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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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이미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지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영국의 정치가이자 법학자인 토머스 모어의 저서에서 유래된 유토피아는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의 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이 황폐해져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디스토피아가 있다. 미래 사회를 다룬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간식처럼 소비한 우리 세대에게는 디스토피아라는 단어가 결코 낯설지 않다. 미국의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1993년에 발표한 이 책 역시 기존의 인간이 이룬 체계들이 대부분 무너진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의 화자인 열다섯 살 흑인 소녀 로런은 목사이자 교수인 아버지, 새엄마 코리, 의붓 남동생들과 함께 로블리도라는 지역에 살고 있다. 한때 이곳은 장벽도 없고 초록이 우거진 평화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매일 좀도둑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위험한 동네로 전락하였다. 그마나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부지하며 살 수 있는 장벽 안의 지역들과 다르게 바깥세상은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로런의 가족들과 이웃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대신에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로런의 마음속에는 북쪽으로 간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을 위해 로런은 총을 쏘는 법을 배우고 배낭에 지도를 챙기며 간단하게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로런의 그 계획은 자의적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20277월에 일어난 어떤 사태로 우연히 실행되었다. 파이로 중독자들의 습격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이웃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로런은 몇 안 되는 생존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공개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2024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과연 충격을 받아야 하는가. 겨우 2년 정도 이후 우리가 실제로 맞이하게 될 그 미래가 이 소설에서는 절망과 학살, 차별과 가난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첫 번째 장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장면이 결코 낯설지가 않다. 새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고 최저임금과 환경 및 노동자 보호 관련 법령을 유예한다는 그 부분 말이다. 로런이 살던 로블리도를 비롯해 장벽이 세워진 소설 속 묘사 역시 우리가 몇 년 전 미국에서 목격했던 일들이다.

 


2006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함께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현실을 담아낸 것이다.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작가의 이 작품에서는 디스토피아인 것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디스토피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책 속에서 묘사되는 디스토피아와 현실을 비교하며 위안을 삼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후 변화로 인해 물 부족과 자연 재해를 걱정해야 하고 이웃 국가가 내일 아침 미사일을 퍼붓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을 해야 하는 세상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 주인공 로런이 희망의 빛 한 줄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약중독자였던 친모로부터 초공감 증후군이란 장애를 물려받은 로런은 타인의 고통까지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부자들이 노예의 조건으로 선호하는 이런 장애를 가진 로런을 작가가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서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부자와 빈자의 양극화, 지역과 젠더 갈등 등 오늘날 현대인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한계치까지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그 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소외시키고 있다.

 


이 사회에서 보고 듣고 또 겪게 되는 이런 문제들을 더 이상 놔두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로런처럼 변해야 한다.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씨앗을 모아 곳곳에 뿌려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에게 맞서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퍼져 나가는 연대의식과 배려의 씨앗은 때로는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씨앗들은 질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결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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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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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사랑은 특별하지 않다,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는 난리 아이는 고등학교 선배였고 현재는 자신의 남자친구인 마루야마 소우와 함께 아키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 호텔에서 우연히 남자친구의 절친 커플인 다쿠마와 그의 여자 친구와 만나게 되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쿠마의 여자 친구인 쇼다 사이카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연예인이었고 첫 만남에서부터 아이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갑작스러운 연락을 통해 둘의 만남이 계속되고 다쿠마와 사이카의 결별 소식이 들려온다. 이별의 아픔을 달래주려고 사이카를 방문한 아이는 오히려 그녀로부터 고백을 받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집을 나온다.

 

각자의 남자친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로를 놓지 못한 두 사람의 연애는 나 그리고 당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사이카와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속으로 곱씹는 아이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는 이 세상 수많은 커플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두 사람이 여성이라는 상황만 다를 뿐, 이들이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와타야 리사는 사회에 나온 두 사람이 누군가의 연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를 매우 섬세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누군가의 평범한 연애처럼 그렇게 서로를 위해주고 원하는 두 사람이지만 역시 사회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들도 등장한다. 특히 연예인이라는 사이카의 직업은 이들의 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남들과 다르게 옮아 매는 역할을 한다. 대중이 바라는 사이카의 모습과 스스로가 원하는 지점이 다를 때 발생하는 괴로움은 곁에 있는 아이에게도 영향을 주고 만다. 아직까지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아시아에서는 연예인들의 커밍아웃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한다. 어쩌면 누군가의 적극적인 만류나 명령 때문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런 문제인 것이다.

