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1 서양철학사 1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지음, 윤형식 옮김 / 이학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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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읽고 나서도 사전처럼 필요할 때 뒤적거리는 책으로서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데 유용하다. 다만 이 책은 생물학의 발전 관련 철학 얘기는 나와도 물리 관련의 사유 여파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은 게 흠이다.

신학과 철학의 중심선 상에서 근대 과학의 탄생은 이른바 사유 방법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당연히 철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과학에서 물리를 빼놓고 철학을 논할 수 없다. 아마도 세계 철학사에서 물리를 다루지 않은 이유는 물리가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이 책 ‘서양 철학사’는 근대와 현대 물리가 철학에 끼친 영향을 포함한다. 서양 철학이므로 궤변 주의자 철학,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신 플라톤주의, 스토아학파들의 신학적 연구, 그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접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를 체계적으로 비교적 쉽게 실어 넣었다. 여기까지는 중세의 철학으로서 그리스 철학이 신학과 접목되는 부분으로서 인류의 사유의 근간은 그리스 철학이다.

 

우주의 재구성과 자연의 수학화는 기존의 철학 체계를 깨뜨리고 인류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유 구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가설연역법을 동원한 뉴턴 물리학의 대성공은 진리 문제에 관한 권위로서 신학 대신 부상하게 하였고 자연의 과정을 통제하는 인간의 수단이 되었는데 이는 근대 과학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시각이 배제되고 순전히 기계적인 역학적인 원인들로 이행되어 버렸다. 이 일대 변혁을 가장 잘 간파하고 철학적으로 끌어낸 이가 칸트인데 이는 서양철학 2에서 다룬다.

스토아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리스 철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을 신학에 접목시키는 자세한 과정이 소개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화 시켜 논리를 부여하는데 사실 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거의 모두 아리스토틀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수정처럼 보인다. 사실 그리스 철학의 어떤 부분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끼치므로 그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뉴턴 물리를 만든 자신도 뉴턴 물리가 나온 이후에도 신학에 의해 변형된 그리스 철학은 횡행하였다. 그만큼 그리스 철학은 포괄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란 것이다.

