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 에프 그래픽 컬렉션
닉 아바지스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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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가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을 운명이라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부터는 저 위를 올려다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너머까지." 동정심이 지나치다고 미친 여자라 불리는 시대, 우주 정복까지 꿈꾸는 인간에게 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할 일은 없는 듯 보인다.

운명을 지배하는 사람,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수석 설계자 동무는 스탈린에 의해 대숙청 대상에 속해 굴라크에서 수개월을 보내다 살아남는다. 자신이 시련 속에 살아남은 이유를 불굴의 의지라 생각하겠지만, 만약 길거리에 놓인 빵 한 조각이 없었다면 살아남았을까. 그는 역경을 극복해 가며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리한 개발을 요구하는 계획에 동참한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 후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냉전의 중심이었다. 소련의 인공위성 개발은 전후 냉전시대의 국력 과시였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은 우주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실험용 우주선에 동물을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낸다. 라이카는 떠돌이 개 생활을 하다 모스크바 항공의학 연구소에 투입된다. 이 책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우주로 보내졌던 개, 라이카의 이야기다.

러시아 혁명 40주년 기념일 직전 1957년 11월 4일 스푸트니크 2호는 라이카와 함께 발사된다. 지구로 생환시키는 기술이 전무한 상태였다. 인간이 운명을 지배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았다. 현재까지도 인간의 안전을 위해 시행되는 동물시험이 윤리적이지 않다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무한한 욕망으로 지식 너머를 쫓는 수많은 수석 설계자 동무들이 있는 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싶은 만큼 다 가지게 되었을 때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은 동정심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훈련사 옐레나와 올레그는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있어 세상은 따뜻하다는 것을, 인간의 욕망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우주 밖 너머가 아니라 온기를 잃어가는 인간의 가슴이라는 것을 작가 닉 아바지스는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읽었던 방정환 정본 속 동화 <귀여운 희생>은 라이카와 공교롭게도 같은 선상에 있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나비를 해부하려고 했던 소년과 불쌍한 나비를 지키려고 자신의 손으로 막아내다 손이 베이는 누이. 분석과 실증의 세계 속 인간의 욕망을 경고하는 작품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다. 때때로 욕망은 문명을 앞당기기도 하지만 인간성은 문명 아래 매몰되기 쉽다.

라이카 이야기로 출판된 책 제목 중에 '별이 된 라이카'라는 제목을 보았다. 인간의 욕망이 아름다운 별빛에 교묘히 희망으로 희석되어 보였다. 그래픽 노블로 보는 라이카에는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은 곱슬이 쿠드랴프카, 라이카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라이카의 희망은 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사랑받는 개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쌓아올려야 하는 문명의 탑보다 한 사람의 마음에 닿는 게 소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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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구 아저씨가 잃어버렸던 돈지갑 권정생 문학 그림책 6
권정생 지음, 정순희 그림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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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권정생 문학 그림책이라는 타이틀로 다시 만나게 된 권정생 선생님 그림책 시리즈다.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깜장 병아리 <빼떼기>, 어머니의 삶을 보여준 <사과나무 밭 달님>은 2019 볼로냐 라가차 상을 받은 작품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농부가 진짜 장군이었던 <장군님과 농부>.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에 정성스러운 그림이 덧입혀진 그림책은 매번 또 다른 느낌과 감동을 준다. 그래서 책 한권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이 그림책으로 나올까 기대된다. 여섯 번째 책은 <만구 아저씨가 잃어버렸던 돈지갑>이다.

 

아저씨는 기분 좋게 무언가 새끼줄로 엮어 끌고 가는데 지켜보는 고양이 모습은 꼬리가 힘껏 올라가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다. 책을 펼치면 새끼줄에는 송아지 한 마리가 묶여 있고 나무 뒤에 누군가 아저씨를 엿보고 있다.

