 일이다. 오늘날에도 대도시에서는 대박람회가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며 물품이 한자리에 모이고 하는데, 이 역시 중세 시대 상업이 물려준 유산이며, 오늘날 우리가 독점을 규제하고 가격 및 임금을 일정하게 조절하려고 하는 관행 역시 중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금융업 같은 경우는 심지어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형제회나 비밀 결사 조직도 그 뿌리 및 의례는 중세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세의 윤리는 애초 야만성을 모태로 태어나더니 자신의 후사로서는 기사도 정신을 낳아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사의 개념은 중세때에 만들어 졌다고 봐야한다. 중세 때 생겨난 이 기사도 정신은, 그 실천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인간 영혼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상의 하나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시절 유럽남자들의 행동에 전에 없는 온화함이 배어들게 된 것은 아마도 마리아 숭배가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가 끝나고 몇 백년 동안 중세의 윤리에서 우리가 진보한 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가족을 화합시키고, 윤리 교육을 중시했으며, 명예와 예의라는 습관을 더디게나마 널리 전파시킨 중세의 토대가 있었기데 가능했다. 오늘날 회의론자들이 이 나마 윤리저긴 삶을 유지해 가는 것이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빨아들였던 윤리가 자기도 모르게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것처럼.

 중세 시대의 지적 유산은 그리스 시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편이고 그 마저 고대에서 비롯된 수백 가지의 잘못된 미션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그렇다고는 해도 현대의 각종 언어를 비롯해, 곳곳의 대학들, 철학 및 과학의 용어들이 중세 시대의 만들어진 지적 유산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콜라 철학의 경우는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적 성휘였다기보다 논리를 갈고닦기 위해 거쳐야했던 일종의 훈련 과정이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오늘날에도 수많은 대학들에서는 그러한 스콜라주의가 여전히 위세를 덜치고 있지만, 한편 중세 신앙이 품었던 제반 가정들은 역사 기록학이 발전하는데에는  걸림돌이 작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세계는 물론 인간의 기원 및 운명에 관해서 자신들이 잘 안다고 믿었고, 그래서 역사는 수도원 연대기의 벽속에 꼼짝없이 가둬 놓은 채 그런 믿음들을 바탕으로 신화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얼키설키 지어내곤 했다. 물론 이런 중세의 역사가라고 해서 발전이나 진보에 대해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건 당치 않다. 19세기에도 그러했듯,13세기에는 그저 자기 대에 이룩된 성취가 무엇보다 대단하게 여겨졌던 것일 뿐이리라, 한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알고보면 중세는 그렇게 정적인 시대도 아니었다. 원래 멀찍이서는 활발한 움직임도 둔해 보이고, 두드러진 차이점도 흐려 보이며, 현격한 변화도 멈춘 듯 보이는 법이니까, 오히려 당시에도 예법과 복식, 언어와 사상, 법률과 통치, 상업과 재무,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는 오늘날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중세의 사상가들은 목적의 발전을 중용시했고, 따라서 그에 수반되는 수단과  진보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분별없이 떠드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세가 남긴 과학적 유산은 확실히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얼마간의 성과에 인도 숫자, 십진법,실험 과학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세에도 수학,기하학, 천문학, 광학 방면에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또 화약에 대한 발견이 이뤄지는가 하면, 안경, 선박용 나침반, 전자시계가 발명돼 나왔고, 어쩌면 인간 삶에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일지 모를 알코올 증류법도 발달돼 나왔다.

 또 이 시절에는 아랍인 및 유대인 의사들의 손에 의해 그리스 의학이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외과술은 그리스도교 개척자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이발업의 영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오늘날 유럽에 세워져 있는 병원의 절반은 중세 시대 때 그 토대가 세워진 것이거나, 아니면 중세에 이루었던 성취를 현대 들어 다시 복원한 경우에 해당한다. 현대의 과학은 중세 세상이 표방했던 세계주의를 계승한 건 물론, 그것이 썼던 국제 언어까지도 일부 계승해 오고 있다.

 우리가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윤리 규범 다음으로 풍성한 양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물론 장엄한 면에서 보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샤르트 성당에 못지 않다. 하지만 전자의 위용은 오로지 건축 한 면에서만 찾아지니, 순전히 기능적인 선들만 사용해 그토록 어마어마한 높이의 건물을 안정적으로 지어 올렸다는 점에서는 대단하다. 하지만 고딕양식 성당들의 삶에는 건축은 물론 조각,회화,시,음악도 늘 함께했다. 그래서 샤르트르 성당, 아미앵 성당, 랭스 성당, 노트르담 성당은 감각 및 영적인 조화미 속에서 규모와 깊이를 이루고 그 내용과 장식에 있어서도 풍성함과 다양함을 갖추고 있어서이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순간도 지루할 틈없이 영혼 구석 구석이 보다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성당들에 자리한 입구며, 종탑, 첨탑들, 하늘로 날아 오를 듯한 석재 궁륭,성심성의껏 조작된 갖가지 조각상, 제단, 세례반, 묘비들, 그리고 무지개와 햇빛을 무색하게 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창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시대가 신앙의 상징이나 수공예를 너무 사랑하는 면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들 상당 부분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어야 할것만 같다. 중세에 다성 음악 이 발달 할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성당들 덕분이었으며, 기보법 및 보표가 발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극형식 역시 애초 탄생의 기원은 교회에 있다.

 중세가 문학에 남겨 놓은 유산은 그리스 문학과는 질적인 면에서 감히 상대가 안 되지만, 그래도 로마 문학과는 어느 정도 어깨를 견줄만하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 페트라르카는 호라티우스와 쌍벽을 이루고 ,아랍인과 트루바두르들이 지은 연애시는 오비디우스,티블루스,프로페르티우스의 시들에 버금간다. 아서 왕 전설 속 사랑 이야기는 그 깊이나 숭고함에 있어 [변신 이야기]나 [여인들의 편지]속 어떤 일화보다 나으며,우아함에서도 그에 못지 않다. 여기 더해 중세 시대의 주요 찬송가들은 그 가사가 아름담기가 로마 시대 최고의 시들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중세의 13세는 아우구스투스나 레오 10세의 치세에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 지적 활동 및 예술 활동이 이만큼이나 다채롭게 활짝 꽃핀 시기는 역사의 어느 대목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이때에는 15세기 말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상업 확장도 거침없이 이루어져 덕분에 세상은 전에 없이 넓어지고, 풍성해지고 , 활기찰 수 있었다. 또 인노켄티우스 3세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 이르기까지 강한 힘을 가진 교황들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백년의 시간 동안 교회는 유럽의 질서 및 법률을 관장하는 최정상상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갖은 역경을 딛고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한편에서는 탁발 수도회가 만들어져 수도원 본연을 이상을 회복시켰다. 필립 아우구스투스, 생루이,필립 4세,에드워드 1세,프레데리크 2세, 알폰소 10세와 같은 통치자들은 관습대신 법률로 나라를 통치하여, 중세에 없던 새로운 문명 수준을 백성들이 누릴수 있게 해 주었다. 12세기만 해도 신비주의 경향이 유행했으나 13세기는 그것을 거뜬히 물리치고 철학과 과학을 향해 진격해 갔으니 그 열정과 용기는 르네상스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문학 방면에서는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부터 [신곡]의 구상에 이르기까지 13세기가 실로 "경이의 시절"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 13세기에는 중세 문명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나름의 통일성,완성도 그리고 최상을 형식을 다 같이 갖추게 되었던 듯하다.

