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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으로 있어줘
고니시 마사테루 지음, 김은모 옮김 / 망고 / 2023년 9월
평점 :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게 된 초등학교 교사 '가에데'. 총명한 전직 교장이었지만 현재는 '루이소체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 '히몬야'. 오늘도 가에데는 일상 속 수수께끼를 들고 히몬야를 찾아가고, 히몬야는 담배 한 개비와 함께 미스터리를 해결한다.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제목과 표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설정인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손녀딸 콤비가 등장하는데, 할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가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 추리를 하니 일종의 '안락의자 탐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치매라는 소재 자체가 소설에서 드문 건 결코 아니지만, 보통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정도였어서, 치매에 걸린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은 꽤 독특하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루이소체 치매'를 등장시켜서 환시를 보는 탐정이라는 더욱 독특한 설정이 되었다. 덕분에 치매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손녀가 가져오는 일상적인 -때로는 일상을 조금 벗어난- 사건을 앉은 자리에서 해결하고, 이에 대한 환시를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의 추리를 확인하는(?) 특수 능력을 가진 탐정을 보는 것 같은 유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회색 뇌세포'라는 말이 있잖니." (중략)
"그렇게 따지면 나는 진한 오렌지색 루이소체가 뇌 표면에 퍼져 있으니,
'진홍색 뇌세포'의 소유자인 셈이야."
'중고책을 샀는데 그 안에 그 중고책 작가의 '부고' 기사가 네 건이나 들어있었다..?' 소설은 정말 일상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너무 소소한 건으로 시작된다. 소설 속 탐정 역인 히몬야는 단순히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일단 가에데에게 그녀의 생각을 말해보도록 하고, 가에데가 생각한 것들이 진실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들려준 후, 이 모든 것들을 납득하게 만드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하나의 사건에 여러 가지 추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흥미롭고, 가에데가 말하는 그녀의 생각들이 보통 우리가 하기 쉬운 발상이라 반갑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고, 무엇보다 같은 정보를 '듣는' 것만으로, 똑같이 그 정보를 '읽는' 독자를 가볍게 능가하는 히몬야의 추리는 감탄 그 자체였다. 과하게 날카로워서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탐정이 아니라 너무 사소해서 놓치기 쉬운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친근한 통찰력을 가진 탐정, 그것도 정말 내 할아버지 같은 탐정이라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다. 뭔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또 마냥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심심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소설은 전혀 다른 통찰력을 가진 탐정 비슷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이쪽은 어딘지 모르게 독특하고, 책 속에서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처럼 괴짜이고,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히몬야, 가에데와는 달리 삐딱한, 굳이 표현하자면 '애증'이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히몬야와 가에데 콤비의 절묘한 조합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삐딱한 남자를 포함해 가에데를 둘러싼(?) 기묘한 삼각관계가 벌어지고, 그러면서 점점 보다 복잡하고 무거운 사건도 발생한다. 가볍고 일상적인 시작을 과하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마냥 가볍게 마무리되지 않는 게 꽤나 돋보인 전개였다.
"전부 다 옛날과 똑같군.
커피 향기가 밴 삼나무 목재 벽에,
또 새로운 수수께끼의 숨결이 스며들려 하고 있어."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책 전개도 매력적이고, 그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과 정말 잘 어울리는 묘사, 혹은 단어 선택'이 자꾸만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톡! 쏘는 맛이 있는 강렬한 재미는 아니지만 조금은 빛이 바래가는 은은한 필름 사진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매력이 있는 책이랄까. 그래서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는 게 즐겁고 유쾌했고, 남은 이야기가 줄어가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이 소설만이 가진 독특한 설정도, 그에 뒤지지 않는 여러 캐릭터들의 매력도 확실해서 시리즈로 꾸준히 이어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려면 히몬야가 언제까지나 '명탐정으로 있어줘'야 가능한 게 아닐까? 책 제목이 이처럼 절묘하게 와닿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