 

표지 그림은 이 책의 후일담을 한 장면에 담아냈다. 만구 아저씨는 드디어 장에서 송아지를 사 온다. 아저씨 돈으로 똥을 닦았던 꼬마 톳제비(도깨비)가 나무 뒤에서 빼꼼히 내다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 똥 묻은 돈으로 진짜 송아지를 살 수 있을지 궁금했을까. 아니면 똥 묻은 돈이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걱정됐을까.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송아지를 쳐다보는 중이다.

아저씨와 톳제비의 만남은 고추 한 부대를 팔았던 어느 장날이었다. 만구 아저씨는 고추 한 부대를 판 돈으로 막걸리를 한잔 마셨다. 낡은 지갑 속에는 고추 판 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빈 부대에는 소고삐로 쓸 밧줄과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아줌마 통치마 하나, 간고등어 한 손이 들어 있었다.

 

한잔 술에 거나하게 취한 만구 아저씨는 집에 가는 길에 똥이 마려웠다. 한길에서 스무 걸음 들어간 곳에 똥을 누고 마른 떡갈나무로 뒤를 쓱쓱 닦았다. 그 때 잠바 호주머니에 든 비닐 지갑이 빠졌다. 아저씨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잠바 호주머니를 보고 지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곰바위 골짜기에 사는 톳제비들은 똥 무더기 옆에 있는 지갑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들어있는 종이쪽이 신기해서 각자 나눠서 살펴봤다. 제일 작은 손자 톳제비는 똥을 누고 똥구멍을 닦아 버린다. 그런데 아버지 톳제비가 아저씨가 장에 나가 고추 판 값이라며 도로 지갑에 넣어 두어야 한다고 한다.

꼬마 톳제비는 똥을 닦아 버린 돈 때문에 울상이 된다. 할머니 톳제비가 억새풀에 닦아내어 똥 닦은 돈을 돈 한가운데 끼워 넣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습이다. 지갑을 제자리에 두고 가는데 작은 꼬마 톳제비 두 마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만구 아저씨는 똥을 눈 곳에 그대로 놓인 지갑을 보자 뛸 듯이 기뻤다. 약간 구린내가 나는 듯하지만 돈은 원래 구린내가 나는 법이다. 꼬마 톳제비가 똥 닦은 돈은 상자 깊숙이 들어갔다. 다음 장날 송아지 살 돈이다.

옛날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이 자주 쓰는 물건이 도깨비가 된다는 말이 있다. 절굿공이나 빗자루는 오래 쓰다 보면 밑이 닳아 못 쓰게 되는데 그게 도깨비가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우리 옛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책이다. 뿔 달린 일본 도깨비를 우리 도깨비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도깨비를 소개해 줄 기회다.

정순희 선생님의 그림은 글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든다. 한지에 은은하게 채색화로 그려진 그림책 속에는 옛날 시골집에서 보던 물건들이 보인다. 삼베 천으로 감싼 자수 베게, 방안의 요강, 머리가 뭉뚝해진 싸리 빗자루, 가마솥, 한복을 보관하던 종이 상자. 그림 속에도 이야기가 가득하다. 고등어 한 손이 고등어 두 마리라는 것도 그림을 보며 알려주고, 다양한 단위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다.

장터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만구 아저씨는 어디 있을까?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아저씨를 찾아낸다. 이야기를 듣고 인물을 찾는 것은 윌리를 찾는 것과 다르다. 장터에서 강아지와 병아리를 파는 모습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손에 쥐면 바스러질 것 같았던 병아리를 만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바닥 그림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꼬마 톳제비는 제 똥이 묻은 돈을 제자리에 두면서 계속 신경 쓴다. 아저씨가 지갑을 잘 가지고 가는지 집 앞까지 따라나서고, 진짜 송아지를 사서 끌고 오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끝까지 아저씨 뒤를 따라온 꼬마 톳제비의 호기심과 순수한 마음이 톳제비의 아우라처럼 서서히 미소로 번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 하지만 제 잘못이라는 걸 깨달으면 쭈뼛거리며 찾아와 용서를 빌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울음을 그치고 또 다른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꼬마 톳제비가 아저씨 집 앞에서 서성일 때 멀리서 지켜보는 엄마 톳제비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봐 주고 멀리서 지켜주는 것은 부모의 몫인듯하다.

