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야기 4-2 - 신앙의 시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4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박혜원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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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야기 4-2 이 책들을 읽은지가 1달 보름정도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나의 지식과 지성의 확장이라는 놀라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벤트와 인물들을 의미하는데 1달 보름이라는 시간이 아주 먼지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읽음으로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데 의미가 있는것 같다. 거두절미하고 윌 듀런트 작가의 마친글을 적고자 한다.

중세 시대의 유산

 여기저기 돌아가며 길게 이루어진 우리 이야기가  이렇게 단테를 끝으로 마무리된다는 건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다.  단테가 죽은 바로 그 세기부터, 웅장하게 있던 신앙을 비롯해 자신이 가슴이 간직해 온 희망까지 산산히 깨부수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러게 해서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 개혁의 필두에 섰고 ,죠토,크리스솔라스,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본격적으로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렸다. 인간은 수도 많고 종류도 참 다양한데, 그 역사를 보면 몇몇 사람 혹은 어떤 장소에는 한가지의 특정 사조가 줄기차게 살아남는 걸 볼수가 있다. 다른 이들이나 나라는 이미 그 사조를 구식 취급한지 오랜인 때에 말이다. 유럽의 경우, 신앙의 시대에 마지막 꽃송이를 활짝 피워 낸 이는 단테였다. 그러다 이후14세기에 들면서는 오캄을 만나 " 면도날"에 치명상을 입게 되고 그렇게 상처를 입은 몸으로 브루노와 갈리레오,테카드트와 스피노자,성의 시대가 참극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때에 신앙의 시대가 다시 막을 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서유럽이 까마득하게 펼쳐진 이성의 바다를 헤쳐 가는 동안에도,세상에는 여전히 신앙의 기치와 지배 아래 살고 있는 곳들이 수두룩했다. 서유럽의 경우 신앙의 시대는 콜럼버스와 함께 막을 내려야 옳지만,러시아에서는 표트로 대제 시대까지가 중세이며, 인도는 우리가 사는 오늘까지도 중세에 있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로마제국이 서양에서 몰락한 때부터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까지의 사이에 낀 별 볼일 없는 시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아벨라르의 추종자들도 자기네들을 이른바 "현대인'이라 칭했었고, 액서터의 주교 역시 1287년에 자기가 살던 시대를 "현대"로 명명한바 있다는 것이다. "중세"와 "현대"를 가르는 경계는 언제나 앞으로 밀려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야 지금이 현대이지만 ,언제가 보다 청정한 연료를 쓰고 보다 품위있는 삶을 살게 되는때에는 석탄과 석유를 때면서 숯검정의 허름한 집에 사는 오늘이 중세로 취급받을지 모를 일이다. 중세 시대는 결코 한 문명이 다른 문명으로 넘어가면서 거치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수용되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을 중세의 시작으로 잡는다면, 중세는 실로 긴 시간을 포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달을 거듭해 13세기에 하나의 온전하고 풍성한 문명으로 성숙하기까지의 과정, 나아가  그 문명이 다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라는 상반되는 문화로 쪼개지는 과정까지도 모두 중세를 들어간다. 이런 중세에 대해 우리가 깔보는 듯한 태도르 취하는 것은 전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중세에는 남녀 모두에게서 위대한 인물들이 수도없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야만성이 모든 것을 짓밟아 놓은 그 폐허 속에서 교황제도며, 유럽의 근대 국가, 그리고 중세만이 힘들어 얻어 낼수 있던 그 소중한 유산들이 이룩되었으니까.