연대기별로 써진 책이므로 홉스,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지나 버클리 그리고 흄의 철학으로 1을 끝맺는다. 전반적으로 쉬운 용어를 잘 구사하여 사회과학, 정치, 인문과학 및 자연과학도 포함한 철학의 논의가 담겨 있고 이해하기 쉽게 써져 있어 철학의 전체를 조망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 될 듯싶다. 더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여 각 시대의 사상이 있을지라도 그것의 연원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떤 핵심적 변화가 있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지성 개개인의 철학을 접하면서 때때로 사전식으로 펼쳐 참고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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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철학
조슈아 알렉산더 지음, 천현득 옮김 / 필로소픽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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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이라는 용어는 얼핏 보면 과학에의 실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논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글자 그대로 표현하면 실험을 통해 수행되는 철학이다. 여기서 실험이라는 것은 사실상 설문 조사 등의 표본 조사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즉, 어떠한 가상적인 예제를 무작위 또는 작위(예로 서양인과 동양인, 여자와 남자 등)의 사람들에게 던지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인데 주로 도덕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여 따지자는 철학이다. 물론 이렇게 철학을 수행하자는 이러한 풍조가 있기도 하고 이것이 발현된 지는 매우 최근으로 철학의 새로운 사조인 것 같다. 다만 이것이 철학인지는 좀 의문은 드는 것이, 하고자 하는 것과 결과를 바탕으로 논하고자 하는 것이 꼭 인지 사회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유야 어떻든 왜 이런 철학이 생겨났는지를 얘기하는 게 좋겠다. 기존의 철학은 철학자가 자신이 논증하려 하는 명제라는 것을 자신의 직관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이때 직관이 참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포함하는지의 문제 제기를 실험 철학은 표출시킨다. 즉, 직관일지라도 참이라는 당위성은 없으며 여러 가능성을 바탕으로 두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직관에 의존한 철학적 서술보다 좀 더 보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철학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표본 조사가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증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들이 주장하는 직관의 문제점을 얘기하는 부분을 예를 들어 정리해 보자. 흔히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은 인과적 결정론과 양립되지 않는다는 데서 철학적 직관이 시작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맞다. 즉 인과적 결정으로 도덕적 책임을 반드시 묻는다는 인간의 판단이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을 지울 때 반드시 인과적 결정으로 판단해야 하는지의 판단이 애매한 경우도 물론 존재한다. 이때 양립 불가의 원칙은 깨지게 된다. 이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상황이 매우 애매한 예시를 들어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 여부를 묻는 설문 조사를 시행하여 이러한 양립 불가능에 바탕을 둔 철학적 직관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실험 철학의 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이 철학에서 참이어야 할 당위성에 의문이 든다. 직관이 참일 필요는 없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직관 하에 논증을 펴 나가는 여태까지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직관이 분명히 참이라는 바탕 하에 철학 사상을 펴낸 것 같지 않다. 철학은 참을 찾아내려 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비록 논증적으로 기술되고 어떤 필연성을 담보로 세워 보편성으로 확장하여 자신의 얘기를 논증적으로 끌고 나갈지라도 반드시 참이라는 명제 하에 사상이 펼쳐지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그 논증 자체가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철학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은 그 논증을 무슨 수를 써서든 증명으로 끌고 가려 해 왔지만 그 직관이라는 것이 참일 필요는 없고 대부분의 경우 참이 아닐 확률이 더 크다. 그럼에도 철학적 사상이 큰 위치에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글로서 논증을 수행하려 하기 때문인데 비록 완전 증명은 아닐지라도 그것에 가까이 가려 하는 노력 그 자체가 너무 처절하여 철학자의 문장 하나하나는 허투루 써지지 않으며 함축적인 의미의 적확한 단어들의 나열이 수반된다. 여기에 인류 지성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험 철학을 정의하기 나름이겠으나 인지 사회학 등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직관이라는 것을 실험을 통하여 정확히 파악하려 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고 결과를 위해 표본 조사를 행하는 것으로서 다른 여타 학문과 다를 것이 없을 것처럼도 보인다. 이 부분이 중요할 수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소위 융합(또는 통섭)이라 하여 학제 간 관련 연구의 필요성이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이는 학제 간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더욱더 고양된다는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융합을 다른 면으로 뒤집어 보면 학문들이 글자 그대로 융합되어야 하는 면도 존재할 수도 있다. 융합되어야 하는 것이란 개개의 학문으로서의 창출성의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지식의 측면에서 개개의 학문이 추구함으로 창출되는 지식이라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 측면이 융합을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이 의문은 지식의 크기가 유한하다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철학도 자연과학도 인간의 인식 범위 내에 있는 것만이 새로운 지식이 될 수 있으므로 만약 지식의 크기가 유한하다면 언젠가는 한계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실험 철학이 등장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철학 한다고 하지만 인지 사회학의 방법론을 쓰고 있다. 사회과학의 어떤 학문 등과 이미 융합의 단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식의 폭발적 팽창으로 극도로 세부화된 학문들이 지식의 유한성의 임계점에서 다시 융합되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문의 세분화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면 정체되거나 그 역의 방향인데 지식의 유한성이 맞는다면 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문이 융합되어 그 수가 줄어드는 과도기에 살고 있음을 실험 철학이라는 분야가 예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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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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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을 알고부터 계속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본래 어떤 특정인의 생각들을 접하고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작들을 읽는 순서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본시 사유라는 것이 경향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성은 완화된다. 예로 칸트의 초기 사고들인 물리학에 관한 것들과 후기 저작인 비판서들은 격리되어 있으며 비판서일지라도 난해한 순수이성비판을 접하고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 했을지라도 실천이성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긴장은 완화된다. 그 이유는 문체가 변하지도 않으려니와 사유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에 정체성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인의 저작들에서 이들이 동질한 사유의 연장선에 있지 않고 주체가 변하면 매우 당혹스러울 수가 있다. 이 경우 그의 저작을 쓰인 시기대로 읽어내려야 하고 이에 덧붙여 그의 사유가 환경에의 의존성마저 띠면 이해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 또한 필요하여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처지에 놓이기 십상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 다행이기는 하지만...