 

과연 아이와 사이카의 사랑은 어떤 결실을 만들어냈을지 그것은 책 결말 부분에서 직접 확인해보기를 바란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실제로 올해 일본 도쿄에서 동성 파트너십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모든 제도의 흐름이 그렇지만 이미 한 곳에서 시작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결국 다른 곳으로도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사이카와 아이 커플이 실제로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들이라면 지금쯤 그 제도 안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평범한 누군가의 연애처럼 소소한 행복에 미소를 짓고 사소한 오해에 눈물 짓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4월의 이 시기와 잘 어울린다.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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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걸스
M.M. 쉬나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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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을 추는 모습으로 발견되는 피해자들, <댄싱 걸스>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로 들어선 한 중년 커플의 상황이 몇 분 지나지 않아 긴박하게 돌변한다. 중절모를 쓴 남성은 능숙한 솜씨로 여성의 숨통을 조이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호텔방을 나서고 유유히 사라진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M.M 쉬나르 작가의 조 푸르니에 경위 시리즈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작품이다. 댄싱 걸스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정체불명의 범인에 의해 살해된 피해자들이 하나 같이 춤을 추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얼마 전에 승진을 한 조셋 푸르니에 경위의 수사망에 들어선 첫 번째 피해자 지닌 해먼드는 고급 문구류를 생산하는 한 기업의 팀장으로 회사에서 주관한 연수를 받으러 이곳에 왔다 변을 당한 것이다. 조 경위와 수사관들이 피해자의 가정과 직장을 돌며 탐문을 벌이지만 특별한 성과를 얻을 순 없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한편,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틴은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기 위해 가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스릴러 소설은 첫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어 수사를 하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와 함께 그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또 다른 행각들이 서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런 전개 방식은 주인공 수사팀이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 수사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범인이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놀랍게도 이 책을 쓴 작가는 범인 마틴이 어떻게 범행 대상을 찾는지에 대한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회상을 통해 그가 그렇게 괴물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함께 풀어나가고 있다. 물론 그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충격적인 일이 성인이 되고 나서 벌이는 행각의 면죄부를 주진 않는다. 알고 보니까 캐릭터를 만들어서 레벨 업을 하고 다른 이용자들과 만나 채팅을 나눌 수 있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속에서 범행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범죄자들이 술집이나 클럽이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공간이라면 이 소설 속 마틴이란 인물에게는 사이버 세계가 그런 곳이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들을 보면 아주 가깝거나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간혹 이렇게 극단적인 연쇄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자신들과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는 대상들을 철두철미하게 찾아내서 흉악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경우에는 소설 속 조 경위 수사팀처럼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장르 애독자들을 위해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스릴러 소설의 반전과 결말을 좀처럼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평소 어떤 스릴러 작품을 선호하는가에 따라서 이 반전과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개인적으로는 평범하지 않아서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하고 싶다. 춤에 대한 강박이 있는 범인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이 작품을 천천히 읽으면서 확인해보기를 바란다.

 

 

 


 

 ※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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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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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국내에서 사이언스 픽션(SF)은 꽤 오랜 시간 소수의 독자들만 즐기던 장르로 인식되었지만 최근에는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대중적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의 사이언스 픽션 장르에서 한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는 작가들 중 한 명이 바로 곽재식이다. 카이스트 시절부터 꾸준히 소설을 썼던 그는 지금까지도 과학을 바탕으로 한 장편과 단편을 내놓고 있다. 이번에 나온 소설집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우리들의 헌혈 행위를 독특하게 분석한 표제작를 비롯한 총 열 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개인적인 베스트 3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상한 녹정 이야기>, <슈퍼 사이버 펑크 120>, <판단> 이 세 개의 단편을 답하겠다. 먼저 <이상한 녹정 이야기>는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녹정이라는 요괴를 현대의 이야기로 저자가 확장시켰다. 이야기 속 주인공인 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이제는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다. 올림픽 개막실 날, 회사 선배가 가게에 방문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전개가 어떻게 될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다는 재미가 있다. 안면 인식 프로그램 개발부터 신라 시대 최치원의 깨우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개 방식은 의외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판타지와 과학이 뒤섞여 마침내 등장한 충격적인 결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좋은 단편이 가진 조건들 중 하나가 장편으로 확장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상한 녹정 이야기>는 결말 뒤에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등장할 것 같은 묘한 매력을 가진 단편이었다.