 물론 그 유산중에도 훌륭한 것도 있지만 몹쓸것도 없지 않다. 더구나 암흑시대의 병폐는 아직도 우리에게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이다. 여전히 우리 주위엔 아직도 우리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이다. 여전히 우리엔 불안이 살아 남은 탐옥은 부추기고 있고, 두려움은 잔혹의 자양분이 돼 주고 있으며, 빈곤에서는 불결과 무지가 잉태돼 나오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불결은 다시 질병을 만들어 내고, 무지는 또 맹신,미신, 주술을 낳고 있다. 여기다 교조주의는 이단 불용과 종교 재판이라는 악습을 만들고야 마니, 그것이 언제 다시 우리 곁에 나타나 사람드를 억압하고, 그 재산과 목숨을  앗고, 또 파멸시킬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따지면 중세의 정신은 여전히 곳곳에 숨어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 슬쩍 망토만 걸치고는 그것을 현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느 세대건 문명을  만들어 내는 건 어디가에서 피땀을 흘리는 소수이다. 그들로서는 문명이라는 곧 특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 들이기는 버거운 의무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해 종교 재판은 유럽 사회에 돌이키지 못할 악페를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이성의 모험길에 올라 있던 사람들을 겁주어 다시 조용히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앙의 시대가 낳은 유산 중 가장 빼어난 것 하면 역시 종교이다. 18세기까지 탈무드를 통해 그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유대교가 그렇고, 12세기에 코란이 철학을 이긴 이래로 비교적 잠잠하게 지내 온 이슬람교가 또 그렇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우에는 세계를 동서와 남북으로 갈라 놓은 면이 없지 않지만, 아직도 백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종교로 꼽히고 있다. 중세 교회가 만들어 놓은 교리를 오늘날까지(1950년) 소중하게 받드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아서, 그 숫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만 3억 3000만명, 그리스 정교회에만 1억 2800만명에 이른다. 또 논쟁에서는 번번이 결실을 거두지 못 했어도,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례만큼은 여전히 사람들의 영혼에 적잖은 감동을 주고 있다. 나아가 이제까지 교회는 교육 및 자선 사업, 그리고 야만인을 윤리적 인간으로 길들이는 데 여러가지 역활들을 해 왔고, 이는 현대 사회가 사회질서와 윤리 기강을 바로잡는 데에도 소중한 밑거름이 돼 주고 있다. 교황이 품었던 하나 된 유럽이라는 이상은 제국과 교황권이 맞붙어 싸우는 동안 어느 정도 빛이 바래긴 했으나,여전히 세대를 막론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설레는 꿈으로 남아있다. 제각각의 주권국들이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보다는 온 세계가 하나의 윤리적 질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염원속에서.

 교황의 이 꿈이 확실히 수포로 돌아가고 나서부터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별 변화없이 이어 오고 있다. 근대 민족 국가의 원리가 생겨나 현대 정치사를 써내려 갈 채비를 시작한것도 이즘부터였다. 한편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사이 중세의 지성은 위대한 제도로 많이 탄생시켜 놓았으니, 시민법 및 교회법,해상법및 상법, 지방 자치 규약, 배심 제도및 인신 보호법, 귀족의 대헌장 등이 그렇다. 또 중세의 궁궐과 교황청의 통치방식은 각 나라들 및 교회에 하나의 본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실제적으로 통치에 활용되고 있다. 스페이, 아일랜드, 프랑스, 잉글랜드 같은 경우에는 의회 기능을 가진 기구가 성립되면서 이른바 대의 정치라는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위대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의 유산이었다. 중세 시대에 들면서 인간은 비로소 황무지를 정복해 낼수 있었고,숲,정글,늪지,바다를 상대로 대전을 펼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세에는 서유럽 땅 대부분에서 노예제를 종식시켜 버렸고, 그것은 농노제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또 중세 시대에는 생산 활동이 길드를 중심으로 조직화될 수 있었으니, 무책임한 개인과 독재 국가 사이의 중도라는 점에서 이는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이 이상적인 경제 활동 방식의 하나로 꼽는다.  재단사와 제화공의 경우에는 극히 최근까지만해도 개인 작업실에서 수공업을 하는 형태였는데 중세 시대의 방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대규모 생산 공정 및 자본주의 조직에 예속된 것은 극히 최근 들어 우리 눈앞에서 진행된 일이다. 오늘날에도 대도시에서는 대박람회가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며 물품이 한자리에 모이고 하는데, 이 역시 중세 시대 상업이 물려준 유산이며, 오늘날 우리가 독점을 규제하고 가격 및 임금을 일정하게 조절하려고 하는 관행 역시 중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금융업 같은 경우는 심지어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형제회나 비밀 결사 조직도 그 뿌리 및 의례는 중세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세의 윤리는 애초 야만성을 모태로 태어나더니 자신의 후사로서는 기사도 정신을 낳아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사의 개념은 중세때에 만들어 졌다고 봐야한다. 중세 때 생겨난 이 기사도 정신은, 그 실천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인간 영혼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상의 하나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시절 유럽남자들의 행동에 전에 없는 온화함이 배어들게 된 것은 아마도 마리아 숭배가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가 끝나고 몇 백년 동안 중세의 윤리에서 우리가 진보한 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가족을 화합시키고, 윤리 교육을 중시했으며, 명예와 예의라는 습관을 더디게나마 널리 전파시킨 중세의 토대가 있었기데 가능했다. 오늘날 회의론자들이 이 나마 윤리저긴 삶을 유지해 가는 것이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빨아들였던 윤리가 자기도 모르게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것처럼.