어스름 어둠이 내려앉은 산골짜기에 톳제비들의 은은한 불빛이 따스한 빛을 발한다. 좋은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풍성한 읽을거리가 가득한 책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이와 주거나 받거니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두고두고 꺼내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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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 수아레스, 기어를 바꾸다 - 2019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미래주니어노블 3
메그 메디나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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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불가사의하거든”

파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주인공 머시의 모습이 보이는 정면 표지를 펼치면 뒷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 오빠 그리고 고모와 쌍둥이 조카까지 표지를 꽉 채우고 있다. 머시의 가족들은 마치 씨앗 하나가 땅을 뚫고 나와 햇빛을 보기까지 땅속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잔뿌리 같다. 겉표지 속 노란색 두꺼운 양장본 표지 색깔이 주는 느낌은 따뜻하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은 튼튼한 줄기로 자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머시 수아레스, 기어를 바꾸다>는 삼대가 함께 살아가며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머시의 할머니는 잔소리 걱정 대마왕이다. 살아온 세월의 경험은 다가올 앞날의 두려움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법이다. 아버지는 현실주의자다. 아직 아이들을 골치 아픈 생활 속에 발 들여놓고 싶지 않다. 물리치료사인 엄마는 너그러운 이상주의자이면서 실천가다. 혼자되어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고모와 말썽꾸러기 쌍둥이 조카들까지. 주인공 머시 수아레스를 둘러싼 가족들을 작은 나라 같다. 그들은 지붕이 평평한 분홍색 세 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수아레스 단지'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이제 중학교에 입학한 11살 머시는 세상 모든 일이 새롭고 호기심 넘친다. 달리기나 축구처럼 땀을 흠뻑 쏟고 도전하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삼대가 이웃처럼 가까운 공간에서 제집 드나들듯 살아가니 힘든 일이 많다. 끔찍한 것은 일하는 고모 대신 조카들을 봐줘야 하기 때문에 축구부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 머시는 좋은 집에 살지도 않고, 방학 때 여기저기 갈 형편도 안 된다. 그래서 시워드 아카데미 같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 시워드에는 새로 전학 온 학생들에게 '햇살 친구'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친구를 해주는 봉사가 있다. 머시에게는 '마이클'이라는 남자아이가 배정된다.

머시의 햇살 친구였던 에드나는 남들에게 주목받기 좋아한다. 에드나는 햇살 친구 중 유일하게 남자아이를 배정받게 된, 그것도 훤칠한 키에 새하얀 얼굴을 가진 마이클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머시의 햇살 친구라는 사실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소문을 퍼트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다. 머시는 체육시간에 마이클과 치기 어린 경쟁에서 비롯된 실수로 마이클에게 야구공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힌다. 머시가 상처의 대가로 마이클의 가을 축제 의상 만드는 것을 도와주게 되면서 에드나와 친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꼬이게 된다.

자칫 미궁에 빠질 수 있었던 마이클 가을 축제 의상 훼손 사건은 우연찮게 무덤 만드는 에피소드에서 밝혀진다. 석고로 에드나의 얼굴 본을 뜨다 실수로 어쩔 수 없이 잘라낸 눈썹을 상상하자 웃음이 터졌다. 에드나의 거짓된 모습이 가면과 함께 벗겨지는 듯해 통쾌하고 시원했다. 에드나가 제 무덤을 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조언을 새겨듣고 함부로 친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머시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머시는 자신의 얘기라면 무엇이든 귀담아 들어주던 할아버지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알츠하아머에 걸렸다는 사실에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유일한 사람인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챙겨드려야 한다는 생각과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싶은 양가감정이다. 양가감정은 나를 나로 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두려움은 타인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가짜를 만든다. 그러나 가족들은 머시가 처음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는데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동한다. 친구들은 서로 말하기 전에는 몰랐던 각자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머시는 양가감정을 인정하고 내면의 두려움도 서서히 극복해 나간다. 

