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화
C.P.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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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얘기할 때 필자는 책 내용 배경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 언급 때문에 글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이런 방식이 혹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만 이 책에 대해서는 배경을 포함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책의 중간까지 읽었을 때까지 계속 의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두 문화’는 과학과 인문 두 영역을 이름이다. 이를 문화로 총칭하여 두 문화로 얘기하는 것은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데 여하튼 ‘두문화’라 해서 우선 출판사가 책의 띠를 넣어가며 강조한 것처럼 ‘통섭’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책은 반 정도가 저자의 얘기이고 나머지 반이 이에 대한 논문 형태의 해제로서 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이 해제는 비교적 최근에 기술된 것으로 보이고 해제는 앞을 이해하고 현재를 보는 데 있어 더욱 분명한 시각을 주므로 모두 읽어야 한다.

 

저자는 과학자가 문학을 우습게 알고 문학자는 과학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에게 문학(저자는 문학이라 표현했는데 이를 인문이라 하는 것이 더 맞음)은 전통문화이고 과학은 새로운 문화인데 서로의 몰이해로서 상호 간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의 과학혁명이 막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쌍방 간의 이해의 정도가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 이것이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더 나아가 빈국과 부국의 차이, 요소로 보고 있다.

 

소위 이 연계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당사자들, 즉, 과학과 문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일 것이다. 일반인들이라면 교육을 통해서 접하게 하면 되는 것이고 오늘날 그런 식의 교육이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논증이 오늘날에는 안 맞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진 당시의 영국 교육을 보면 이해가 간다. 즉 포괄적 과학 교육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 관점을 살펴보자. 만약 과학자와 문학가들이 서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과학자는 문학을 읽지 않고 문학가는 과학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관연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아님 과학과 인문을 연계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약간 문제가 보이는 것이 이 둘 다의 논점을 벗어나고 있는 듯 보인다. 저자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의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쯤은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으로 뉴턴이 세르반테스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혼동 또는 미완성의 말은 영국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고 저자의 논증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즉, 이런 종류의 논증은 시대성이 없게 꾸려가야 하고 이러이러 해서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논조로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야기는 이 책의 뒤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논문 형식의 해제에서 다 확인된다. 우선 시대 상황과 저자의 핵심적 논점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오늘날 학문은 그 당시, 영국의 20세기 초,에 비해 정교하고 더욱 전문적이 되었다. 물리 분야도 세부 분야가 20개가 넘고 이들 각각은 서로를 모르며 다른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학문 간을 연결해 주는, 엄밀히 말해서 학문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과학철학, 과학 사회학 등 새로운 학문이 번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당사자들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이며 교육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과학을 초중고 때 채택하여 배우게 함으로서 과학에 대한 소양을 쌓도록 하기에 일반인 관점에서도 해소된 듯하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만 이 ‘두 문화’라는 명명이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관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지점까지 인류는 와 있다고 본다. 지식의 팽창이 너무 급속적이었으므로 지식의 양이 너무 커졌고 지식의 창출이 각 학문이 극도로 세부화된 오늘날에는 점점 더 어려울 수가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한데, 필자의 가장 중요한 화두임, 미래는 점점 새로운 지식의 창출의 속도와 양이 느려지기 시작하며 세부 영역 간의 교류를 통한 지식 창출 시도가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학문 간의 융합이라는 말이 약 20년 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서서히 커지고 있는데 그 뒤에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의 창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두 문화’라는 책은 시대에 안 맞기는 하지만 논문 형식의 해제를 넣어 오늘날의 관점을 비교적 정확히 집어내고 있으며 저자가 원치 않았지만 필자는 다시금 인류가 창출하는 지식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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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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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라는 장편인 줄로 생각했는데 책을 받아보니 각각의 다른 제목의 세 편의 중편 같은 단편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첫 편 채식주의자를 읽고 무슨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전개시키는지 육식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물리적 행동 하나로 자살을 기도하는 딸의 괴상한 행동을 그녀가 하는 꿈 얘기로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일상의 평상심과 한 여자의 일그러진 면은 둘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내 팽겨쳐져 있었다. 영혜라는 정신병자적인 그녀는 꿈을 꾸고 고기를 입에 대지 않기 시작한다.
 
