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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3-2 -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ㅣ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3
윌 듀런트 지음, 임웅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문명이야기 3-2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카이사르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그 동안 궁금했던 내용이 어느 정도 해결해 준 책이다. 로마의 부흥과 몰락은 A.J 토인비가 말해주는 문명의 부흥과 쇠퇴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역사이다. 또 주목해야할 점은 인간 예수에 대한 역사학자로서 날까로운 분석을 볼수가 있다. 로마의 역사에 인간 그리스도의 태생과 깨달음의 경로를 목도할수 있다.
윌 듀런트의 마치는 글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1.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우리 시대의 어느 뛰어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두 가지 가장 큰 문제는 로마의 등장과 멸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로마의 등장처럼 로마의 멸망에도 하나가 아닌 여러 원인이 있었으며, 로마의 멸망이 하나의 사건이 아닌 300년 넘게 걸쳐 있는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로마의 등장과 멸망에 대한 이해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국가들은 로마의 멸망만큼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다.
위대한 문명의 경우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할 때까지는 외부로부터 정복되지 않는다. 로마 쇠퇴의 주요 원인은 로마의 민족,도덕, 계층 간의 싸움, 쇠퇴해가는 교역, 관료적 전제성, 질식할 것 같은 세금, 그리고 기진맥진케하는 전쟁에 있었다. 그리스도교도 저술가들은 이러한 쇠퇴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200년경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마도 이교 세계의 멸망에 대한 전주곡으로서 무나 그대로 한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다. 250년경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들이 제국이 겪는 불행의 근원이라는 비난에 답하면서 이러한 불행을 자연적인 탓으로 돌렸다.
' 세상은 나이가 들고 변함없이 예전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쇠퇴를 입증합니다. 강수량과 햇빛의 따듯함 둘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속은 거의 고갈되고 있습니다. 농부는 경작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야만족은 침입, 그리고 수 세기에 걸친 풍요한 광맥의 채굴이 로마의 귀금속 공급량을 낮춘 것이 틀림이 없다.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삼림 파괴와 침식, 그리고 감소하는 소농 계층과 어수선한 당국의 용수로 방치가 이탈리아를 전보다도 더 빈곤한 상태로 빠뜨렸다. 하지만 원인은 타고난 토양의 고갈과 기후의 변화가 아니라,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의 태만과 불임이었다.
생물학적 요인들이 더 근본적이었다. 하드리아누스 이후 서방에서 심각한 인구 감소가 나타난다. 인구 감소는 의심되었지만, 아우렐리우스,발렌티나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야만족이 제죽에 유입되면서 인구 감소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자신의 군대를 보충하기 위해 아울레리우스는 노예,검투사, 치안대, 죄수를 병적에 올렸다. 예전보다 위기가 더 심화되었거나, 아니면 자유민 인구가 감소했다. 게다가 노예 인구는 확실히 감소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너무나 많은 농장이 버려졌으므로 페르티낙스는 버려진 농장을 경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무료로 제공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법령은 일손 부족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에서 인구 감소가 수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디오니시오스 주교는 당시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추산했다. 그는 "인류가 감소하고 끊임없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한탄했다. 제국 외부와 내부에서 야만족과 동방인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러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는가? 