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함’이라는 어구를 접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악은 본래 도처에 존재함 또는 누구도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우선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누군가가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당사자가 순전히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악을 평범하다고 표현하는가? 즉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올바르지 않는 잣대를 들이댐으로 전혀 죄가 없다는 논리를 펴는 상황을 그저 악의 평범함으로 얘기할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악의 진부함’이라는 표현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뭔가에 대한 설명에서 통상적이고 흔해빠진 그런 정도의 뜻으로 평범함을 포함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죄가 없다는 논리는 비논리를 넘어 멍청하기 때문이다. 죄짓고도 궤변늘어놓으며 증거대라는 상투적 행위는 진부한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피고로서 아이히만의 변명을 ‘Banality of Evil’이라고 표현했다. banality라는 단어는 진부함 또는 평범함이라는 뜻*이다. 이 어구로 아렌트는 유대인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범죄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답변들을 악의 평범함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 누구도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을 만큼 악은 평범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에 대한 비판은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바로 악의 보편성 차원의 문제에서이다. 즉 인간악을 보편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이 마치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를 희석시키는 것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말‘은 그녀가 생전에 한 인터뷰 중 대표적인 네 개의 인터뷰를 수록한 책으로 정치철학자로서의 정치 관련에 그녀의 견해를 담고 있다. 이 분은 이미 십 대에 칸트의 비판서를 통독하고 이해할 만큼 매우 똑똑했었던 것 같다. 칸트가 그녀가 철학에 입문한 결정적 동기가 되는데 후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야스퍼스 등과 그의 사상은 깊은 관련이 있다.
공교롭게도 아이히만은 피고로서의 답변에서 칸트의 철학을 동원한다. 독일 역사 최고의 지성이 자랑스럽기야 하겠지만 그의 철학의 인용은 분노를 사게 만든다. 얘기인즉슨, 그는 재판 중 일평생 칸트의 도덕 계율을 따랐으며 칸트의 의무 개념을 지도 원리로 삼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놀라운 얘기인데 대단히 멍청하거나 매우 무례한 언급임에 틀림없다.
칸트의 도덕적 자율 개념은 보편성을 띠고 있다. 자신의 행위 규범이 보편적으로 올바른지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라는 개념은 나쁜 짓을 할지 말지의 판단에 자신의 의지가 있을지라도 정언적 명령으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것을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아이히만의 이 말은 단 한 가지 가정을 두면 성립한다.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 행위를 동물을 죽이는 것쯤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덕 계율을 지키려 노력했고 의무 개념을 아리안 족의 영광에 두었다면 맞다. 다만 그의 개념은 보편성을 심하게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의 의무 얘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수용소장으로서 그는 상부의 지시를 따랐다는 의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맹세, 명령과 순종으로만 살았다고 항변한다. 즉 맹세하고 명령받고 그에 순종하는 의무를 얘기한다. 그러므로 자신은 죄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담론, 정치에서의 폭력에 대한 견해 등이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실려 있다. 특히 악을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어떠한 상황이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는 칸트의 비판을 꿰뚫고 있는 그녀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를 한때나마 몰이해한 한때의 해프닝이 아쉽기만 하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표현한 악의 진부함(또는 평범함)은 그 어구가 나오게 된 경위의 본래 뜻과 상관없이 인간 그 누구도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악은 어디에도 존재하며 그 누구도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이 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환경 하에서 일지라도 악은 보편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응당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 공동체로서의 책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결국 이것이 칸트의 도덕적 자유이다. 적어도 한나 아렌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