 중세를  올바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중세에 대한 부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를 완결 지은 한 과정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탐험만 해도 그렇다. 그 전에도 이미 베네치아,제노바, 마르세유, 바르셀로나, 리스본, 카디즌 같은 곳에서 바다 멀리로까지 길을 닦아 놓은 상인 및 항해사들이 있었고,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이들의 작업을 이어받아 성과를 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도시들을 자부심과 전쟁으로 물들였던 조류 역시 12세깅 유럽을 휘저었던 그 조류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 역시 넘치는 에너지와 활동성으로 시대에 헌신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엔리코 단돌로, 프레데리코 2세, 그레고리우스9세와 헌신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말인 콘도티에 라는 말도 애초 연원은 로베르 키스카르에 있으며, "폭군"이란 말은 중세의 에첼리노와 팔라비치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화가들 역시 치마부에와 두치오가 미리 길을 터 주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그 노정을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들도 그레고리오 성가와 바흐의 음악 사이에서 중도를 택한 것이라 할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단테와 중세 음유 시인들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며, 보카치오는 그 자신이 이탈리아 트루베레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돈키호테]식의 로맨스가 계속 꽃을 피워가지만, 한편에서는 또 중세의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시작한 아서 왕 전설을 멜로리가 마침내 완성해 내기에 이른다. 르네상스의 특징으로 꼽히는 이른바 "문예 부흥"운동은 중세의 여러 학교들에서 이미 시작된 참이었다. 다만 르네상스 문예 부흥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이때에는 라틴어 문학은 물론 그리스 고전 문학까지 부흥이 확대되었다는 것이고, 또 고딕 양식은 거부하는 대신 그리스 예술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도 그리스 예술을 들여온 이들은 이미 있었으니, 니콜로 피사노는 13세기에 이미 그리스 조각상을 작업의 본으로 삼은바있고,크리스솔라스가 그리스와 그리스 고전문학을 이탈리앙 들여왔을 때 중세는 그 뒤로도 아직 백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위세를 떨쳤던 종교는 중세 시대에 곳곳에다 성당을 지어 올리고 찬송가가 만들어 낸 그 종교와 똑같았다. 다만 딱 한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이탈리아 교회가 이탈릴아 지성을 대한 태도였다. 이탈리아 교회는 당대의 문화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탈리아 지성들에게도 중세 대학에서 탄생해 나온 사상의 자유를 상당 부분 보장해 주었다. 거기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도, 일반 백성들의 신앙을 파괴하러 들지만 않는다면, 그들 나름의 학문 연구를 뜻대로 진행해 나갈수  있게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었다.

 종교 개혁이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그 대열에서 빠져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두 나라에서는 13세기의 가톨릭 문화가 곧장 15~16세기의 인문주의로 이어졌고, 그것은 또 다시 17~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북유럽의 국가들의 종교 전쟁에 휩쓸려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도 그 아래쪽 라틴계 민족들은 어느 정도 문화적 우위를 지켜 갈 수 있었으니, 그것은  콜럼버스 이전에 이룩된 지중해 교역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렇 듯 문화적 지속성이 줄기착 이어진 덕분이기도 했다. 이 지속성의 시작은 중세를 거쳐 고대 로마로까지 그 연원이 이어지며,남부 이탈리아를 경유해서는 고전 시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칠리아, 이탈리아,프랑스 등의 그리스 식민지와,그 옛날 로마의 정복지 및 로마화한 프랑스 및 스페인 땅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장대한 문화의 실타래가 하나로 죽 이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포와 아나크레온에서 시작해, 베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단테와 페트라르카, 라블레와 몽테뉴,볼테르와 아나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의 그 끈을 말이다. 신앙의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로 접어듦으로써 이제 우리 앞에는 철부지 어린 아이를 벗어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문화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문화는 고전 시대의 우아함에 야만인의 강인함을 결합시키고, 우리는 이 문며에 무언가를 더 더하진 못할 망정 그 목숨이 꺼지게 손 놓고 있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나의 벗 독자들에게, 또 한번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윌 듀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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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4-1 - 신앙의 시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4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박혜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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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4-1 신앙의 시대에 관련해서 윌 듀런트라는 분의 시리즈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 주로 신앙과 관련되어 논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도 이 책은 인기가 없는 책이다. 내가 처음으로 빌려 읽는 듯한 깨끗함 때문이다. 머리 아픈 책은 무려 2권으로 한 권당 1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11월 10일쯤에 이 책의 1권을 읽기 시작하여 28일에 끝을 보았다. 정말 무지무지 힘든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주요 인물의 행적과 그의 사상에 대해서 매우 명확하게 적고 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사람도 있고 익숙한 이름들도 있다. 그러나 집필자의 사고와 전달하고자하는 메세지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터라 쉽지 않게 읽어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다가 보면 논점이나 책의 핵심들을 놓치기가 쉽다. 그래서 그의 들어가기 말을 인지하는게 필수인것 같다. 그는 신앙인이나 종교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류학자로서의 그의 관점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다. 이 책을 평하기에는 내 자신의 역사적 우매함과 미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하기전에 어떤 시선과 관점으로 적게 되었는지 그의 말을 빌려 평하고자 한다.