벤야민의 저작들에서는 이런 당혹감이 살아있다. 베를린 연대기부터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때문이고 그 다음 일방통행로로 들어간 이유는 연대기와 비슷한 소산문으로 이루어진 사유였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소산문을 채택한 것이 보들레르의 소산문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방통행로의 첫 번째 산문인 ‘주유소’라는 짧은 문단의 뒷부분의 내용이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다음으로 읽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풀렸다. 벤야민은 주유소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냄새를 흘렸던 것이다. 당연히 그가 사물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것도 유물론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의 역사철학테제에는 얼핏 보기에 무슨 만화 같은 그림이 들어가 있고 이 그림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이 있는데 이 부분이 아마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그림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 한다. 날개를 펼치고 있고 입이 열린 것으로 보아 뭔가가 천사를 향해 닥치는 형상이다. 벤야민은 이 그림을 역사의 천사로 부르며 그간의 역사의 잔해들이 천사 앞에 무수히 쌓이는 형국이라 주장한다. 천사는 이 파편을 재구성하려 하나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너무 세차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폭풍은 거세게 몰아쳐 날개를 접을 수도 없는 천사의 형국을 그리고 있는데 이 폭풍이 바로 진보라고 주장한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벤야민에게 역사는 균질한 장소와 공허한 시간에서의 구성이 아니라 현재로 충만한 시간에서의 구성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라는 시간이 무엇이고 왜 그는 지난 역사의 모든 것이 균질하고 공허하다 했을까? 그는 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라는 개념만을 고수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역사란 연속성이 없어 진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보를 위해서는 현재가 중요하고 바로 현재만이 바로 위기 상황으로의 탈출로서의 해방구이므로 미래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것이 여태껏 진보가 없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주의적 역사가들의 감정이입이 지배자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인데 역사적 인식의 주체를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으로 본 벤야민에게의 역사에서의 감정이입은 패배자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자들이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손질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즉 새로 구성되어야 할 역사로서의 역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과거는 균질한 장소이고 공허한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만을 언급할까? 그는 초기 공산주의(19세기 말) 사상에 비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질된 공산주의 사상(20세기 초, 나치 바로 전:사회민주주의)은 역사 인식이 잘못 전도되도록 향하고 있는 진보라고 주장한다. 즉 이 진보는 실패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대중의 내면적 힘이 상승된 인류 역사상 처음의 시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는 가능하나 당시의 사회 질서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즉, 진보는 퇴색되어 이대로 가다가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고 또다시 그 균질한 시간과 공허한 시간 속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켜보고 있기에는 조급함이 앞서고 미래를 상정하지 않고 현재만을 고수하려하면 현실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적 역사의 성공을 현재에 끌어댄 논리성을 담보로 하는 그의 사유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천사가 서 있는 시점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현재이다. 거센 폭풍은 과거에서부터 흘러오고 천사는 그것을 올곧이 막고 있다. 미래로부터 등 돌린 천사에게 미래는 없으며 시간은 정지되어 지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은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니 메시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 되어 버린 발터 벤야민이다. 즉,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사회가 지금 도래하기에는 변질된 유물론적 사고로는 가능하지 않는 딜렘마가 메시아를 끌어들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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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시계 - 과학혁명과 근대의 탄생
에드워드 돌닉 지음, 노태복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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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그의 법칙의 보편성을 증명하고자 한 저작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는 매우 난해한 것은 거의 모든 설명을 그가 발명한 미적분을 활용하기보다는 미적분 이전의 기하적 방법론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법칙은 태양계 운동의 법칙인 케플러의 3법칙과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이의 새로운 해석을 물체의 중력의 원인으로 통합한 그야말로 근대과학의 탄생을 알리는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일반인들도 무심히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의 근원으로 물체의 질량과 그들 사이의 거리만이 변수로 들어가 있다. 왜 그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를 뉴턴은 당시에 알려진 원심력과 케플러 3법칙으로부터 끌어낸다. 뉴턴이 가장 어려워했던 부분은 물체의 형상이나 크기를 무시하고 그냥 점으로서 오직 질량 값으로만 힘을 묘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법칙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는 프린키피아 3부에서 점으로의 해석 정당성을 주장한다. 우리가 무심코 머릿속에 있는 법칙은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 책 ‘뉴턴의 시계’는 뉴턴 역학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리고 있다. 17세기 초의 유럽에서의 과학 상황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소상히 끌어내고 있다. 소위 과학 상황이라는 것이 오늘날 보기에 터무니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그럼에도 올바른 법칙의 방향으로의 흐름에의 도도한 물결을 쉽게 설명해내고 있다. 쉬운 설명을 위해 역사적으로 매우 많은 사료를 제시하며 심지어 당시의 문화, 정치적 상황까지도 저자는 피력하고 있다.

