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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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을 알고부터 계속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본래 어떤 특정인의 생각들을 접하고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작들을 읽는 순서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본시 사유라는 것이 경향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성은 완화된다. 예로 칸트의 초기 사고들인 물리학에 관한 것들과 후기 저작인 비판서들은 격리되어 있으며 비판서일지라도 난해한 순수이성비판을 접하고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 했을지라도 실천이성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긴장은 완화된다. 그 이유는 문체가 변하지도 않으려니와 사유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에 정체성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인의 저작들에서 이들이 동질한 사유의 연장선에 있지 않고 주체가 변하면 매우 당혹스러울 수가 있다. 이 경우 그의 저작을 쓰인 시기대로 읽어내려야 하고 이에 덧붙여 그의 사유가 환경에의 의존성마저 띠면 이해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 또한 필요하여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처지에 놓이기 십상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 다행이기는 하지만...

벤야민의 저작들에서는 이런 당혹감이 살아있다. 베를린 연대기부터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때문이고 그 다음 일방통행로로 들어간 이유는 연대기와 비슷한 소산문으로 이루어진 사유였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소산문을 채택한 것이 보들레르의 소산문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방통행로의 첫 번째 산문인 ‘주유소’라는 짧은 문단의 뒷부분의 내용이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다음으로 읽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풀렸다. 벤야민은 주유소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냄새를 흘렸던 것이다. 당연히 그가 사물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것도 유물론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의 역사철학테제에는 얼핏 보기에 무슨 만화 같은 그림이 들어가 있고 이 그림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이 있는데 이 부분이 아마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그림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 한다. 날개를 펼치고 있고 입이 열린 것으로 보아 뭔가가 천사를 향해 닥치는 형상이다. 벤야민은 이 그림을 역사의 천사로 부르며 그간의 역사의 잔해들이 천사 앞에 무수히 쌓이는 형국이라 주장한다. 천사는 이 파편을 재구성하려 하나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너무 세차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폭풍은 거세게 몰아쳐 날개를 접을 수도 없는 천사의 형국을 그리고 있는데 이 폭풍이 바로 진보라고 주장한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벤야민에게 역사는 균질한 장소와 공허한 시간에서의 구성이 아니라 현재로 충만한 시간에서의 구성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라는 시간이 무엇이고 왜 그는 지난 역사의 모든 것이 균질하고 공허하다 했을까? 그는 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라는 개념만을 고수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역사란 연속성이 없어 진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보를 위해서는 현재가 중요하고 바로 현재만이 바로 위기 상황으로의 탈출로서의 해방구이므로 미래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것이 여태껏 진보가 없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주의적 역사가들의 감정이입이 지배자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인데 역사적 인식의 주체를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으로 본 벤야민에게의 역사에서의 감정이입은 패배자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자들이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손질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즉 새로 구성되어야 할 역사로서의 역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과거는 균질한 장소이고 공허한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현재만을 언급할까? 그는 초기 공산주의(19세기 말) 사상에 비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질된 공산주의 사상(20세기 초, 나치 바로 전:사회민주주의)은 역사 인식이 잘못 전도되도록 향하고 있는 진보라고 주장한다. 즉 이 진보는 실패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대중의 내면적 힘이 상승된 인류 역사상 처음의 시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는 가능하나 당시의 사회 질서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즉, 진보는 퇴색되어 이대로 가다가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고 또다시 그 균질한 시간과 공허한 시간 속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켜보고 있기에는 조급함이 앞서고 미래를 상정하지 않고 현재만을 고수하려하면 현실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적 역사의 성공을 현재에 끌어댄 논리성을 담보로 하는 그의 사유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천사가 서 있는 시점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현재이다. 거센 폭풍은 과거에서부터 흘러오고 천사는 그것을 올곧이 막고 있다. 미래로부터 등 돌린 천사에게 미래는 없으며 시간은 정지되어 지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은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니 메시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 되어 버린 발터 벤야민이다. 즉,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사회가 지금 도래하기에는 변질된 유물론적 사고로는 가능하지 않는 딜렘마가 메시아를 끌어들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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