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부로 들어선 건 절대로 아니지만 1부의 지루함 또는 진부함은 소설이 장장 3천6백여 쪽으로 이루어져 프루스트의 답습이고 그나마 급 낮은 뜨내기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염려는 긴장을 점점 놓아버리게 하였다. 더군다나 뭔가를 주장한 출판사의 돈에 눈먼 선전 작업도 한몫한 건 사실이긴 해도 긴장의 끈을 마음에 붙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안구 운동의 기대감을 시험해보려는 수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필이면 우연찮게 번거로움에 책의 껍데기를 벗겨버린 나는 안쪽에서 작가 전신을 찍은 흑백 사진 속에서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거의 동시에 읽기 시작한 2부에서 그 강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몸에 꽉 끼는 슈트, 헐벗은 청바지,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구두, 나는 전시만 해놓은 그 괴이한 복장을 당장 껴입을 수 없었다. 비록 이 나이에 신뢰하는 자유로움일지라도 말이다. 작가의 그 모습은, 내가 입고 다니길 원했었던 그 모습은, 2부의 그 강렬한 그의 흘러감과 꼭 닮아 있었고 매료된 나머지 내가 그 복장을 하게 할 만큼 그의 홀림은 이제 시작되었던 것이다. 왠지 1부 시작에서 죽음에 대한 그의 삐뚤어짐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강렬한 서사가 무려 300여 쪽이 지난 다음에야 시작되었다면 그의 음모가 아니고서야, 아니 그 유별난 특수적 정체성의 발현이 아니고서야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소설 ‘나의 투쟁’은 누가 봐도 순전히 각색이 없는 자신의 얘기이다. 특정 과거로부터의 써져 내려간 것이 아니라 과거는 끊임없이 앞뒤로 왔다 가며 마치 과거가 현재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중산층 정도 되는 노르웨이의 평범한 가정에 속해있는 작가 자신의 얘기이므로 특별히 주목할 것도 없다. 만약 가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꾸민다면 군더더기는 다 없어도 된다. 1편의 660쪽은 약 200여 쪽 정도로 축약되어도 상관없다. 다만 그 이야기만으로는 저급 소설일 뿐이다. 그것도 픽션인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일 뿐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본 것은 삶이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가장 앞쪽에 기술되고 있는 그의 죽음에 대한 반 습관적인 생각들의 이유가 앞으로 남은 5권의 책, 또는 남은 3000여 쪽의 분량에서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하다. 당장 2권에서 궁금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이다. 그 얘기를 하다가 1부를 마쳤으므로. 자신이라는 한 개체의 삶이라는 편협한 일개 정체성으로부터 방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도 놀랍거니와 시간을 넘나들며 의식 속에서 관련 부분들을 끊임없이 꺼내들고 치밀하도록 자세한 묘사 거리와 군데 군데 보이는 사유적 문장들, 이러한 것들이 장장 3600여 쪽에서 이루어져 있다니 놀랄 일이다.
작가는 소설 안에서 글쓰기의 고통을 묘사한다. 어느 순간에 글쓰기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들을 그림자 속에서 꺼내오는 일이라 한다. 즉,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자체가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그곳이라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서의 일어나는 사건에 덧붙여 그와 관련되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식의, 즉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을 말함인데 작가는 이 생각들을 교묘히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이런 의식 속의 생각을 장황하게 때로는 치밀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섞어 넣는다.
나오는 등장인물은 실제이고 익명을 쓰지 않음으로 당사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지구 상 저쪽 한편의 작가의 가족이 작가를 통해 까발려진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므로 소설이 아니다. 다만 이야기의 문장들은 정말 소설이다. 매우 놀라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