무엇보다도 산아 제한이, 이제는 다산으로 잘 알려진 빈곤층까지 침투하였다. 서기 100년경 산아 제한은 농촌 출신을 원하기 위한 황제의 급양 계획에서 알수 있듯이 농민에게까지 미쳤다. 3세기경 산아 제한은 서방 속주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으며, 갈리아에서 인력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었다. 비록 범죄로 낙인찍혔지만 유아 살해는 빈곤이 늘어나면서 빈번해졌다. 성적 무절제가 인간의 생식력을 감소시켰을지도 모른다. 결혼 회피나 연기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동바의 관습이 서방으로 유입되면서 환관 만들기가 증가했다. 친위대장 플라티아누스는 백명의 소년을 거세시킨 다음 딸의 결혼 선물로 주었다.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 산아 제한에 버금가는 것이 전염병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 손실, 혁명, 전쟁이었다. 생명의 위험을 수반할 정도의 전여명으로 아우렐리우스, 갈리에누스, 콘스탄디누스 치하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260년~265년에 제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 전염병이 습격했다. 로마에서 몇 주 동안 매일 5000명이 죽어 나갔다고 전해진다. 캄파니아 평원의 모기들이 폰티노 습지에 대한 인간 침입자에게 맞선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말라리아가 라티움과 투스카니에서 부자와 빈민의 원기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 대량 학살과 피임, 낙태, 그리고 유아 살해가 숫자상으로뿐 아니라 비우생학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즉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가장 늦게 결혼했고, 가장 적게 낳았으며,가장 빨리 죽었다. 자선이 빈민을 약화시키고 사치는 부자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가 이탈리아 북부에 살면서 군대를 보충하던 게르만인이 살아남은 토착 민족보다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했다. 만약 시간이 여유있는 동화를 허용했더라면, 게르만인은 고전 문화를 흡수하고 이탈리아의 혈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탈리아 주민들은 오래전에 로마 민족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했다고는 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열등하던 동방 민족과 섞였다.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가는 게르만인은 고전 문화를 이해할수 없었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전달하지도 않았다. 빠르게 증가해 가는 동방민들은 대체로 고전 문화를 파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전 문화를 소유한 로마인들은 고전 문화를 희생해 불임을 위안받았다. 로마는 외부에서 야만족 침입이 아닌 내부에서의 야만족 증가로 정복되었다.
도덕의 쇠퇴가 제국 해체에 기여했다. 끈질긴 소박함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앙으로 형성되던 남성적인 기지이 부의 햇살과 불신의 자유로 느슨해졌다. 이제 중산층과 상층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갈 정도의 재력을 갖추었다. 도시의 인구 밀집은 접촉을 증가시켰고 감시를 좌절시켰다. 이주로 인해 여러 문화가 합쳐졌으며 문화들의 차이는 무관심으로 사라져 버렸다. 도덕과 미의 기준이 대중의 자력에 의해 낮추어졌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쇠퇴하는 동안 성이 활개를 쳤다.
어느 위대한 역사가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멸망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로마인에게 도덕적 기질을, 그리고 로마 국가에 안정을 가져다주던 옛 신앙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고전 문화,즉 과학,철학,문학,미술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인의 삶에서 허약한 동방의 신비주의를 현실적인 스토아주의 상태에 이르게 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의 생각을 현세의 과업에서 우주의 재난에 대한 대비한 무기력한 준비로 바꾸어 놓았으며, 국가에 대한 헌신을 통한 집단적인 구원보다는 오히려 고행과 기도를 통한 개인적 구원을 찾도록 유도했다. 그리스도교는 군인 황제들이 지키려고 노력했던 제국의 통일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관직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거나 병역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제국의 생존이 전쟁을 필요로 했을 때, 그리스도교는 무저항의 윤리를 설교했다.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곧 로마으 멸망이었다.