던져 버리려다가 두 번째 편 몽고반점을 읽는 동안 중단편 셋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편 소설임을 알게 되었는데 몽고반점에서 그녀의 육식을 거부하는 동기 부여로부터 정신질환인 것이 확실해지며 아버지가 딸이 거부하는 고기를 억지로 입에 넣는 장면이 전편에 이어 반복해 나오는 데에서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하게 된 나란 독자는 그 폭압적 행동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은, 어쩌면 이런 있을법한 폭력이 인간 세상에 다반사라는 것을 작가는 항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영혜는 채식주의자에서는 남편의 몰이해, 아니 극단적으로 정상인 남편이 그런 상황을 이해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남편과 영혜의 사이는 평행선 상에 있듯이 결코 어울리지 못한다. 결국 이혼으로 이어지고.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영혜와 어느 정도 가교가 이어진다. 인간의 몸에 칠을 하여 그들의 나신을 찍는 비디오 예술가인 형부는 그녀의 발병 후 최초로 이해시킨 장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에 칠을 하여 벌이는 행위는 일상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이어져서야 끝을 맺는다. 첫 편에서 알 수 없는 그녀의 극단적 행위를 작가의 비구도성을 의심하였는데 두 번째 편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끌고 가는 작가이나 매우 섬세하다. 그녀는 왜 꽃이 그려진 그녀의 몸, 다른 나신의 꽃 그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식물과 관련된 모든 것들과 그녀의 몸에 아직 남아있는 몽고반점은 유아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꿈의 내용과 식물, 육식 거부 등은 뭔가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지막 편인 나무불꽃에서는 언니가 관찰자가 된다. 종국에 가서는 음식 자체를 먹지 않음으로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영혜는 언니의 이랬으면 영혜가 괜찮았을까 하는 수없이 많은 과거의 사건들을 반추하며 종내 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유일한 관찰자가 된다. 도무지 아픔이라는 게 동생만의 일은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 어찌 삶이 어수룩한가, 일반적으로 본시 삶이란 게 모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짠하게 다가온다.   
   
얼핏 보면 이야기는 어떤 한 정신병자 얘기를 서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읽고 난 다음에 마음이 편치 않다. 작게는 가족을, 또 어떤 면에서 육식 거부의 상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잔인성을 항변하고, 영혜가 20이 넘도록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는 유아적 상징성과 채식만을 죽음과도 바꿀 만큼 병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혜 자신이 오히려 정상인이었어야 한다는 작가의 상징적 뱉어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작가는 한 여성의 정신사로부터 어떤 가족의 불행을 담았다기보다는 본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아기적 순수성에 대한 그리움을, 영혜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를 억지로 입으로 쑤셔 넣는 강압적인 아버지는 판에 박힌 정형화된 인간, 정말 적응 잘하는 사회의 군상들인지도 모른다. 다만 어린 눈에 비친 우리는 추해 보일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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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박술 옮김 / 읻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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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1차세계대전 때 자원입대한 것이나 대학 졸업자는 1년만 복무하는 규정을 무시하고 다른 병사들과 같은 대우로 처해지기를 희망한 것이나 얼추 보면 애국심에서의 군 입대라기보다는 자신을 던져 버리는 특유의 기질 때문으로도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터에서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유의 고아가 되어 버린다. 깊은 사유를 하고자 했으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던 그가 왜 자원입대를 했고 동료들과 거의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끔찍한 왕따가 되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3자적 입장에서 왕따이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저열하고 비겁하고 무식하고 거의 원숭이 급의 동료였다. 가히 인간의 수평성, , 인간 개개인이 모두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달라 사유가 있을 수도 있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전혀 없는 개체도 있을 법한데 비트겐슈타인의 전쟁터에서의 절규는 바로 이 문제에 너무도 심각하게 부딪치는 듯싶다.

알려지다시피 그의 소위 논리철학논고는 그의 전쟁터에서 사유를 통해 정리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의 논고가 나오게 된 초기의 무작위적 비체계화된, 물론 그의 논리철학논고도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유가 그의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이 책 전쟁일기는 그의 일기를 고스란히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의 일기는 특징적으로 왼쪽에는 하루 일상의 단편을 일상 언어로 오른쪽에는 그의 논리철학의 초기 과정의 사유 파편들이 담겨 있다. 번역은 그의 일기에 충실하게 만들어놓아서 일상 얘기가 없는 부분은 공란으로 사유적 끄적거림이 없는 곳도 공란으로 해 놓아 그의 본래 일기의 형태를 알게끔 실어 넣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예 공란인 쪽들이 많이 있다.