 중세 시대의 지적 유산은 그리스 시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편이고 그 마저 고대에서 비롯된 수백 가지의 잘못된 미션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그렇다고는 해도 현대의 각종 언어를 비롯해, 곳곳의 대학들, 철학 및 과학의 용어들이 중세 시대의 만들어진 지적 유산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콜라 철학의 경우는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적 성휘였다기보다 논리를 갈고닦기 위해 거쳐야했던 일종의 훈련 과정이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오늘날에도 수많은 대학들에서는 그러한 스콜라주의가 여전히 위세를 덜치고 있지만, 한편 중세 신앙이 품었던 제반 가정들은 역사 기록학이 발전하는데에는  걸림돌이 작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세계는 물론 인간의 기원 및 운명에 관해서 자신들이 잘 안다고 믿었고, 그래서 역사는 수도원 연대기의 벽속에 꼼짝없이 가둬 놓은 채 그런 믿음들을 바탕으로 신화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얼키설키 지어내곤 했다. 물론 이런 중세의 역사가라고 해서 발전이나 진보에 대해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건 당치 않다. 19세기에도 그러했듯,13세기에는 그저 자기 대에 이룩된 성취가 무엇보다 대단하게 여겨졌던 것일 뿐이리라, 한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알고보면 중세는 그렇게 정적인 시대도 아니었다. 원래 멀찍이서는 활발한 움직임도 둔해 보이고, 두드러진 차이점도 흐려 보이며, 현격한 변화도 멈춘 듯 보이는 법이니까, 오히려 당시에도 예법과 복식, 언어와 사상, 법률과 통치, 상업과 재무,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는 오늘날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중세의 사상가들은 목적의 발전을 중용시했고, 따라서 그에 수반되는 수단과  진보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분별없이 떠드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세가 남긴 과학적 유산은 확실히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얼마간의 성과에 인도 숫자, 십진법,실험 과학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세에도 수학,기하학, 천문학, 광학 방면에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또 화약에 대한 발견이 이뤄지는가 하면, 안경, 선박용 나침반, 전자시계가 발명돼 나왔고, 어쩌면 인간 삶에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일지 모를 알코올 증류법도 발달돼 나왔다.

 또 이 시절에는 아랍인 및 유대인 의사들의 손에 의해 그리스 의학이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외과술은 그리스도교 개척자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이발업의 영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오늘날 유럽에 세워져 있는 병원의 절반은 중세 시대 때 그 토대가 세워진 것이거나, 아니면 중세에 이루었던 성취를 현대 들어 다시 복원한 경우에 해당한다. 현대의 과학은 중세 세상이 표방했던 세계주의를 계승한 건 물론, 그것이 썼던 국제 언어까지도 일부 계승해 오고 있다.