이렇듯 격렬한 비난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본의 아니게 교의 대혼란을 함께했으며,이것은 도덕규범을 뒤범벅으로 만들어 로마의 붕괴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장은 로마 쇠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다. 구 종교의 해체는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기 오랜전에 시작되었다. 엔니우스와 루크레티우스 이후의 어떤 이교도 작가보다 이 둘이 구 종교에 대해 더 강려간 공격을 가했다. 도덕의 붕괴가 로마의 그리스 정복으로 시작되었고, 네로 치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 후 로마의 도덕은 개선되었으며, 로마인의 생활에 끼치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대부분 건전했다.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은 로마가 이미 사멸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그들에게 냉담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빈곤에 맞서 부를 옹호하고, 노예를 손에 넣기 위해 싸우며, 사치를 지원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과세하고, 기아, 전염병, 침입, 빈곤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해 주지 못 했으므로 국가에 대한 믿음을 철회했다. 사람들은 용서받기 위해 전쟁을 설교하는 카이사르로부터 평화를 설교하는 그리스도에게로, 터무니없는 잔혹함으로부터 전례없는 관용으로,희망이나 위엄없는 삶으로부터 빈곤을 위로하고 인간애를 명예롭게 여기는 신앙으로 돌아섰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지 않았듯이, 그리스도교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야만족이 침입했을 때, 로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로마쇠퇴의 경제적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을 이해하는데 필수 조건으로 이미 언급한바 있다. 로마 쇠퇴의 경제적 원인으로 속주 곡물에 대한 불안정한 의존, 노예 공급과 노예제 대농장의 실패, 운송의 악화와 교역의 위험,속주의 경쟁에 따른 속주 시장의 상실, 이탈리아의 수입에 상응하는 이탈리아 수출 제조업의 무기력과 그로 인한 동방으로의 귀금속 유출, 부자와 빈민사이의 파괴적인 싸움, 군대, 자선, 공공 토목 공사, 확대해 가는 관료정, 그리고 여기에 기생하는 궁정의 비용 증가, 통화 가치의 저하, 능력 발휘의 좌절, 가혹한 과세에 의한 투자 자본의 흡수, 자본과 노동력의 유출, 농업에 기반한 농노제와 제조업에 의한 투자 자본의 흡수, 자본과 노동력의 유출, 농업에 기반한 농노제와 제조업에 강제된 폐쇄적 계급제도와 구속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로마의 권력이 경제적 사망 선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정치적 허깨비에 불과할 때까지 이탈리아의 물질적 삶의 기반이 서서히 약화되었다.
로마 쇠퇴의 정치적 원인은 하나의 사실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즉 점점 증가하는 전제정이 시민 의식을 파괴했고, 그것의 근저에 자리 잡고 정치적 수완을 고갈시켰다.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데 무능했던 로마인은 통치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일,오락,군단,아니면 개인적 구원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때 결합되었던 애국심과 이교가 이제 함께 쇠퇴했다. 페르티낙스 이후에 훨씬 더 많은 권려과 위엄을 상실한 원로원은 나태함, 아첨, 아니면 금품 수수에 빠져들어 군국주의와 무정부 상태로부터 국가를 구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방벽이 무너졌다. 황제의 검열관과 세금 징수원들에 의해 황폐화된 지방의 통치 조직은 더 이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관할 구역에서 할당받은 세금에 대한 시 관리들의 책임, 그들의 무급명예에 대한 비용 증가, 납구금, 공공 봉사,기부, 그들에게 기대되는 경기,침입과 계층간의 싸움에 따르기 마련인 위험이 세금, 작업장, 그리고 농장으로부터의 도망에 상응해 관직으로부터의 도피를 초래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범주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부적격자로 만들었다. 일부는 다른 도시로 도망했고, 일부는 농부가 되거나 수도사가 되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아스는 이교도 성직자들이 전통적으로 누려 오던 시관직과 각종 세금으로부터의 면제를 그리스도교 성직자에게 확대되었다. 교회는 곧 성직 안수를 위한 지원자들로 넘쳐났으며, 도시들은 세입과 원로원의원들의 상실에 불평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시관리에 임용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사제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해야만 했다. 제국 치안대가 세금이나 징병 회피자들을 뒤쫓던 것처럼 정치적 명예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추적했다. 제국 치안대는 그들을 도시로 다시 데려와 복무하도록 강제했으며, 결국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아야 하고, 지위에 의해 선출된 자격이 있다면 선출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관직의 예속이 경제적인 폐쇄적 계급 제도라는 감옥을 완성했다.
