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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플 땐 불교심리학
잭 콘필드 지음, 이재석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5월
평점 :
나는 종교가 없다. 떨치지 못하는 괴로움에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깨달음과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머리가 굵어진 이후에는 심리학에 매달렸다. 신은 믿을 수 없었지만 학자들의 이론은 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론은 현실과 달랐다. 과거를 더듬는 시간은 괴로웠다. 과거 속에 힘든 내가 보였지만 선뜻 위로해 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보며 응어리진 마음속 괴로움과 불안은 더해 갔다. 우연히 비폭력대화를 배운 후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두려움만큼 부풀려진 과거는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시켜 자유의지를 결박하고 있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소녀 딱지가 떨어지고, 만들어진 무대가 사라지니 등장인물이었던 나도 허상인 것 같았다. 구름이 모여 해를 가리면 괴로움도 어김없이 어둠처럼 모여들었다. 밝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어둠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견디고 인내하는 일상이 지나갔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법률스님 강의를 들으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두꺼운 책을 보니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이 책은 단숨에 나를 책 속으로 이끌었다. 어릴 때 옥상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은 내 비밀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매일 진짜 부모는 따로 있고 분명히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 상상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잭 콘필드도 그런 상상을 했으며, 그는 그 환상을 '가치 있고 진실한 어떤 것에 속하고 싶은 갈망(p.28)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어떤 기억보다 확실하게 각인된 상상에 의문이 풀리며 현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가 펼쳐 놓을 세계가 괴로움을 벗어던지고 희망을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흙으로 덮인 황금 불상 얘기는 어릴 적 환상을 대체해 줄 완벽한 이미지였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온통 뒤흔들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정불화의 상처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노력했다. 지나치게 애쓰다 도리어 자기 비하에 빠지는 수순도 똑같았다.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연민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심리학자가 알려주었고, 늘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명상 훈련을 했던 사람들의 실제 경험담이 보여주듯 지식과 말로 꾸민 메마르고 단단한 마음의 민낯이 드러났다. 나는 나를 여전히 속이고 있었다. 나의 비극을 바라볼 용기가 없으니 타인의 비극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긴장과 불안으로 경직된 몸은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리드하는 대로 괴로움을 덮었던 단단한 진흙 위에 따뜻한 물을 쏟아부었다. 물이 스며들고 단단해진 땅에서 기포가 하나 둘 생기더니 금세 뜨거운 감정이 용암처럼 솟아올랐다. 그의 말처럼 그대로 두었다. 그냥 두었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생각처럼 끔찍한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면서 머리끝이 살짝 저렸다. 괴로움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다음은 의식에 색을 입히는 단계다. 생각에서 물러나 정신적 상태가 일어나는 과정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핀다.(p.89) 이 과정을 이해한다면 뒷부분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생각한다. 내가 건강하지 못하다 느끼는 정신적 상태와 건강하다 느끼는 정신적 상태를 각각 세 가지씩 간추렸다. 정신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하자. 건강했을 때 몸의 느낌을 기억하고 습관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바뀌는 생각과 몸의 변화를 살펴보면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자꾸 되새김질하면 생각이 두려움을 강화시킨다. 과거에 자유의지를 결박하고 보호받기를 원했던 것은 최악의 방법이었다. 마음도 날씨처럼 매 순간 바뀌었다. 기상의 흐름을 살피듯 마음도 흐름을 살펴 챙겨야만 한다. 빠르게, 습관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변하는 몸과 정신의 변화를 살펴본다. 생각이 명료해지니 해가 비치지 않아도 서서히 마음이 밝아졌다. 일부러 밝은 곳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잠시였지만 신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해를 비추고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내리는 신 같았다.
"마음이 만든 깊은 나락을 건너는 것은 가슴이다." 생각하는 마음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자기와 타인이라는 관점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깊은 나락이다. 생각이 오고 가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생각을 활용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가슴에 머문다. 가슴에는 순진무구함이 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아이들이다. 타고난 지혜도 갖고 있다. 우리 자신이 고대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지혜이다. 가슴에 머물 때 우리는 숨, 몸과 조화를 이루며 산다. 가슴에 머물 때 우리는 신뢰를 주는 존재, 용기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우리의 인내심은 커진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삶은 늘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도의 성자 카론 싱은 이렇게 말했다. "풀밭의 풀도 시간이 지나면 우유가 된다."p.226
괴로움의 더께가 하루 이틀 쌓인 게 아니듯 하루아침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수련도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평생 따라다니던 괴로움을 떨칠 수 있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나의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타인의 괴로움도 마주하며 공감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연민의 마음을 키워갈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은 상태다. 세상 모든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마음으로 깨닫고 선의 파동을 일으키는 보살이 되는 때에 이르려면 많은 수련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과 분석 대신 나를 바라보는 일에 좀 더 시간을 내고 집중해야겠다. 생각에 머물러 있을 때 신비의 순간들은 금방 사라진다. 저자가 쓴 명상에 관한 책을 찾아 구입했다.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법은 끊임없이 변하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작은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실제로 해보는 것. 이젠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