 이 책 [신앙의 시대]가 지닌 목표는 서기 325년부터 1300년까지의 중세 문명 이야기를 가급적 빠짐없이 그리고 가급적 공평하게 서술해 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 책이 취한 방법론은 총제적 역사학으로서, 한 문화 혹은 한 시대의 모든 국면을 두루 살피되 그것을 하나의 전체적 그림 또는 전체적 서사에 담아내는 것이다. 중세에는 나름의 고유함을 지닌 문명만 자그마치 넷이었는데(비잔틴 문명,이슬람 문명,유대 문명, 서유럽 문명), 이들 문명마다 경제, 정치, 법률, 군사, 도덕, 사회, 종교, 교육, 과학, 의학, 철학, 문학, 예술의 면면을 다 다루려다 보니 필자로서는 글에 통일성과 간결성을 갖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나마 네 문명이 한데 만나 서로 맞붙었던 십자군 전쟁 덕에 내용에 통일성이 어느 정도 마련될 수 있었다. 독자라면 여기서부터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물론 책의 어마어마한 양에도 식겁할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동인 것이 다행이다. 애초 원고는 그 분량이 현재 출간본의 1.5배에 달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만큼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전부 중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내용, 혹은 이야기의 생동감과 맛깔스러움을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내용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군더더기로 비칠 내용이 남아 있는 만큼, 그런 부분들은 빼놓고 읽더라도 크게 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 나오게 될 책 두 권은 [문명 이야기]에서도 제4권을 구성하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제 1권 [동양 문명]에서는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하기까지으 이집트 및 근동 지역 역사를 다루는 한편,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인도, 중국, 일본의 역사를 살펴 본바 있다. 그리고 제 2권 [그리스 문명]에서는 기원전 146년 로마의 정복을 당하기까지 헬라스 및 근동 지역이 거친 노정과 그간의 문화를 살펴본 바 있다. 제 3권 [카이사르와 그리스도]에서는 로마 제국 및 그리스도교 신앙을 태동 단계에서부터 개관함과 동시에, 근동 지역에 관해서는 기원전 146년부터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있기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 책 [신앙의 시대]에서는 그 뒤를 이어 1321년 단테가 사망하기까지 백인들이 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연구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나오게 될 제 5권 [르네상스]에서는 4권에 이어 1321년부터 1648년까지의 이야기가 다뤄질텐데, 계획대로라면 1955년에 출갈될 예정이다. 제6권 [이성의 시대]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까지 이야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1960년이며 출간 준비가 완료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필자도 노망에 들 것인 만큼, 남북 아메리카에서 대해서까지 총체적 관점을 취해 보는 특권은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역사를 구성하는 이들 각 부분은 저마다 독립된 단위를 구성하게끔 만들어져 있기는 하나, 그래도 전편이 [카이사르와 그리스도]의 내용에 익숙한 독자들이 [신앙의 시대]에서도 그 줄거리를 잡아 나가기가 보다 쉬울 것으로 여겨진다. 중세는 시기별로 크게 넷으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가 보통 관심을 덜 갖게 되는 이야기, 즉 비잔티움 문명과 이슬람 문명으로 서두를 연 것은 연대의 순서상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교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이슬라 문명을 논하면서 이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인 반면, 이슬람 학자들의 경우에는 중세의 그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이 정도로만 대강 간추려 놓은 것에 개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편 내가 이 책에서 줄기차게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되도록 공평무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과, 나아가 각각의 신앙과 문제에서만도 벌써 편견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을 터, 소재 선택과 지면 할당의 문제에서만도 벌써 편견은 작용하기 때문이다. 피부라는 감옥에서 갇혀 있기는 몸뚱이나 지성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는 총 세번에 걸쳐 이 책의 초고를 매만졌는데, 그때마다 번번히 실수가 발견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실수가 한두 개가 아닐터, 책의 전반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역점을 맞추려다 보니 내용을 부분 부분까지 섬세하게 손보지는 못한 까닭이다. 그 오류를 잡아 나갈 기회가 마련된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일 것이다.

 아울러 다음의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뉴욕 아시아 연구소에 재직 중인 일제 리히텐슈타터박사는 이 책에서도 특히 이슬람 문명에 관한 장들을 읽어 봐주었고, 미국 유대교 신학대학의 버나드 맨덜바움박사는 중세 유대교도에 관한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봐 주었다. 또 콜롬비아 대학의 린 손다이크교수가 양해해준 덕에 그가 번역해 놓은 알렉산더네캄의 글들을 책에 실을 수 있었고, 콜롬비아 대학 출판부의 경우에는 에드워드 G. 브라운의 [페르시아 문학사] 번역문 일부를 책에 실을 수 있도록 양해해 주었다. 또 로스엔젤레스 공공 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이용한 덕분에 집필과 관련하여 다방면의 책들을 대출해 읽어 볼 수 있었다. 로즈 메리 드위트양은 5만 개에 이르는 주석 내용을 일일이 타이핑해 주는 수고를 해 주었고, 제임스 L.화이트 헤드박사와 에드워드 홉킨박사 그리고 윌 듀런트 여사는 그들의 풍부한 학식으로 이 책의 소재를 분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메리 코프만과 폴로라 코프만양 역시 집필 작업에 여러 모로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고도의 숙련된 초고 내용을 타이핑해 준 에디스 디케이트여사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 시리즈의 전작에서는 늘 그랬듯이 이번 책 역시 헌사는 나의 아네 에에리얼 듀런트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껏 37년간을 내 곁에 있으면서 한결 같이 나를 인내해 주고, 또 지켜 주고, 이끌어 주고,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으니 그녀에게는 이 문명 이야기 시리즈의 헌사를 모두 다 바쳐도 아마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내는 다른 이들에게  헌사를 써 주길 원하니 아내의 청에 따라 이번 책은 내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에게 바치는 바이다.

                                                                                                                                                         윌 듀런트

                                                                                                                                              1949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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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3-2 -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3
윌 듀런트 지음, 임웅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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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3-2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카이사르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그 동안 궁금했던 내용이 어느 정도 해결해 준 책이다. 로마의 부흥과 몰락은 A.J 토인비가 말해주는 문명의 부흥과 쇠퇴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역사이다. 또 주목해야할 점은 인간 예수에 대한 역사학자로서 날까로운 분석을 볼수가 있다. 로마의 역사에 인간 그리스도의 태생과 깨달음의 경로를 목도할수 있다.

윌 듀런트의 마치는 글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1.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우리 시대의 어느 뛰어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두 가지 가장 큰 문제는 로마의 등장과 멸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로마의 등장처럼 로마의 멸망에도 하나가 아닌 여러 원인이 있었으며, 로마의 멸망이 하나의 사건이 아닌 300년 넘게 걸쳐 있는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로마의 등장과 멸망에 대한 이해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국가들은 로마의 멸망만큼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다.

 위대한 문명의 경우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할 때까지는 외부로부터 정복되지 않는다. 로마 쇠퇴의 주요 원인은 로마의 민족,도덕, 계층 간의 싸움, 쇠퇴해가는 교역, 관료적 전제성, 질식할 것 같은 세금, 그리고 기진맥진케하는 전쟁에 있었다. 그리스도교도 저술가들은 이러한 쇠퇴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200년경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마도 이교 세계의 멸망에 대한 전주곡으로서 무나 그대로 한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다. 250년경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들이 제국이 겪는 불행의 근원이라는 비난에 답하면서 이러한 불행을 자연적인 탓으로 돌렸다.