 

그의 일상 일기의 형태는 매우 단편적이나 끔찍하고 그의 사유 일기는 더 단편적이며 몰이해적이다. 다만 이 사유의 부분이 그의 논리철학 논고의 초기 형태이므로 논고에 다가갈 수 있음은 확실해 보이나 파편 조각들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정제되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전쟁 중에 이어지며 문장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려 한다. 사유 부분은 다음에 그의 논고와 같이 소개하겠지만 어렵다는 것만은 상기하기 바란다.

그의 왼쪽 부분은 그냥 우리가 일상 접하는 일기의 형태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저열, 비겁, 작업이라는 명사가 아닐까 한다. 저열과 비겁은 동료 병사들에 대한 그의 시선이고 소위 작업이란 그의 사유를 이름이다. 작업 안 했다, 작업 못 했다, 그런대로 작업했다는 대목이 곳곳에 튀어나온다. 소위 군대라는 것이 폭력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히도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난관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적응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사유를 갈구하며 그 철학적 작업에 때로는 희망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에 아예 묻혀버리기도 한다. 못할 것이라는 공포는 후에 그가 총알과 포탄이 헤쳐나가는 전장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같을 만큼 그의 좌절은 신을 찾게 한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거의 매일 일기 마지막에 써 놓았던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가 갖는 유일한 위안은 철학적 사유가 진보를 보였을 때와 수음이었다. 성적 충동을 집어넣은 매우 사적인 일기 때문에라도 그는 이 일기가 불태워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전쟁 일기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도 여과 없이 실었다고 한다.

사유 부분은 그의 저작을 이해하는데 단연코 도움이 되는 것이 논고가 나오기 전의 초기 버전으로서 그의 사유를 담은 것이 그의 전쟁 일기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가 사유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난해하거니와 더군다나 정제되지 않은 파편들로서 오른쪽 부분은 다시 읽기로 결정한 필자는 일기 속의 사유와 그의 논고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까지만 블로그를 통해 나중에 싣는다.

전쟁에 말단 병사로 참전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그가 상속받은 재산의 일부를 대리인을 통해 유명 예술가들에게 돈을 기부하였다. 릴케도 트라클도 그 수혜자들 중에 있다. 일기에는 트라클의 편지 부분이 나오는데 후원자인 그를 한번 꼭 보고 싶다는 트라클의 편지에 그도 만나기를 열망하는 대목과 결국 전쟁 중에 만나기는 했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어 슬퍼하는 대목이 짠하다.

그의 사유의 여정에 덧붙여 개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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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철강산업으로 한때 유럽 제1의 부호인 대부르주아였고 나치때 유대인이었으면서 그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집안이다. 참고로 당시 부호 또는 명사들로서 해방 신청을 한 유대인들 2천여명 중 해방 허락을 받은 사람들은 - 최종적으로 히틀러가 승인하였다고 알려짐 - 10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이 가문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려주는 예이다.('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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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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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은 그의 극단의 시대에서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는가를 반문하며 모른다라고 단정 진다. 물론 히틀러라고 단순하게 그는 표현하지만 그의 뜻은 역사를 평가할 때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얘기한 것이다. 그의 책이나 세계 제국사등은 서구의 관점에서 써진 것이 맞다. , 제국의 팽창의 원인이든 열강을 논하든 서구의 입장, , 행하는 자의 편에서의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의 정당성은 최소화된다.

만약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지내온 역사를 평가하라면 그 내용이 매우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20세기를 조망하는데 아시아 입장에서 조망하는 것과 한반도 입장에서 조명하는 것은 또 다를 수가 있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도 또한 천차만별일 것은 뻔하다. 역사는 그래서 평가가 역동적이고 민주적이다.

당했던 아시아의 입장에서 써진 책이 바로 제국의 폐허에서이다. 자자는 인도인인 것 같고 매우 잘 준비되고 체계적으로 자기주장을 편 수준 높은 저작이다. 머리말에 이미 그는 1905년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러일전쟁의 승리를 모든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축하해 마지않았는 것이 서구의 압제 하에 식민지를 겪는 동양의 대부분 나라들에게 아시아가 서구를 격파한 놀라운 격려의 일로서 찬사를 듣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한 우리야 그게 반가울 리는 전혀 없었을 게다. 다만 서구의 동양 침탈은 이미 오래전부터 뿌리박혀 있었다.