어떻든 뉴턴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므로 그에 대한 전반적인 저자의 해박한 묘사, 그 전대의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업적에 대한 쉬운 설명 더 나아가 미적분학을 독립적으로 발견한 라이프니츠와의 끈질긴 악연, 영국 왕립학회에서의 내부적 암투 등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쓰여 있다. 처음 부분에 흥미를 돋우고자 당시의 런던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데 대화재, 전염병 창궐,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실험들은 독자를 즐겁게 할 충분한 여유를 갖추었다.

수많은 뒷얘기들과 함께 엮어진 뉴턴에 의한 근대과학의 혁명적 탄생은 일반인들이 읽기에 알맞게 되어 있어 고전물리학의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한다.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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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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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함’이라는 어구를 접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악은 본래 도처에 존재함 또는 누구도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우선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누군가가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당사자가 순전히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악을 평범하다고 표현하는가? 즉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올바르지 않는 잣대를 들이댐으로 전혀 죄가 없다는 논리를 펴는 상황을 그저 악의 평범함으로 얘기할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악의 진부함’이라는 표현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뭔가에 대한 설명에서 통상적이고 흔해빠진 그런 정도의 뜻으로 평범함을 포함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죄가 없다는 논리는 비논리를 넘어 멍청하기 때문이다. 죄짓고도 궤변늘어놓으며 증거대라는 상투적 행위는 진부한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피고로서 아이히만의 변명을 ‘Banality of Evil’이라고 표현했다. banality라는 단어는 진부함 또는 평범함이라는 뜻*이다. 이 어구로 아렌트는 유대인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범죄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답변들을 악의 평범함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 누구도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을 만큼 악은 평범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에 대한 비판은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바로 악의 보편성 차원의 문제에서이다. 즉 인간악을 보편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이 마치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를 희석시키는 것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말‘은 그녀가 생전에 한 인터뷰 중 대표적인 네 개의 인터뷰를 수록한 책으로 정치철학자로서의 정치 관련에 그녀의 견해를 담고 있다. 이 분은 이미 십 대에 칸트의 비판서를 통독하고 이해할 만큼 매우 똑똑했었던 것 같다. 칸트가 그녀가 철학에 입문한 결정적 동기가 되는데 후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야스퍼스 등과 그의 사상은 깊은 관련이 있다.

공교롭게도 아이히만은 피고로서의 답변에서 칸트의 철학을 동원한다. 독일 역사 최고의 지성이 자랑스럽기야 하겠지만 그의 철학의 인용은 분노를 사게 만든다. 얘기인즉슨, 그는 재판 중 일평생 칸트의 도덕 계율을 따랐으며 칸트의 의무 개념을 지도 원리로 삼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놀라운 얘기인데 대단히 멍청하거나 매우 무례한 언급임에 틀림없다.

칸트의 도덕적 자율 개념은 보편성을 띠고 있다. 자신의 행위 규범이 보편적으로 올바른지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라는 개념은 나쁜 짓을 할지 말지의 판단에 자신의 의지가 있을지라도 정언적 명령으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것을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아이히만의 이 말은 단 한 가지 가정을 두면 성립한다.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 행위를 동물을 죽이는 것쯤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덕 계율을 지키려 노력했고 의무 개념을 아리안 족의 영광에 두었다면 맞다. 다만 그의 개념은 보편성을 심하게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의 의무 얘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수용소장으로서 그는 상부의 지시를 따랐다는 의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맹세, 명령과 순종으로만 살았다고 항변한다. 즉 맹세하고 명령받고 그에 순종하는 의무를 얘기한다. 그러므로 자신은 죄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담론, 정치에서의 폭력에 대한 견해 등이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실려 있다. 특히 악을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어떠한 상황이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는 칸트의 비판을 꿰뚫고 있는 그녀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를 한때나마 몰이해한 한때의 해프닝이 아쉽기만 하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표현한 악의 진부함(또는 평범함)은 그 어구가 나오게 된 경위의 본래 뜻과 상관없이 인간 그 누구도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악은 어디에도 존재하며 그 누구도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이 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환경 하에서 일지라도 악은 보편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응당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 공동체로서의 책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결국 이것이 칸트의 도덕적 자유이다. 적어도 한나 아렌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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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스터 사전을 보면 banal이라는 단어를 dull or stale as because of overuse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진부한’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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