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너에게 기꺼이 빛과 흙이 되어줄게, <나의 작은 무법자>
발아부터 열매를 맺기까지 최적의 온도, 적절한 일조량 그리고 뿌리가 듬뿍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수분이 있는 곳에서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수목이 잘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평균보다 춥거나 너무 더운 곳 심지어 아스팔트 틈 사이에서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을 내민 잡초들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한다. 크리스 휘타커 작가의 《나의 작은 무법자》의 소녀 더치스가 바로 존재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허름한 집에서 불안정한 상태인 엄마 스타 래들리와 남동생 로빈과 살고 있는 더치스는 하루하루가 버겁다.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소녀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무법자의 허세와 같은 위장막을 자신에게 씌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더치스 가족의 여정은 스타의 허망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그 끝에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그 힘에 미래가 궤도에서 벗어나 결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초반부 스타의 대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삶을 관통한다. 30년 전 여자친구의 동생을 차로 치여 죽인 죄를 지은 빈센트, 빈센트를 비롯해 어린 시절 절친들을 제각각의 방식으로 떠나보낸 워크, 비탄의 족쇄를 차고서도 계속 전진하려고 했던 스타, 그리고 남은 한 명의 딸마저 허망하게 잃어버린 헬까지 하나의 사건이 몰고 온 거센 파동이 인간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을 어떻게 무너트리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애증과 연민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관계는 현대사회의 단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더치스가 숨 쉴 틈 없이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삶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이런 더치스에게 너무나도 냉정하고 무거웠던 주변 세상의 온도가 조금씩 바뀌게 된 계기는 주변 사람들이 이 소녀에게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상실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 헬은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손주들을 품는다.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무언가 일을 하면서 얻는 책임감을 배운 더치스는 더 이상 헬의 포옹을 거부하지 않게 된다. 경멸과 조롱이 첫 번째 태도가 되었던 고향의 또래들과 다르게 친절한 관심으로 다가온 소년 토머스 노블 그리고 어른의 성숙함과 재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돌리 여사까지 새로운 친구들은 소녀의 감정을 가득 채웠던 분노를 가라앉힌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을 통해 빈센트 킹이 래들리 가족에게 침투한 암이 아니라 더치스를 키워낸 토양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로 인해 앞으로 더치스가 엄마 스타와 이모 시시가 살아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자립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근사한 목표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 가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한다. 국가와 지원과 부모의 사랑은 물론이고 수많은 기운들이 모여 한 아이를 작은 씨앗에서부터 웬만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나무로 자라게 만든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밤 늦게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주신 절친의 어머니, 글씨를 참 바르게 쓴다는 말을 무심하게 건네시던 중학교 선생님 그리고 책장의 책들을 기한 없이 빌려주었던 성당 모임에서 알게 된 형까지 여러 존재들이 삶의 여정에서 있어왔다. 그저 타고난 천성이 그랬던 까닭이었을 수도 있고 내면의 그림자를 눈치 친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더치스에게 빈센트와 헬이 잠시라도 곁에 머물다 가서 다행이었고, 빈센트에게도 교도서장 커디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릴러와 추리 소설을 읽었던 감정들은 대부분 권선징악과 정의구현을 통해 얻은 통쾌함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치 실제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인물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의지는 초라해보여도 생각보다 끈질기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만 넣어두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전 세대를 관통하는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여공작이자 무법자였던 한 소녀의 치열한 성장 소설이자 죄와 용서를 둘러싼 휴먼 드라마이기도 하다고 결론짓고 싶다. 끝으로 만약 살아가면서 더치스와 같은 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자문해보았다. 불량스러운 말투와 걸음걸이를 지적하는 대신에 그 아이가 소리 없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뻔히 보이는 문제를 지적하는 대신에 그 이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삶의 고뇌까지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자 후자의 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