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이 그의 법칙을 세워 태양계 운동에 관한 3법칙을 증명하고 지구 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모두 설명하고자 보인 것은 근대 과학의 시발이 되었을 뿐이 아니라 그간의 물리적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왜’라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즉 중력에 의해 태양계 운동은 그 사실 만에 대해서 설명할 뿐 왜 그렇게 운동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힘이 질량만 있으면 순식간에 전달이 된다는 사실(뉴턴은 이를 원격력이라 칭함)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이유가 주어져야 했다.
뉴턴의 법칙은 ‘어떻게’를 설명하지 ‘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뉴턴 이래 현대 물리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에 ‘왜’를 설명하지 못하므로 불완전하다고 주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 때문이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틀린 부분이 많을지라도 그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접근 방법은 운동의 근원을 중시하여 운동이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비록 그의 저작들이 – 물리는 방대한 그의 업적 가운데 작은 한 부분이다 – 기원전의 것이었을지라도 갈릴레이 이전에 그 누구도 이에 반기를 든 자가 없던 이유는 그는 물체의 운동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서로 연관 지어 체계적으로 이해하려 하였고, 이러한 연관들을 원칙에 근거하여 현상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물리에서 ‘왜’가 없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궁금해하는 학자가 없지는 않다. 일례로 현대 입자 물리의 약력에서만이 비보존되는 parity(반전성)라는 물리량을 우리는 비보존되는 것은 알아냈지만 왜 약력에서만 그 현상이 일어나는지 또 약력에서도 작은 양으로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즉 ‘왜’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즉, 근대과학 이래 물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해 왔지만 표면적으로 그 현상이 일어남을 알아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금년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탄생한지 2,400년 되는 해이다. 소개하는 책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작을 매우 쉽게 풀어쓴 책이다. 그는 수많은 분야에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일반적으로 매우 난해하다. 특히 ‘형이상학’은 더욱더 그렇다. 분류학, 논리학, 미학, 윤리학, 물리학, 동물학 등 수많은 저작은 그의 체계적인 사유로 말미암아 오늘날에도 연구의 대상이 될 만큼 사유는 깊다. 예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얘기하는 소위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의 개수를 늘린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그의 저작을 총괄하여 만드는, 행하는, 알고자 하는 인간으로 나누어 그의 사상을 설명코자 하였다. 너무 쉽게 설명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이 요것밖에 안 되나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그가 왜 질료와 형상을 나누었는지 인간의 관념은 어떻게 들어오는지 논리가 무엇인지 시간이 무엇인지 등 원초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그는 체계적으로 실었다. 그의 영향력은 서양 과학, 철학, 논리학, 윤리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 영향은 계속 중이다. 물론 물리학에서 ‘왜’라는 의문도 함께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매우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공들여 써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