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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끄는 스위치가 필요해
인프제 보라 지음 / 필름(Feelm) / 2024년 1월
평점 :

다른 사람의 생각의 편린을 들여다보는 건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가끔은 나와 너무 비슷한 생각에 공감하기도 하고, 나와 너무 다른 생각에 놀라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생각을 끄는 스위치가 필요해]는 정말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밤, 그 제목을 보고 마음이 끌려서 손에 들게 되었다.

한 2년쯤 전이었던가?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모인 자리가 있었는데, 통성명 후 자연스럽게 받은 첫 질문이 'MBTI가 뭐예요?'였다. 그때는 내 MBTI가 뭔지는 알아도 'E'가 외향형이고 'I'가 내향형이다.. 외에는 의미조차 잘 몰랐던 나는 MBTI가 이 정도였던가? 하고 순수하게 놀랐다. 예전에는 혈액형으로 사람을 나누던 것처럼, 요즘은 MBTI로 사람을 나누는 시대가 되었다.

[생각을 끄는 스위치가 필요해]의 작가는 '인프제 보라' 님으로, 이름부터 MBTI가 들어간다. SNS를 '부캐' 삼아 자신의 속마음을 써 내려가다 이렇게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SNS와 책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SNS는 컷툰 형식으로, 그림 위주로 가볍게 속마음을 풀어냈다면, [생각을 끄는 스위치]는 그림도 있지만 글이 주를 이룬다. 그것도 SNS에 썼던 것보다 길고, 무겁고, 그래서 더 솔직하다.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오는 밤에 가볍게 공감하며 읽다 스르륵.. 잠들 수 있는 책일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오히려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을 끄는 스위치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작가님은 생각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야말로 '에세이' 그 자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그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읽어 내렸고, 얼마쯤은 공감하고 얼마쯤은 갸우뚱.. 하며 읽어나갔다. 아, 생각이 많은 두 사람이 만나니(?)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작가님도 생각이 많아서, 혹은 예민해서 힘든 자신을 풀어낼 곳이 필요해서 부캐를 만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예민함, 혹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슴 깊은 곳에 감추고 살아가고, 한 번쯤 아웃팅하고 싶은 꿈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부캐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인프제 보라 님이 부럽기도 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조금 삐딱하지만 '나만 생각이 많아서 힘든 게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게 잘못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조금은 괜찮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을 끄는 스위치]를 읽으며 공감할 수 있다, 위로받는 것 같다..는 것 외에도 좋았던 건 이 책 속에 담긴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표현들이었다. '생각을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나도 하게 만드는 제목도 그랬고, '말자국', '말걸음'이라는 표현들이 실제로 쓰이는 게 아님에도 그 단어 자체로 와닿았다. 같은 생각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멋진 표현들을 만나는 건 퍽퍽한 건빵을 먹는 것처럼 누군가의 복잡한 생각들에 살짝 지쳤을 때 만나는 별사탕처럼, 묘한 반가움이 되었다.
이 책은 어찌 보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는 '힐링' 같은 느낌의 에세이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데 주변에서 그걸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라며 조금은 투덜거리고, 조금은 변명하는 누군가의 생각을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를 오해하는 것 같다'라며 불안해하거나 불평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을까? 불평은 가져도 이를 드러낼 수 없는 게 '어른의 사정'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나 대신 불평하고 변명한다!고 생각 하면 그 자체로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나 역시 그랬다.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의 스위치는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에 생각의 스위치가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