' 세상은 나이가 들고 변함없이 예전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쇠퇴를 입증합니다. 강수량과 햇빛의 따듯함 둘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속은 거의 고갈되고 있습니다. 농부는 경작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야만족은 침입, 그리고 수 세기에 걸친 풍요한 광맥의 채굴이 로마의 귀금속 공급량을 낮춘 것이 틀림이 없다.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삼림 파괴와 침식, 그리고 감소하는 소농 계층과 어수선한 당국의 용수로 방치가 이탈리아를 전보다도 더 빈곤한 상태로 빠뜨렸다. 하지만 원인은 타고난 토양의 고갈과 기후의 변화가 아니라,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의 태만과 불임이었다.

 생물학적 요인들이 더 근본적이었다. 하드리아누스 이후 서방에서 심각한 인구 감소가 나타난다. 인구 감소는 의심되었지만, 아우렐리우스,발렌티나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야만족이 제죽에 유입되면서 인구 감소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자신의 군대를 보충하기 위해 아울레리우스는 노예,검투사, 치안대, 죄수를 병적에 올렸다. 예전보다 위기가 더 심화되었거나, 아니면 자유민 인구가 감소했다. 게다가 노예 인구는 확실히 감소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너무나 많은 농장이 버려졌으므로 페르티낙스는 버려진 농장을 경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무료로 제공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법령은 일손 부족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에서 인구 감소가 수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디오니시오스 주교는 당시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추산했다. 그는 "인류가 감소하고 끊임없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한탄했다. 제국 외부와 내부에서 야만족과 동방인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러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는가? 무엇보다도 산아 제한이, 이제는 다산으로 잘 알려진 빈곤층까지 침투하였다. 서기 100년경 산아 제한은 농촌 출신을 원하기 위한 황제의 급양 계획에서 알수 있듯이 농민에게까지 미쳤다. 3세기경 산아 제한은 서방 속주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으며, 갈리아에서 인력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었다. 비록 범죄로 낙인찍혔지만 유아 살해는 빈곤이 늘어나면서 빈번해졌다. 성적 무절제가 인간의 생식력을 감소시켰을지도 모른다. 결혼 회피나 연기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동바의 관습이 서방으로 유입되면서 환관 만들기가 증가했다. 친위대장 플라티아누스는 백명의 소년을 거세시킨 다음 딸의 결혼 선물로 주었다.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 산아 제한에 버금가는 것이 전염병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 손실, 혁명, 전쟁이었다. 생명의 위험을 수반할 정도의 전여명으로 아우렐리우스, 갈리에누스, 콘스탄디누스 치하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260년~265년에 제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 전염병이 습격했다. 로마에서 몇 주 동안 매일 5000명이 죽어 나갔다고 전해진다. 캄파니아 평원의 모기들이 폰티노 습지에 대한 인간 침입자에게 맞선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말라리아가 라티움과 투스카니에서 부자와 빈민의 원기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 대량 학살과 피임, 낙태, 그리고 유아 살해가 숫자상으로뿐 아니라 비우생학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즉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가장 늦게 결혼했고, 가장 적게 낳았으며,가장 빨리 죽었다. 자선이 빈민을 약화시키고 사치는 부자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가 이탈리아 북부에 살면서 군대를 보충하던 게르만인이 살아남은 토착 민족보다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했다. 만약 시간이 여유있는 동화를 허용했더라면, 게르만인은 고전 문화를 흡수하고 이탈리아의 혈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탈리아 주민들은 오래전에 로마 민족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했다고는 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열등하던 동방 민족과 섞였다.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가는 게르만인은 고전 문화를 이해할수 없었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전달하지도 않았다. 빠르게 증가해 가는 동방민들은  대체로 고전 문화를 파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전 문화를 소유한 로마인들은 고전 문화를 희생해 불임을 위안받았다. 로마는 외부에서 야만족 침입이 아닌 내부에서의 야만족 증가로 정복되었다.

 도덕의 쇠퇴가 제국 해체에 기여했다. 끈질긴 소박함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앙으로 형성되던 남성적인 기지이 부의 햇살과 불신의 자유로 느슨해졌다. 이제 중산층과 상층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갈 정도의 재력을 갖추었다. 도시의 인구 밀집은 접촉을 증가시켰고 감시를 좌절시켰다. 이주로 인해 여러 문화가 합쳐졌으며 문화들의 차이는 무관심으로 사라져 버렸다. 도덕과 미의 기준이 대중의 자력에 의해 낮추어졌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쇠퇴하는 동안 성이 활개를 쳤다.

 어느 위대한 역사가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멸망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로마인에게 도덕적 기질을, 그리고 로마 국가에 안정을 가져다주던 옛 신앙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고전 문화,즉 과학,철학,문학,미술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인의 삶에서 허약한 동방의 신비주의를 현실적인 스토아주의 상태에 이르게 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의 생각을 현세의 과업에서 우주의 재난에 대한 대비한 무기력한 준비로 바꾸어 놓았으며, 국가에 대한 헌신을 통한 집단적인 구원보다는 오히려 고행과 기도를 통한 개인적 구원을 찾도록 유도했다. 그리스도교는 군인 황제들이 지키려고 노력했던 제국의 통일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관직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거나 병역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제국의 생존이 전쟁을 필요로 했을 때, 그리스도교는 무저항의 윤리를 설교했다.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곧 로마으 멸망이었다.

 이렇듯 격렬한 비난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본의 아니게 교의 대혼란을 함께했으며,이것은 도덕규범을 뒤범벅으로 만들어 로마의 붕괴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장은 로마 쇠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다. 구 종교의 해체는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기 오랜전에 시작되었다. 엔니우스와 루크레티우스 이후의 어떤 이교도 작가보다 이 둘이 구 종교에 대해 더 강려간 공격을 가했다. 도덕의 붕괴가 로마의 그리스 정복으로 시작되었고, 네로 치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 후 로마의 도덕은 개선되었으며, 로마인의 생활에 끼치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대부분 건전했다.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은 로마가 이미 사멸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그들에게 냉담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빈곤에 맞서 부를 옹호하고, 노예를 손에 넣기 위해 싸우며, 사치를 지원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과세하고, 기아, 전염병, 침입, 빈곤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해 주지 못 했으므로 국가에 대한 믿음을 철회했다. 사람들은 용서받기 위해 전쟁을 설교하는 카이사르로부터 평화를 설교하는 그리스도에게로, 터무니없는 잔혹함으로부터 전례없는 관용으로,희망이나 위엄없는 삶으로부터 빈곤을 위로하고 인간애를 명예롭게 여기는 신앙으로 돌아섰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지 않았듯이, 그리스도교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야만족이 침입했을 때, 로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로마쇠퇴의  경제적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을 이해하는데 필수 조건으로 이미 언급한바 있다. 로마 쇠퇴의 경제적 원인으로 속주 곡물에 대한 불안정한 의존, 노예 공급과 노예제 대농장의 실패, 운송의 악화와 교역의 위험,속주의 경쟁에 따른 속주 시장의 상실, 이탈리아의 수입에 상응하는 이탈리아 수출 제조업의 무기력과 그로 인한 동방으로의 귀금속 유출, 부자와 빈민사이의 파괴적인 싸움, 군대, 자선, 공공 토목 공사, 확대해 가는 관료정, 그리고 여기에 기생하는 궁정의 비용 증가, 통화 가치의 저하, 능력 발휘의 좌절, 가혹한 과세에 의한 투자 자본의 흡수, 자본과 노동력의 유출, 농업에 기반한 농노제와 제조업에 의한 투자 자본의 흡수, 자본과 노동력의 유출, 농업에 기반한 농노제와 제조업에 강제된 폐쇄적 계급제도와 구속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로마의 권력이 경제적 사망 선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정치적 허깨비에 불과할 때까지 이탈리아의 물질적 삶의 기반이 서서히 약화되었다.