원로원의 반란을 두려워한 갈리에누스는 군대에서 원로원 의원들을 배제했다. 군대 인제가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늘어나지 않았으므로, 갈리에누스의 이러한 조치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군의 쇠퇴가 완료되었다. 속주 군대와 용병 군대의 성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위대 폐지,속주민 장군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의 제위 찬타이 서방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오래전에 이탈리아의 지도력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독립마저 파괴했다. 로마의 군대는 더 이상 로마인의 군대가 아니였다. 로마의 군대는 대부분이 야민족인 주로 속주민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단과 집이 아닌 급료와 기증품과 약탈품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은 부자와 도시를 빈민과 농촌의 착취자로 증오하던 소농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내란으로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들은 야만족이 파괴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도시를 약탈했다. 군사 문제가 국내 문제보다 더 중요해졌을 때, 국경 근처의 도시들이 통치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개선식을 위한 무대이자 황제 건축의 명소, 그리고 군대의 정치적 유물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 되었다. 수도의 증가와 권력의 분할은 행정의 통일을 파괴했다. 정치가들이 통치하기에 또는 군대가 방어하기에 지나치게 거대해져 버린 제국이 붕괴를 시작했다. 게르만족과 스코트족에 맞서 아무런 지원없이 스스로 방어하도록 남겨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는 직접 자신들의 황제를 선출해 통치자로 만들었다. 팔미라가 제노비아 치하에서 분리 독립했으며, 곧 스페인과 아프리카가 저항도 하지 못할 만큼 야만족의 정복에 굴복할 것이다. 갈리에누스 치세에 서른명의 장군이 실제로 중앙권력으로부터 제국에 속한 서른 곳의 지역을 통치했다. 한 거대한 국가를 산산 조각내 버린 이 끔직한 드라마에서 내부의 원인은 미지의 주인공들이었다. 야만족은 단지 약점이 드러난 곳으로, 그리고 생물학적,도덕적,경제적,정치적 수완의 실패로 혼란과 낙담과 쇠퇴의 상태로 방치되어 버린 곳으로 침입했을 뿐이다.
외부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북 아시아의 훈족과 팽창과 이동으로 앞당겨졌다. 중국 군대와 만리장성 때문에 동쪽으로의 진격에서 패한 흉노족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서기 355년경에는 볼가 강과 옥소스 강에 도달했다. 그들의 압박을 받은 러시아의 사르마티아인들이 발칸 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고트족이 로마 국경으로 재차 이동했다. 그들은 다뉴브강을 지나 모에시아의 정착하도록 허락받았다. 그곳에서 로마 관리들의 학대를 받던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아드리아노플에서 대규모 로마 군대를 무찔렀으며,잠시 콘스탄노플을 위협했다. 400년전에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왔으며, 410년에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429년에 가이세리크가 반달족을 이끌고 스페인과 아프리카를 정복했고 472년에 판노니아의 장군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아들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는 이름의 황제로 만들었다. 4년 뒤에 로마 군대를 장악한 야만족 용병들이 "작은 아우구스투스"를 폐위하고,그들의 지도자 오도아케르 이탈리아의 왕으로 불렸다.오도아케르는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 지배권을 인정했으며, 로마 황제에 의해 신하의 지위를 가진 왕으로 받아들이여졌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2.로마의 성취
로마의 오랜 생존보다 로마의 멸망을 설명하는 것이 더 쉽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손에 넣어 그 문화를 채택했고, 그것에 200년 동안 질서와 번영과 평화를 부여했으며, 2세기 동안 야만의 물결을 더 억제했고, 멸망하기 전까지 서방에 고전 유산을 물려주었다. 이것이 로마가 이룬 성취의 본질이다.