 우리가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윤리 규범 다음으로 풍성한 양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물론 장엄한 면에서 보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샤르트 성당에 못지 않다. 하지만 전자의 위용은 오로지 건축 한 면에서만 찾아지니, 순전히 기능적인 선들만 사용해 그토록 어마어마한 높이의 건물을 안정적으로 지어 올렸다는 점에서는 대단하다. 하지만 고딕양식 성당들의 삶에는 건축은 물론 조각,회화,시,음악도 늘 함께했다. 그래서 샤르트르 성당, 아미앵 성당, 랭스 성당, 노트르담 성당은 감각 및 영적인 조화미 속에서 규모와 깊이를 이루고 그 내용과 장식에 있어서도 풍성함과 다양함을 갖추고 있어서이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순간도 지루할 틈없이 영혼 구석 구석이 보다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성당들에 자리한 입구며, 종탑, 첨탑들, 하늘로 날아 오를 듯한 석재 궁륭,성심성의껏 조작된 갖가지 조각상, 제단, 세례반, 묘비들, 그리고 무지개와 햇빛을 무색하게 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창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시대가 신앙의 상징이나 수공예를 너무 사랑하는 면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들 상당 부분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어야 할것만 같다. 중세에 다성 음악 이 발달 할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성당들 덕분이었으며, 기보법 및 보표가 발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극형식 역시 애초 탄생의 기원은 교회에 있다.

 중세가 문학에 남겨 놓은 유산은 그리스 문학과는 질적인 면에서 감히 상대가 안 되지만, 그래도 로마 문학과는 어느 정도 어깨를 견줄만하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 페트라르카는 호라티우스와 쌍벽을 이루고 ,아랍인과 트루바두르들이 지은 연애시는 오비디우스,티블루스,프로페르티우스의 시들에 버금간다. 아서 왕 전설 속 사랑 이야기는 그 깊이나 숭고함에 있어 [변신 이야기]나 [여인들의 편지]속 어떤 일화보다 나으며,우아함에서도 그에 못지 않다. 여기 더해 중세 시대의 주요 찬송가들은 그 가사가 아름담기가 로마 시대 최고의 시들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중세의 13세는 아우구스투스나 레오 10세의 치세에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 지적 활동 및 예술 활동이 이만큼이나 다채롭게 활짝 꽃핀 시기는 역사의 어느 대목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이때에는 15세기 말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상업 확장도 거침없이 이루어져 덕분에 세상은 전에 없이 넓어지고, 풍성해지고 , 활기찰 수 있었다. 또 인노켄티우스 3세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 이르기까지 강한 힘을 가진 교황들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백년의 시간 동안 교회는 유럽의 질서 및 법률을 관장하는 최정상상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갖은 역경을 딛고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한편에서는 탁발 수도회가 만들어져 수도원 본연을 이상을 회복시켰다. 필립 아우구스투스, 생루이,필립 4세,에드워드 1세,프레데리크 2세, 알폰소 10세와 같은 통치자들은 관습대신 법률로 나라를 통치하여, 중세에 없던 새로운 문명 수준을 백성들이 누릴수 있게 해 주었다. 12세기만 해도 신비주의 경향이 유행했으나 13세기는 그것을 거뜬히 물리치고 철학과 과학을 향해 진격해 갔으니 그 열정과 용기는 르네상스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문학 방면에서는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부터 [신곡]의 구상에 이르기까지 13세기가 실로 "경이의 시절"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 13세기에는 중세 문명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나름의 통일성,완성도 그리고 최상을 형식을 다 같이 갖추게 되었던 듯하다.