 로마 쇠퇴의 정치적 원인은 하나의 사실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즉 점점 증가하는 전제정이 시민 의식을 파괴했고, 그것의 근저에 자리 잡고 정치적 수완을 고갈시켰다.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데 무능했던 로마인은 통치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일,오락,군단,아니면 개인적 구원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때 결합되었던 애국심과 이교가 이제 함께 쇠퇴했다. 페르티낙스 이후에 훨씬 더 많은 권려과 위엄을 상실한 원로원은 나태함, 아첨, 아니면 금품 수수에 빠져들어 군국주의와 무정부 상태로부터 국가를 구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방벽이 무너졌다. 황제의 검열관과 세금  징수원들에 의해 황폐화된 지방의 통치 조직은 더 이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관할 구역에서 할당받은 세금에 대한 시 관리들의 책임, 그들의 무급명예에 대한 비용 증가, 납구금, 공공 봉사,기부, 그들에게 기대되는 경기,침입과 계층간의 싸움에 따르기 마련인 위험이 세금, 작업장, 그리고 농장으로부터의 도망에 상응해 관직으로부터의 도피를 초래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범주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부적격자로 만들었다. 일부는 다른 도시로 도망했고, 일부는 농부가 되거나 수도사가 되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아스는 이교도 성직자들이 전통적으로 누려 오던 시관직과 각종 세금으로부터의 면제를 그리스도교 성직자에게 확대되었다. 교회는 곧 성직 안수를 위한 지원자들로 넘쳐났으며, 도시들은 세입과 원로원의원들의 상실에 불평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시관리에 임용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사제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해야만 했다. 제국 치안대가 세금이나 징병 회피자들을 뒤쫓던 것처럼 정치적 명예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추적했다. 제국 치안대는 그들을 도시로 다시 데려와 복무하도록 강제했으며, 결국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아야 하고, 지위에 의해 선출된 자격이 있다면 선출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관직의 예속이 경제적인 폐쇄적 계급 제도라는 감옥을 완성했다.

원로원의 반란을 두려워한 갈리에누스는 군대에서 원로원 의원들을 배제했다. 군대 인제가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늘어나지 않았으므로, 갈리에누스의 이러한 조치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군의 쇠퇴가 완료되었다. 속주 군대와 용병 군대의 성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위대 폐지,속주민 장군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의 제위 찬타이 서방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오래전에 이탈리아의 지도력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독립마저 파괴했다. 로마의 군대는 더 이상 로마인의 군대가 아니였다. 로마의 군대는 대부분이 야민족인 주로 속주민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단과 집이 아닌 급료와 기증품과 약탈품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은 부자와 도시를 빈민과 농촌의 착취자로 증오하던 소농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내란으로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들은 야만족이 파괴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도시를 약탈했다. 군사 문제가 국내 문제보다 더 중요해졌을 때, 국경 근처의 도시들이 통치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개선식을 위한 무대이자 황제 건축의 명소, 그리고 군대의 정치적 유물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 되었다. 수도의 증가와 권력의 분할은 행정의 통일을 파괴했다. 정치가들이 통치하기에 또는 군대가 방어하기에 지나치게 거대해져 버린 제국이 붕괴를 시작했다. 게르만족과 스코트족에 맞서 아무런 지원없이 스스로 방어하도록 남겨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는 직접 자신들의 황제를 선출해 통치자로 만들었다. 팔미라가 제노비아 치하에서 분리 독립했으며, 곧 스페인과 아프리카가 저항도 하지 못할 만큼 야만족의 정복에 굴복할 것이다. 갈리에누스 치세에 서른명의 장군이 실제로 중앙권력으로부터 제국에 속한 서른 곳의 지역을 통치했다. 한 거대한 국가를 산산 조각내 버린 이 끔직한 드라마에서 내부의 원인은 미지의 주인공들이었다. 야만족은 단지 약점이 드러난 곳으로, 그리고 생물학적,도덕적,경제적,정치적 수완의 실패로 혼란과 낙담과 쇠퇴의 상태로 방치되어 버린 곳으로 침입했을 뿐이다.

 외부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북 아시아의 훈족과 팽창과 이동으로 앞당겨졌다. 중국 군대와 만리장성 때문에 동쪽으로의 진격에서 패한 흉노족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서기 355년경에는 볼가 강과 옥소스 강에 도달했다. 그들의 압박을 받은 러시아의 사르마티아인들이 발칸 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고트족이 로마 국경으로 재차 이동했다. 그들은 다뉴브강을 지나 모에시아의 정착하도록 허락받았다. 그곳에서 로마 관리들의 학대를 받던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아드리아노플에서 대규모 로마 군대를 무찔렀으며,잠시 콘스탄노플을 위협했다. 400년전에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왔으며, 410년에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429년에 가이세리크가 반달족을 이끌고 스페인과 아프리카를 정복했고 472년에 판노니아의 장군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아들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는 이름의 황제로 만들었다. 4년 뒤에 로마 군대를 장악한 야만족 용병들이 "작은 아우구스투스"를 폐위하고,그들의 지도자 오도아케르 이탈리아의 왕으로 불렸다.오도아케르는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 지배권을 인정했으며, 로마 황제에 의해 신하의 지위를 가진 왕으로 받아들이여졌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2.로마의 성취

 로마의 오랜 생존보다 로마의 멸망을 설명하는 것이 더 쉽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손에 넣어 그 문화를 채택했고, 그것에 200년 동안 질서와 번영과 평화를 부여했으며, 2세기 동안 야만의 물결을 더 억제했고, 멸망하기 전까지 서방에 고전 유산을 물려주었다. 이것이 로마가 이룬 성취의 본질이다.