양가감정은 마이클과 에드나와 겪는 사건에서도 등장한다.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들어선다는 것은 삶에 흑백으로 가릴 수 있는 뚜렷한 감정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제 중학생이 된 11살 머시 수아레스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주는 모순과 환상을 암호처럼 풀어내고 읽어 내는 신비로운 일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 이야기로 사랑과 미움에 대한 가족 사랑의 모순을 이야기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11살 또래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친구들과의 사건과 갈등을 적절히 버무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수많은 기호들과 사건들이 내뿜은 메타포는 정교한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맞춰진다.

우리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은 새싹이지만 씨앗이 발아되어 지상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자라야 하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야 비로소 무거운 흙을 거슬러 지상으로 나올 수 있다. 삼대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회 속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두려움만큼 기쁨과 사랑도 배가 된다. 대가족의 일원이 된 아이의 삶은 가족들 때문에 기회가 상실되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기 일쑤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다져진 근육은 또 다른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생기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발돋움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면 어떤 곳에서든 올곧고 힘차게 자란다.

명심해라, 머시.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란다. 39

수년 간 선생님이 보아온 바로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려면 대개 시간이 필요하더구나. 가끔은 오래 고민해야 너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지. 80

사랑과 미움이란 감정은 의도적인 모순과 환상에 가려져 있거든. 컴퓨터에서 잡다한 정보를 뒤섞어 중요한 데이터를 숨기는 암호화 같은 거랄까. 거기에 진짜 뭐가 있는지 읽어 내려면 암호를 알아야만 해. 156

어차피 올 것은 오는 법이란다, 아가야. 강에 다다르기도 전에 물에 빠져 죽을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잖니? 321

나도 두렵단다. 우리 모두 두려워. 324

‘늘 그대로’라는 것은 아네스 고모가 사이먼 아저씨를 사랑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뜻이다. 오빠가 대학에서 훨씬 더 똑똑해지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늘 그대로’라는 건 할아버지의 변화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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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전쟁 -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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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이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미용실 아줌마들의 입에 아파트값이 오르내리면 가격이 정점을 찍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요즘 들어 주변 나라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작년 초 초판이 나온 이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는 그레이엄 엘리슨의 <예정된 전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도전하며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는 중국과 그를 견제하려는 미국이 마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저자는 대학교 1학년 때 고대 그리스 과목을 수강하며 투키디데스를 강독하게 된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수십 년 평화로이 공존했던 국가들이 종국에는 파국을 맞는 전쟁을 했다 기록했다. 저자는 신흥세력이 지배 세력에 도전한 16가지 사례에서 12가지가 전쟁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중국의 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신흥 세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원치 않은 전쟁으로 귀결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미국과 중국에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16가지 사례 중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보면 강대국과의 전쟁이 늘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신흥 세력의 패권 다툼의 시작과 결과를 토대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이유는 두려움과 명예, 이해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중국과 미국은 문명의 발생지부터 다른 국가로 이해와 공감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서술했다. 이러한 사실은 트럼프 정부의 중국에 대한 인식 제고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보다 현실적인 관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미중 무역 협상은 9월에 차관급 회담에서 중국의 농산물 추가 수입과 미국의 관세 부과 연기 등을 논의하고 10월 초 워싱턴에서 장관급 회담을 잠정 합의했다. 5월 초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 협상은 트럼프 정부의 추가 관세 예고를 시작으로 중국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거부 및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의 대응 조치로 험난한 랠리를 하는 중이다. 세계 증시는 미국과 중국의 대응에 따라 출렁이는 양상이며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실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무역 제재 다음 차례는 금융 부분에 대한 추가 제재가 기다리고 있어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의 긴장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미국도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왜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가. 수출액 3/4를 중국에 의지하는 경제 구조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북한과의 전쟁 위험성에 대해서는 미국과 안보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소한 빌미를 제공하여 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사실 미국이 고립주의를 버리고 유럽에 손 내밀고 아시아 국가들의 지킴이를 자처했던 이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보호를 감사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를 위한 희생양을 자처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4부 전쟁은 필연적이지 않다를 보면 평화를 열어 줄 12개의 비밀 열쇠를 볼 수 있다. 비밀 열쇠에 근거해 보면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대북관계에 화해 모드를 조성하고 있는 정부의 외교는 매우 적절한 대응이라 볼 수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멀리 바라보며 협상의 통로는 열어 두는 평화 정책이다. 비핵화를 추진하며 화해의 몸짓을 하면서도 자주국방에 힘쓰며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는 모습은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작은 전쟁은 없다.