 중세를  올바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중세에 대한 부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를 완결 지은 한 과정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탐험만 해도 그렇다. 그 전에도 이미 베네치아,제노바, 마르세유, 바르셀로나, 리스본, 카디즌 같은 곳에서 바다 멀리로까지 길을 닦아 놓은 상인 및 항해사들이 있었고,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이들의 작업을 이어받아 성과를 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도시들을 자부심과 전쟁으로 물들였던 조류 역시 12세깅 유럽을 휘저었던 그 조류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 역시 넘치는 에너지와 활동성으로 시대에 헌신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엔리코 단돌로, 프레데리코 2세, 그레고리우스9세와 헌신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말인 콘도티에 라는 말도 애초 연원은 로베르 키스카르에 있으며, "폭군"이란 말은 중세의 에첼리노와 팔라비치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화가들 역시 치마부에와 두치오가 미리 길을 터 주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그 노정을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들도 그레고리오 성가와 바흐의 음악 사이에서 중도를 택한 것이라 할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단테와 중세 음유 시인들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며, 보카치오는 그 자신이 이탈리아 트루베레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돈키호테]식의 로맨스가 계속 꽃을 피워가지만, 한편에서는 또 중세의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시작한 아서 왕 전설을 멜로리가 마침내 완성해 내기에 이른다. 르네상스의 특징으로 꼽히는 이른바 "문예 부흥"운동은 중세의 여러 학교들에서 이미 시작된 참이었다. 다만 르네상스 문예 부흥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이때에는 라틴어 문학은 물론 그리스 고전 문학까지 부흥이 확대되었다는 것이고, 또 고딕 양식은 거부하는 대신 그리스 예술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도 그리스 예술을 들여온 이들은 이미 있었으니, 니콜로 피사노는 13세기에 이미 그리스 조각상을 작업의 본으로 삼은바있고,크리스솔라스가 그리스와 그리스 고전문학을 이탈리앙 들여왔을 때 중세는 그 뒤로도 아직 백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위세를 떨쳤던 종교는 중세 시대에 곳곳에다 성당을 지어 올리고 찬송가가 만들어 낸 그 종교와 똑같았다. 다만 딱 한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이탈리아 교회가 이탈릴아 지성을 대한 태도였다. 이탈리아 교회는 당대의 문화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탈리아 지성들에게도 중세 대학에서 탄생해 나온 사상의 자유를 상당 부분 보장해 주었다. 거기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도, 일반 백성들의 신앙을 파괴하러 들지만 않는다면, 그들 나름의 학문 연구를 뜻대로 진행해 나갈수  있게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었다.

 종교 개혁이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그 대열에서 빠져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두 나라에서는 13세기의 가톨릭 문화가 곧장 15~16세기의 인문주의로 이어졌고, 그것은 또 다시 17~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북유럽의 국가들의 종교 전쟁에 휩쓸려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도 그 아래쪽 라틴계 민족들은 어느 정도 문화적 우위를 지켜 갈 수 있었으니, 그것은  콜럼버스 이전에 이룩된 지중해 교역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렇 듯 문화적 지속성이 줄기착 이어진 덕분이기도 했다. 이 지속성의 시작은 중세를 거쳐 고대 로마로까지 그 연원이 이어지며,남부 이탈리아를 경유해서는 고전 시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칠리아, 이탈리아,프랑스 등의 그리스 식민지와,그 옛날 로마의 정복지 및 로마화한 프랑스 및 스페인 땅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장대한 문화의 실타래가 하나로 죽 이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포와 아나크레온에서 시작해, 베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단테와 페트라르카, 라블레와 몽테뉴,볼테르와 아나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의 그 끈을 말이다. 신앙의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로 접어듦으로써 이제 우리 앞에는 철부지 어린 아이를 벗어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문화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문화는 고전 시대의 우아함에 야만인의 강인함을 결합시키고, 우리는 이 문며에 무언가를 더 더하진 못할 망정 그 목숨이 꺼지게 손 놓고 있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나의 벗 독자들에게, 또 한번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윌 듀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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