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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 수아레스, 기어를 바꾸다 - 2019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ㅣ 미래주니어노블 3
메그 메디나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불가사의하거든”
파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주인공 머시의 모습이 보이는 정면 표지를 펼치면 뒷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 오빠 그리고 고모와 쌍둥이 조카까지 표지를 꽉
채우고 있다. 머시의 가족들은 마치 씨앗 하나가 땅을 뚫고 나와 햇빛을 보기까지 땅속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잔뿌리 같다. 겉표지 속 노란색
두꺼운 양장본 표지 색깔이 주는 느낌은 따뜻하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은 튼튼한 줄기로 자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머시 수아레스,
기어를 바꾸다>는 삼대가 함께 살아가며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머시의 할머니는 잔소리 걱정 대마왕이다. 살아온 세월의 경험은 다가올 앞날의 두려움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법이다. 아버지는 현실주의자다. 아직 아이들을 골치 아픈 생활 속에 발 들여놓고 싶지 않다. 물리치료사인 엄마는 너그러운
이상주의자이면서 실천가다. 혼자되어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고모와 말썽꾸러기 쌍둥이 조카들까지. 주인공 머시 수아레스를 둘러싼 가족들을 작은 나라
같다. 그들은 지붕이 평평한 분홍색 세 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수아레스 단지'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이제 중학교에 입학한 11살 머시는 세상 모든 일이 새롭고 호기심 넘친다. 달리기나 축구처럼 땀을
흠뻑 쏟고 도전하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삼대가 이웃처럼 가까운 공간에서 제집 드나들듯 살아가니 힘든 일이 많다. 끔찍한 것은 일하는 고모
대신 조카들을 봐줘야 하기 때문에 축구부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 머시는 좋은 집에 살지도 않고, 방학 때 여기저기 갈 형편도 안 된다. 그래서
시워드 아카데미 같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 시워드에는 새로 전학 온 학생들에게 '햇살 친구'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친구를 해주는 봉사가 있다. 머시에게는 '마이클'이라는 남자아이가 배정된다.
머시의 햇살 친구였던 에드나는 남들에게 주목받기 좋아한다. 에드나는 햇살 친구 중 유일하게
남자아이를 배정받게 된, 그것도 훤칠한 키에 새하얀 얼굴을 가진 마이클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머시의 햇살 친구라는 사실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소문을 퍼트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다. 머시는 체육시간에 마이클과 치기 어린 경쟁에서 비롯된 실수로
마이클에게 야구공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힌다. 머시가 상처의 대가로 마이클의 가을 축제 의상 만드는 것을 도와주게 되면서 에드나와 친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꼬이게 된다.
자칫 미궁에 빠질 수 있었던 마이클 가을 축제 의상 훼손 사건은 우연찮게 무덤 만드는 에피소드에서
밝혀진다. 석고로 에드나의 얼굴 본을 뜨다 실수로 어쩔 수 없이 잘라낸 눈썹을 상상하자 웃음이 터졌다. 에드나의 거짓된 모습이 가면과 함께
벗겨지는 듯해 통쾌하고 시원했다. 에드나가 제 무덤을 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조언을 새겨듣고 함부로 친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머시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머시는 자신의 얘기라면 무엇이든 귀담아 들어주던 할아버지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알츠하아머에
걸렸다는 사실에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유일한 사람인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챙겨드려야 한다는 생각과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싶은 양가감정이다. 양가감정은 나를 나로 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두려움은 타인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가짜를 만든다. 그러나 가족들은 머시가 처음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는데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동한다. 친구들은 서로 말하기 전에는 몰랐던 각자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머시는 양가감정을 인정하고 내면의 두려움도 서서히 극복해
나간다.
양가감정은 마이클과 에드나와 겪는 사건에서도 등장한다.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들어선다는 것은 삶에
흑백으로 가릴 수 있는 뚜렷한 감정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제 중학생이 된 11살 머시 수아레스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주는 모순과 환상을
암호처럼 풀어내고 읽어 내는 신비로운 일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 이야기로 사랑과 미움에 대한 가족 사랑의 모순을
이야기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11살 또래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친구들과의 사건과 갈등을 적절히 버무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수많은 기호들과 사건들이 내뿜은 메타포는 정교한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맞춰진다.
우리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은 새싹이지만 씨앗이 발아되어 지상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자라야 하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야 비로소 무거운 흙을 거슬러 지상으로 나올 수 있다. 삼대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회 속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두려움만큼 기쁨과 사랑도 배가 된다. 대가족의 일원이 된 아이의 삶은 가족들 때문에 기회가 상실되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기 일쑤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다져진 근육은 또 다른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생기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발돋움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면 어떤 곳에서든 올곧고 힘차게 자란다.
명심해라, 머시.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란다. 39
수년 간 선생님이 보아온 바로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려면 대개 시간이 필요하더구나. 가끔은 오래
고민해야 너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지. 80
사랑과 미움이란 감정은 의도적인 모순과 환상에 가려져 있거든. 컴퓨터에서 잡다한 정보를 뒤섞어
중요한 데이터를 숨기는 암호화 같은 거랄까. 거기에 진짜 뭐가 있는지 읽어 내려면 암호를 알아야만 해. 156
어차피 올 것은 오는 법이란다, 아가야. 강에 다다르기도 전에 물에 빠져 죽을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잖니? 321
나도 두렵단다. 우리 모두 두려워. 324
‘늘 그대로’라는 것은 아네스 고모가 사이먼 아저씨를 사랑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뜻이다. 오빠가
대학에서 훨씬 더 똑똑해지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늘 그대로’라는 건 할아버지의 변화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