 통치 기술에서 로마에 견줄 만한 적수는 없었다. 로마는 수많은 정치적 범죄를 저질렸으며, 이기적인 과두정과 반 계몽주의적 사제직위에 국가 조직을 세웠다.로마는 자유민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다음 부패와 폭력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로마에 기생하는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정복을 이용했다. 그리고 로마는 로마에 기생하는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정복을 이용했다. 로마가 더 이상 정복을 이용할수 없을 때, 이탈리아는 붕괴했다. 동로마와 서로마 이곳저곳에 로마는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 모든 악에 둘러 싸인 로마는 법률 제정 10대관으로부터 나폴레옹까지 거의 유럽 전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제조업에 자극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위대한 법체계를 만들어 냈다. 로마는 입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된 정체를 만들었으며, 입법권과 행정권의 견제와 균형은 혁명적인 미국과 프랑스의 헌법 제정자들에게 영감을 주웠다. 잠시 로마는 철학자,귀족정, 민주정을 결합했다. 로마는 500개의 도시에 오랜 기간 동안 자유를 부여했다.로마는 처음에는 탐욕과잔혹감으로 그 다음에는 위대한 왕국이 결코 다시는 비슷한 내용을 알지 못했을 정도의 관용과 절대적인 공정함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힘든 일은 무질서한 세계에 로마의 평화가 되살아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로마는 견줄수 없는 탁원한 뼈대 안에, 기원은 그리스적이고 응용과 결과는 로마적인 문화를 만들었다. 로마는 통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가 했던 것처럼 지성의 영역에 풍부한 성과를 이루어 낼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와 이집트, 그리스와 동방에서 받아들인 기술적,지적,예술적 유산을 감사해 하며 흡수하고 고집스럽게 보존했다. 로마는 과학에서의 진보와 제조업에서의 기계 개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안전한 바다위에서 행해지는 교역과 활기 넘치는 생활의 동맥이 되어 준 탄탄한 도로망으로 세상을 부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로와 수많은 교량을 통해 고대의 경작 기술과 수공예 기술, 예술의 기교, 기념비적인 건축 과학, 금융과 투자 기법, 의료와 군 병원 조직, 도시의 위생, 서방에서 새롭게 뿌리내리기 위해 동방에서 가져온 다양한 과일과 견과류 나무, 그리고 농업 작물이나 관상용  식물등이 중세와 근대 세계로 건너갔다. 심지어 중앙난방의 비밀까지 따듯한 남쪽에서 차가운 북쪽으로 전해졌다. 남쪽은 문명을 창조했고, 북쪽은 문명을 정복하고 파괴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차용했다.

 로마는 교육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규모로 발전시켰고, 국가가 교육을 지원했으며, 오늘날의 젊은이에게까지 지속되는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로마는 아치와 둥근 천장과 돔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대담하게, 그리고 웅장하게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일부 분야에서 로마의 건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중세 성당의 모든 건축 원리가 로마의 바실리카에서 준비되었다. 로마는 조작으로 된 초상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초상을 이상화하는 그리스인들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실제적인 힘을 부여했다. 로마는 철학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루크레티우스와 세네카에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 가장 완성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로마는 문학의 유형, 심지어 풍자 문학마저 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웅변술, 에세이, 산문체에 대한 키케로의 영향력을, 단테와 타소, 밀턴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영향력을.....역사 서술에 대한 리비우스와 타키투스의 영향력을, 드라이든과 스위프트, 포프에 대한 호라티우스와 에우베날리스의 영향력을 충분하게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로마의 언어는 매우 뛰어난 어형 변화를 통해 이탈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언어가 되었다. 백인 세계의 절반이 라틴어를 말한다. 18세기까지 라틴언는 서방에서 과학, 학문, 철학의 국제어였다. 더욱이 라틴어는 식물학과 동물학에 편리한 국제적 전문 용어를 제공했다. 라틴어는 로마 교회의 격조 높은 전례와 공식 문서에서 살아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의료 처방전에 사용되고 법률 용어에 자주 등장한다. 라틴어는 직접적인 도용으로, 그리고 다시 로맨스어를 통해 영어 연설의 풍부함과 유연성을 강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우리의 로마유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리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정복했을 때 이교 집단의 조직, 대제사장의 칭호와 의복, 대지의 신과 위안을 주는 수많은 신들에 대한 숭배,도처에 존재하는 초감각적인 실재에 대한 관념, 옛 축제의 즐거움과 장엄함, 그리고 먼 옛날 의식의 화려한 구경거리가 어머니의 피처럼 새로운 종교로 옮겨 갔으며, 포로가 된 로마가 정복자인 그리스도교를 점령했다. 통치의 수단과 기술이 사멸해 가는 제국을 통해 교황권으로 전해졌다. 부러진 칼의 잃어버린 힘을 위안을 주는 말의 마법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국가의 군대가 로마의 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이동하는 교회의 전도사들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속주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로마의 권위는 르네상스로 고전 문화가 부활하는 것처럼 보일때까지. 그리고 영원의 도시 로마가 한번 더 세상의 삶과 부, 그리고 예술의 중심이자 정상을 차지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로마 건국 2689주년을 기념하는 1936년에 로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통치와 문명의 연속성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로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 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윌 듀런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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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3-1 -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3
윌 듀런트 지음, 임웅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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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3-1 카이사르와 그리스스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처럼 로마의 권력 구조를 상세히 적은 책이다. 즉, 집필하는 시대는 기원전'은 '예수 탄생 전(BC Before Christ : 예수 이전)' '기원후'는 '예수 탄생 후(AD Anno Domini : 하나님의 해)'를 로마 집권기에 해당한다. 다들 알다 시피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원후 1년으로 하고 그 전 해는 기원전 1년, 그로부터 100년 전은 기원전 100년으로 계산하게 된다. 서양(보통 유럽)에서 생겨난 년도 계산법이기 때문에 서력(西曆 서양력)이라고 한다. 처음 서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6세기경 로마의 대수도원장이었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교황 성 요한 1세에게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확인해 주기 위하여 서기라는 개념을 고안하면서 부터이다. 이는 예수의 탄생이 로마 건국후 754년이라는 것에서 근거한 것으로 이후 9세기경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확립되게 되었고 근대 이후 서양 세력이 세계적으로 식민지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서력이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에 국제적으로 서력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 등에서는 이슬람력(헤지라가 일어난 622년을 기원으로 함), 에티오피아는 게즈력(예수가 진짜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기원전 7년을 기원으로 함) 등을 사용하는 등 자체적인 달력을 사용하는 국가도 많이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불기(불멸기원)를 사용하며 서기 2013년은 불기 2557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시 얼마전까지는 서기와 함께 단군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단기를 사용했으나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신문에 서기와 단기를 함께 표기하고 있다. 2014년은 단기 4347년) 이렇게 보아도 로마의 시대는 서양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위치임에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저자 윌 듀런트는 다음과 같이 들어가는 말을 시작한다.