통치 기술에서 로마에 견줄 만한 적수는 없었다. 로마는 수많은 정치적 범죄를 저질렸으며, 이기적인 과두정과 반 계몽주의적 사제직위에 국가 조직을 세웠다.로마는 자유민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다음 부패와 폭력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로마에 기생하는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정복을 이용했다. 그리고 로마는 로마에 기생하는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정복을 이용했다. 로마가 더 이상 정복을 이용할수 없을 때, 이탈리아는 붕괴했다. 동로마와 서로마 이곳저곳에 로마는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 모든 악에 둘러 싸인 로마는 법률 제정 10대관으로부터 나폴레옹까지 거의 유럽 전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제조업에 자극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위대한 법체계를 만들어 냈다. 로마는 입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된 정체를 만들었으며, 입법권과 행정권의 견제와 균형은 혁명적인 미국과 프랑스의 헌법 제정자들에게 영감을 주웠다. 잠시 로마는 철학자,귀족정, 민주정을 결합했다. 로마는 500개의 도시에 오랜 기간 동안 자유를 부여했다.로마는 처음에는 탐욕과잔혹감으로 그 다음에는 위대한 왕국이 결코 다시는 비슷한 내용을 알지 못했을 정도의 관용과 절대적인 공정함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힘든 일은 무질서한 세계에 로마의 평화가 되살아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로마는 견줄수 없는 탁원한 뼈대 안에, 기원은 그리스적이고 응용과 결과는 로마적인 문화를 만들었다. 로마는 통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가 했던 것처럼 지성의 영역에 풍부한 성과를 이루어 낼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와 이집트, 그리스와 동방에서 받아들인 기술적,지적,예술적 유산을 감사해 하며 흡수하고 고집스럽게 보존했다. 로마는 과학에서의 진보와 제조업에서의 기계 개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안전한 바다위에서 행해지는 교역과 활기 넘치는 생활의 동맥이 되어 준 탄탄한 도로망으로 세상을 부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로와 수많은 교량을 통해 고대의 경작 기술과 수공예 기술, 예술의 기교, 기념비적인 건축 과학, 금융과 투자 기법, 의료와 군 병원 조직, 도시의 위생, 서방에서 새롭게 뿌리내리기 위해 동방에서 가져온 다양한 과일과 견과류 나무, 그리고 농업 작물이나 관상용 식물등이 중세와 근대 세계로 건너갔다. 심지어 중앙난방의 비밀까지 따듯한 남쪽에서 차가운 북쪽으로 전해졌다. 남쪽은 문명을 창조했고, 북쪽은 문명을 정복하고 파괴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차용했다.
로마는 교육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규모로 발전시켰고, 국가가 교육을 지원했으며, 오늘날의 젊은이에게까지 지속되는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로마는 아치와 둥근 천장과 돔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대담하게, 그리고 웅장하게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일부 분야에서 로마의 건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중세 성당의 모든 건축 원리가 로마의 바실리카에서 준비되었다. 로마는 조작으로 된 초상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초상을 이상화하는 그리스인들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실제적인 힘을 부여했다. 로마는 철학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루크레티우스와 세네카에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 가장 완성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로마는 문학의 유형, 심지어 풍자 문학마저 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웅변술, 에세이, 산문체에 대한 키케로의 영향력을, 단테와 타소, 밀턴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영향력을.....역사 서술에 대한 리비우스와 타키투스의 영향력을, 드라이든과 스위프트, 포프에 대한 호라티우스와 에우베날리스의 영향력을 충분하게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로마의 언어는 매우 뛰어난 어형 변화를 통해 이탈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언어가 되었다. 백인 세계의 절반이 라틴어를 말한다. 18세기까지 라틴언는 서방에서 과학, 학문, 철학의 국제어였다. 더욱이 라틴어는 식물학과 동물학에 편리한 국제적 전문 용어를 제공했다. 라틴어는 로마 교회의 격조 높은 전례와 공식 문서에서 살아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의료 처방전에 사용되고 법률 용어에 자주 등장한다. 라틴어는 직접적인 도용으로, 그리고 다시 로맨스어를 통해 영어 연설의 풍부함과 유연성을 강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우리의 로마유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리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정복했을 때 이교 집단의 조직, 대제사장의 칭호와 의복, 대지의 신과 위안을 주는 수많은 신들에 대한 숭배,도처에 존재하는 초감각적인 실재에 대한 관념, 옛 축제의 즐거움과 장엄함, 그리고 먼 옛날 의식의 화려한 구경거리가 어머니의 피처럼 새로운 종교로 옮겨 갔으며, 포로가 된 로마가 정복자인 그리스도교를 점령했다. 통치의 수단과 기술이 사멸해 가는 제국을 통해 교황권으로 전해졌다. 부러진 칼의 잃어버린 힘을 위안을 주는 말의 마법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국가의 군대가 로마의 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이동하는 교회의 전도사들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속주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로마의 권위는 르네상스로 고전 문화가 부활하는 것처럼 보일때까지. 그리고 영원의 도시 로마가 한번 더 세상의 삶과 부, 그리고 예술의 중심이자 정상을 차지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로마 건국 2689주년을 기념하는 1936년에 로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통치와 문명의 연속성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로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 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윌 듀런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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