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에게 역사는 균질한 장소와 공허한 시간에서의 구성이 아니라 현재로 충만한 시간에서의 구성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라는 시간이 무엇이고 왜 그는 지난 역사의 모든 것이 균질하고 공허하다 했을까? 그는 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라는 개념만을 고수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역사란 연속성이 없어 진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보를 위해서는 현재가 중요하고 바로 현재만이 바로 위기 상황으로의 탈출로서의 해방구이므로 미래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것이 여태껏 진보가 없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주의적 역사가들의 감정이입이 지배자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인데 역사적 인식의 주체를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으로 본 벤야민에게의 역사에서의 감정이입은 패배자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자들이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손질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즉 새로 구성되어야 할 역사로서의 역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과거는 균질한 장소이고 공허한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만을 언급할까? 그는 초기 공산주의(19세기 말) 사상에 비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질된 공산주의 사상(20세기 초, 나치 바로 전:사회민주주의)은 역사 인식이 잘못 전도되도록 향하고 있는 진보라고 주장한다. 즉 이 진보는 실패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대중의 내면적 힘이 상승된 인류 역사상 처음의 시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는 가능하나 당시의 사회 질서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즉, 진보는 퇴색되어 이대로 가다가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고 또다시 그 균질한 시간과 공허한 시간 속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켜보고 있기에는 조급함이 앞서고 미래를 상정하지 않고 현재만을 고수하려하면 현실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적 역사의 성공을 현재에 끌어댄 논리성을 담보로 하는 그의 사유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천사가 서 있는 시점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현재이다. 거센 폭풍은 과거에서부터 흘러오고 천사는 그것을 올곧이 막고 있다. 미래로부터 등 돌린 천사에게 미래는 없으며 시간은 정지되어 지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은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니 메시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 되어 버린 발터 벤야민이다. 즉,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사회가 지금 도래하기에는 변질된 유물론적 사고로는 가능하지 않는 딜렘마가 메시아를 끌어들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