서양 사람의 관점에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3부 폭풍 전야 전쟁 시나리오 검토 부분이라 생각한다.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5천 년 역사와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인식하고 위험성을 재고하게 된다. 중국 국호의 의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유일무이한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지만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모르는 사실이다. 시진핑은 디보스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말했다. 그러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 나갈 것인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생각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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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2 : 너를 위한 시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7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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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백온조는 고등학교 여학생이다. 소방관인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온조는 엄마를 돕겠다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시도하다 물건이 아닌 시간을 상품으로 파는 온라인 카페를 차린다. 온조는 사람들이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대행하며 자신의 시간을 판다.

온조의 아이디는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연속적이고 순환적인 의미의 시간을 말한다.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아이들에게 시간은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늘 같은 일상일 수 있다. 온조는 시간을 파는 상점의 사건을 맡고 해결해 가면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서서히 바꿔 나간다.

작가는 1권에서는 시간을 파는 상점에 사건을 의뢰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시간을 판다는 설정과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사건의 전개가 독특하고 호기심을 유발했지만 촘촘한 전개와 달리 서둘러 마무리되는 모습이 조금 아쉬웠던 작품이었다.

1권에서 등장했던 온조, 이현, 난주, 혜지는 시간을 파는 상점을 확대 개편한다. 대가를 금전으로 받는 대신 의뢰인의 시간으로 돌려받는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시간을 파는 상점의 의뢰인은 대가로 자신의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의뢰자의 시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을 중개해 주는 곳으로 발전한다.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서 가위손이라 불리는 경비원의 부당 해고를 해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엄마를 닮아 정의롭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는 온조, 졸업생 대표로 힘을 보태는 강토, 온조 지킴이를 자처하는 이현, 이현을 좋아하는 난주는 행동하고 바꿔나가는 쪽이다. 나서지는 않지만 학급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묵묵히 대응하는 혜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신념을 실현하는 쪽이다. 아이들은 주어진 같은 시간 속에서 각자의 신념을 멋지게 실현해 간다.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인 아이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열정은 가치 없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다. 물질적 생산성만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며, 물질의 환산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경험으로 축적하고 증명해 나간다. 작가는 한 사람의 시간을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바꾸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각각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한 아이들의 에너지가 하나가 되는 순간 거대한 시너지가 발현된다. 그들은 시간의 승리자였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 나온 지 7년이나 지난 후 만난 2권은 부재 '너를 위한 시간'으로 개인에게 의미 있는 시간의 지향점을 새롭게 제시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수요자들과 공급자들의 중개소가 되었으니 시간을 파는 상점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시간을 파는 상점의 애독자로 난주와 온조 사이에서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현이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보고 싶은 것은 이제 2권을 출간한 작가에게 과한 부담일까. 전작을 뛰어넘는 후속작은 없다는데 7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2권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표지 그림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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