 

<슈퍼 사이버 펑크 120><판단>에 눈길이 갔던 이유는 현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슈퍼 사이버 펑크 120>은 관공서 직원이 주인공 김 박사에게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 제출을 요구하는 전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겨우 2시간이란 제출 시간이 주어진 김 박사는 최선을 다해 서류를 출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보안 프로그램 설치라는 장벽을 시작으로 로그인으로 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서류를 제출하거나 신청해야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분노와 당황 그리고 좌절감이 고스란히 읽는 나에게로 전해졌다. <판단>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김 대리가 상사인 이 과장으로부터 설교 아닌 설교를 듣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상대방이 숨 막힐 정도로 압박을 가하는 이 과장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현실 속 누군가가 한명 쯤 떠올려졌을 것이다.

 


환상문화웹진 거울에 꾸준하게 올린 글들을 엮은 이 소설집은 곽재식 작가의 주력 분야인 SF뿐만이 아니라 미스터리, 블랙 코미디, 일상물 등 다채로운 색채를 엿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였다. 웹진 거울에 저자가 글을 올린 목적은 조회 수나 원고료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작가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그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자유만큼이나 창작자에게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작년에 한 케이블 채널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등장한 작가님을 본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작가님의 집필 원동력이 멈추지 않는 지적 호기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떤 재기발랄하고 상상력을 자극할 이야기들을 가지고 돌아올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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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여름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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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악몽 속에서 묻힌 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다, <무죄의 여름>


 

 역사상 인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은 소비에트, 미국, 영국의 관리 구역으로 나뉘어서 통치를 받고 있었다.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삶은 당연히 구석구석 망가져 있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 아우구스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에 부모와 집을 모두 잃은 아우구스테는 미국 병사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미 육군 헌병대가 집으로 들이닥쳐 그녀를 데리고 소비에트 통치 구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도브리긴 대위와 베스팔리 하사를 만나고 크리스토프 로렌츠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치약에 든 독 때문에 죽은 그는 사실 아우그스테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은인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고 부인인 프레데리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테의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의문점이 많은 이 독살 사건은 아우구스테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그 여정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속 유럽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 [전쟁터의 요리사]들로 이미 재능을 인정받았던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또 다른 소설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전쟁과 유럽을 바탕으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 독일인 소녀를 중심으로 묵직한 서사가 장편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테는 독살된 은인의 아내인 프레데리카와 그녀를 심문한 도브리긴 대위가 공통적으로 언급한 에리히라는 청년을 찾으러 나선다. 에리히는 프레데리카의 조키였고, 도브리긴 대위는 그가 반란분자라고 의심한다. 아우구스테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를 찾으러 바벨스베르크로 떠난다. 일상이 무너지고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된 나라에서 피붙이 한 명 없이 혼자서 살아가던 아우구스테에 이번 사건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작가는 서둘러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우구스테의 과거와 현재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전쟁 중에 겪었던 끔찍한 일들과 전쟁이 끝나고도 크게 달라지 않은 그녀의 삶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의 무서움을 재확인하게 된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과 사건의 진상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완성한 이유는 사실 첫 머리에 소개된 작가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침략과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뜻도 이 글에 담았다고 고백한다. 과거에 일어난 전쟁들로부터 국가의 야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배우고 또 배웠다. 집단의 공격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까지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상대방이 가진 이기적이고 괴물 같은 모습에 분노하고 좌절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끝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 소설 주인공 소녀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황폐해질 것이다. 무너진 인간성을 화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고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한다. 물론 그전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와 집단으로부터 사과를 분명히 받아야 할 것이다. 


 




※ 출판사 측으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자유롭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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