 이 책은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문명 이야기]의 제3권에 해당한다. 제 1권은 [동양 문명]이었고 ,제 2권은 [그리스 문명]이었다. 제 4권[신앙의 시대]는 1950년에 출간될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나왔다.

  이 책들의 서술 방식은 사람들의 삶과 일, 그리고  문화의 모든 주요 부분들을 동시에 연구하는 종합적인 역사이다. 반면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필수적인 분석적인 역사는 하나의 문명 아니면 모든 문명에서 인간 활동의 개별적인 부분, 즉 정치, 경제, 도덕, 종교, 과학, 철학, 문학, 예술을 연구한다. 분석적인 연구 방식의 결함이 부분을 왜곡시켜 전체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있다면, 종합적이 연구 방식의 결함은 천년에 걸치 복잡한 문명의 모든 측면을 한 사람이 직접 얻은 지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세부 사항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철학에 매료된 정신, 즉 균형잡힌 관점에 의한 이해의 추구를 통해 과거를 탐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다. 우리는 공간 속 사물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을 통해서, 아니면 시간 속 사건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역사를 통해서 균형 잡힌 관점을  추구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스피노자와 칸트를 읽는 것보다 6000년 동안의 인간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은 이제 역사에 그 지위를 내주었다."

 고대에 대한 연구는 당대의 드라마, 아니면 당대의 삶을 밝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교차로 도시에서 시작해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할 때까지의 로마의 성장, 크림 반도에서 지브롤터 해협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 하드리아누스 성벽까지 200년에 걸쳐 로마가 성취한 안전과 평화, 지중해와 서유럽 세계를 넘어 확산된 로마의 문명, 주위의 수많은 야만성으로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서서히 무너지다가 마침내 암흑과 혼란 속으로 붕괴되는 대참사로부터 질서 잡힌 제국을 지켜내려는 로마의 노력, 이것은 분명히 인간에 의해 연출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이다. 만일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필라투스(빌라도)의 법정에서 마주 했을 때를 시작으로, 겁에 질린 소수의 그리스도교들이 시간과 인내심으로 그리고 박해와 공포로 처음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의 동맹자가, 그 다음에는 제국의 지배자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국의 상속인이 될때까지 계속되었던 드라마가 아니라면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다중 파노라마는 그 범위와 장엄함보다는도 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그 파노라마는 오늘날의 문명 및 문제들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이것이 문명을 전체적인 범위와 삶에서 연구하는 것의 이점이다. 즉 우리는 문명의 생애 각 단계를 우리 자신의 문화 궤적에 상응하는 순간과 비교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오늘날 고대가 끼친 영향에 경고받거나 격려받을 수 있다. 내부와 외부에 야만성에 맞선 로마 문명의 투쟁에 우리 자신의 투쟁이 있다. 로마의 생물학적 그리고 도덕적 타락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정표를 제시한다. 그라쿠스 형제와 원로원, 마리우스와 술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싸움은 우리의 평화의 틈을 파괴하는 전쟁이다. 그리고 전제 국가에 맞서 자유를 지키려는 지중해 사람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우리가 해야 할 다가오는 과업의 전조이다. 로마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윌 듀런트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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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2-2 - 그리스문명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2
윌 듀런트 지음, 김운한.권영교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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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2-2

이 책은 그리스문명에 관해서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 마치는 글을 적고 끝내고자 한다.

 그리스 문명은 죽지 않고 이후에도 수 세기 간 존속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다 했을 때, 그리스 문명은 유럽 국가들과 근동 지역에 스스로를 비길 데 없는 유산으로 남겼다. 모든 그리스 식민지가 스페인과 갈리아, 에트루리아와 로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와 소아시아, 흑해 연안 등 오지의 문화에 그리스 예술과 사상을 마치 연금액처럼 쏟아부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물폼뿐 아니라 사상의 중계지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시인과 신비주의자, 철학자 및 과학자들의 저술과 견해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도서관에서부터 학자와 연구자들을 통해 지중해의 각 요충지로 퍼져갔다. 로마는 그리스의 유산을 이어받아 자신의 헬레니즘 문화를 형성했다. 로마 극작가들은 메난드로스와 필레몬을 차용하고 시인들은 알렉산드리아 문학의 양식과 방식, 주제를 모방했다.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장인 및 형식을 활용했다. 로마법은 그리스 도시들의 법을 받아들었다. 이후 로마 제국은 그리스-동방의 군주제를 전형으로 삼았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후, 동방이 그리스를 정복하고 있던 바로 그때 헬레니즘은 로마를 정복했던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를 융합하고 일부 그리스 유산을 근동과 슬라브 북부에 전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는 이 햇불을 아랍에 건네주었고 아랍은 아프리카를 통해 스페인에 전달했다.

비잔티움과 이슬람,유대인 학자들은 그리스의 걸작들을 이탈리아에 전달해 우선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그 다음에는 르네상스를 각성시켰다. 유럽 정신의 재각성 이후, 그리스 정신은 근대 문화에 철저히 스며들어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는 모든 지적 활동 분야에서 헬라스의 식민지이다"

 그리스 유산에 그리스인들이 고안한 것뿐 아니라 더 이전 문화에서 받아들인 것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대 문명에 전달한 것도 포함한다면,오늘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수공예, 채광기법, 공학, 금융 및 교역 방식, 노동 조직, 상업 및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등은 모두 그리스에서부터 로마를 거쳐 전해 온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도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많은 현대 국가가 그리스에 없었던 대의 제도를 발전시켰지만, 정부가 피통치자를 책임지고, 배심원이 재판하며,시민에게 사상과 언론, 저술,집회 및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그리스와 동방을 구별 짓는 특징으로서, 그리스는 고유의 독립심과 진취적 기상으로 동방의 복종과 둔중함에 미소를 보낸다.

 오늘날의 학교와 대학, 체육관과 경기장, 운동 경기와 올림픽 경기등도 그 기원이 그리스에 있다. 또한 우생학 이론, 자기 억제 및 통제 개념, 건강 및 전원생활에 대한 예찬, 수치심 없는 감각적 쾌락의 이교도적 이상 등도 역사적으로 그리스에서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과 실천도 대부분 엘레우시스와 오르페우스, 오시리스 등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비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의 아들이 인간을 대시해 죽은 후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 교리에서, 종교 행렬과 성결 의식, 제사, 거룩한 공동 식사 등은 그리스 의식에서, 지옥과 마귀, 연옥, 대사, 천국 등은 그리스인의 관념에서, 말씀과 창조,세계의 종말은 스토아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의 미신조차 그리스의 악령,마녀,저주,징조, 액일등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않고서 어떻게 영문학이나 키츠의 송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문학은 그리스 전통이 없이는 거의 존재할 수 없었다. 알파벳은 그리스로부터 쿠마이와 로마를 거쳐 전해졌다. 오늘날 언어에는 그리스 말이 널려 있다.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과학 용어는 그 바탕이 그리스어다. 오늘날의 문법과 수사학, 이 글의 구두점과 단락 구성까지도 그리스인이 고안한 것들이다. 오늘날의 문학 장르, 즉 서정시, 송시, 전원시, 소설, 수필,연설문,전기,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희곡은 그리스인들의 것이었으며, 이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말이 그리스어다. 현대 희곡의 용어 및 형식,즉 비극과 희극, 무언극도 그리스어다. 엘리자베스 시대 비극은 예외적이지만, 그 희극은 메난드로스와 필레몬으로부터 플라우투스와 테렌스,벤 존슨과 몰리에를 거쳐 거의 변화없이 전해져 왔다. 그리스 희곡은 우리의 유산 중 가장 부유한 부분 중 하나다.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우리에게 가장 낯선 것은 음악인 듯하다.그러나 현대 음악은 중세 시대의 성가와 춤에서 연유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그리스에서 그 기원을 찾울 수 있다. 오라토리와 오페라는 일부를 그리스 합창단의 춤과 희곡에서 차용했다.우리가 아는 한, 음악 이론은 처음 파타고라스에서 아리스토크세노스에 이르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탐구되고 해석되었다. 이 유산들 중 순서상 마지막을 차지하는것은 미술이다. 그러나 프레스코 예술에 있어 그 지계보는 폴리그노토스에서 알렉산드리아와 폼에이, 죠토와 미켈란젤로를 거쳐 우리 시대 시선을 사로잡는 벽화로 이어진다. 근대 건축의 형식과 많은 기법은 여전히 그리스적이며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리스의 천재성이 각인되어 있는 분야도 없다. 오늘날에야 겨우 그리스 건축의 매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각 도시에는 상업 또는 금융의 전당이 있는데, 육체미와 건강미에 대한 심취로 이집트의 기개 어린 조각상과 중국의 심오한 그림에 비해 성숙미가 덜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고전 시대 조각과 건축에 구현된 겸양과 순결, 조화의 교훈은 인류의 소중한 보물이다.

 그리스 문명이 볼테르 이전 어느 세기보다 우리 시대와 더 친수가고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인이 형식만큼이나 이성을 사랑했고 자연의 입장에서 모든 자연을 과감하게 설명할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학에서 과학을 해방하고, 과학적 연구를 독립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그리스 정신에 대한 모험이었다. 그리스 수학자는 삼각법과 미적분법의 기초를 놓고 원뿔 연구를 시자가고 완결시켰으며, 이들이 거둔 입체 기하학의 성과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에 이를때까지 그래도 유지될 만큼 상대적으로 완벽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의 원자론으로 물리학과 화학 전 분야에 빛을 비추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추상적 연구에서 단지 약간의 탈선과 시간만 할애하여 발명사에 최고 명성을 남긴 신기계 장치를 고안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전조가 되었고 아마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히파르코스는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를 통해 천문학 체계를 수립했으며, 이는 문화사에서 있어 한 이정표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를 측량하고 지도로 나타냈다. 아낙사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는 진화론의 개요를 그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는 동물 및 식물의 세계를 분류하고 기상학과 동물학, 발생학, 식물학을 창안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신비주의와 철학 이론에서 의학을 해방하고, 이에 윤리 규범을 덧붙여 품위를 높였다. 헤로필로스와 에라시트라토스는 르네상스 때까지 갈렌리학을 발전시켰다. 우리는 이들 작품에서 항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열정과 신화를 정화시키는 차분한 이성의 숨결을 호흡한다. 이들 걸작은 빠짐없이 소유할 수 있다면, 그리스 과학을 인류의 가장 뛰어난 지적 성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 애호자는 과학과 예술을 그리스 유산의 최고위에 두는 것이 그다지 마음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과학 자체는 전설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며 수 세기 간 과학과 철학을 하나의 탐구 여정 안에 묶은 패기만만한 탐구 열정인 그리스 철학의 소산이었다. 그렇게 비평적으로, 그렇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자연을 탐구한 이들은 또다시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세계는 질서 잡힌 우주이으므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세계에 불명예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완벽한 조각상을 창작할 때와 동일한 정신으로 논리를 궁구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화와 통일, 형식, 균형은 논리의 예술과 예술의 논리를 제공했다. 모든 사실과 이론에 호기심을 가진 그들은 철학을 유럽 정신에 고유한 진취성의 표상으로 세웠으며, 모든 체계와 가설을 검토하고, 우리 삶의 주요 문제에 있어 언급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사실주의와 유명론,관념론과 유물론,일신론, 범신론, 무신론, 여권주의, 공산주의, 칸트의 비판과 쇼펜하우어의 절망, 루소의 원시주의와 니체의 배덕주의,스펜서의 통합과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등 철학의 모든 꿈과 지혜가 여기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땅에 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철학의 모든 꿈과 지혜가 여기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땅에 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철학을 말만 할뿐 아니라 그렇게 살았다.

 그리스인의 삶과 정점과 이상은 전사나 성인 아니라 바로 현안에 있었던 것이다. 원기를 돋우는 철학 유산은 로마 황제, 그리스도교 교부, 스콜라 신학자, 르네상스 이단자들, 케임브리지 대학의 플라톤주의자들,계몽주의 반도들 그리고 오늘날의 철학 신봉자들에 이르기까지 탈레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세기에 걸쳐 우리들에게 전해져 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정에 불타는 수많은 영혼들이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플라톤을 읽고 있다.

  문명은 죽지 않았다. 단지 이동할 뿐이다. 거처와 복장은 바뀔지라도 계속 생존한다. 개인처럼 한 문명의 쇠퇴도 또 다른 성장을 위한 여지를 남긴다. 생명은 옛 허물을 벗고 새로운 젊음으로 솟아 올라 죽음을 당황케한다. 그리스 문명은 우리 정신이 숨 쉬는 모든 호흡 속에 살아 약동하며, 그 누구도 전 생애를 바쳐 섭렵하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물론 무정하고 광기에 찬 전쟁, 요지 부동의 노예제도,예속된 여권,도덕성의 결여, 타락한 개인주의, 자유와 질서 및 평화를 조화시켜려 애쓴 노력의 비극적 실패 등 결합도 있다. 그러나 자유와 이성,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이라면 이들 오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소란한 정쟁 배후에 있는 솔론과 소크라테스,플라톤과 에우리페데스,페이디아스와 프락시텔레스,에피쿠로스와 아르키메데스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이들의 존재에 감사하고 시대의 간극을 넘어 이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를 동이란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우리 시대 우리의 자양분이기도 한 이 서구 문명의 찬란한 아침으로 기억할 것이다.

                                                                         

                                                                                                                                                                     윌 듀런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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