아시아권은 크게 중동, 인도, 극동과 동남아로 나뉘는데 이야기의 주된 소재는 짐작 가는 바와 같이 중동, 인도와 극동이다. 이집트, 오스만, 인도, 중국이 잃는 자들이고 이들이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항하였는지 어떻게 저항의 임계점을 넘지 못했는지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행한 자인 일본은 어떻게 다른 아시아권과 달라서 전후 어느 일본 사상가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흉내를 내게 되었는지를 매우 잘 준비된 수많은 자료와 그 체계를 통해 보여준다.

느닷없이 들어온 서구의 아시아로의 침탈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와 이집트는 이미 종속되었고 오스만은 명목상이나마 나라이나 서구의 나쁜 기운의 영향권에 이미 들어간 지 오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서히 서구는 극동에도 발 담그는 행위로서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중국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과 일본이 교묘히 침탈을 피해 가면서 그들의 국력을 키워나가게 된 이유를 자세히 그려내는데 내가 판단하기로 중국은 적어도 18, 19세기에도 지속된 평화와 유럽보다 잘 사는 방대한 나라로서 중화라는 교만의 습성이 패착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이게 우리들이 배운 일본 역사와 좀 다를 수 있는데 본래부터 적어도 우리보다는 경제적으로 잘 살아왔던 것 같고 중국처럼 교만에 빠질 만큼 나라가 크질 않고 더군다나 군국주의가 시작될 무렵에 자신들의 자위 방법이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고 구심점으로 천황을 내세우는 작업까지 아우른 결과가 아닌가 한다.

저자는 각 지역에서의 저항운동을 상징적 인물을 내세워 기술하는 방법을 동원하는데 중동에서의 알아프가니, 중국의 량치차오 그리고 인도의 평화주의자 타고르 등을 통해 작게는 자신의 나라 크게는 아시아권의 저항세력의 중심인물로 그리고 있다. 알아프가니는 처음 접하는 인물인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금도 위인으로 칭송될 정도로 그 사회에서 반서구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라 한다. 량치차오의 개혁은 수구세력을 등에 업은 서태후에 의해 실패하게 되는데 만약 이게 성공하였다면 당시 후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이 다라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개혁성은 서구적이고 애국적이다. 1905년의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찬사에 찬사를 시로서 표현한 타고르는 그의 말년에는 일본의 폐쇄적, 서구 모방적 군국주의에 반기를 든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의 중국 및 동남아 침략에서 벌인 행위는 극악적으로 저자는 매우 심한 비판을 가하고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항복이 아시아의 여러 식민화된 나라들이 독립을 차례로 서구로부터 쟁취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처럼 아시아는 제국이 휩쓸고 간 폐허의 주무대였을지도 모른다. 당했던 많은 나라건 행했던 한 나라건 아시아에서 잃은 것은 너무 많다.

잠깐잠깐씩 나오는 조선에 대한 얘기는 프랑스령이었던 베트남 얘기보다 적다. 한반도에서 잠깐 벗어나 아시아권에서 바라본 20세기 아시아의 역사도 그런 것이다. 단군 이래 제일 잘 산다는 작금의 우리, 과연 정신은 그만큼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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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망상
루퍼트 셸드레이크 지음, 하창수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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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법칙은 태양계 운동을 미적분 수학을 적용하여 정확히 설명하는 데의 경이감과 동시에 수많은 논쟁거리를 끌어들였다. 얼핏 보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그 정확성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모든 현상이 수학을 통한 법칙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의 태동을 확실히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사고에는 영혼이나 정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현상을 기계적으로 고려하여 자연 현상의 설명에 접근하는 태도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뉴턴의 과학 체계는 가까이는 데카르트, 멀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간의 과학 접근의 근간을 뒤흔든 일대 사건으로 근대과학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기본적으로 현대 과학도 뉴턴의 유물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은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쉬우나 매우 파격적으로 써진 책이다. 물론 그의 생각의 근저는 유물론적이다. 다만 뉴턴 이래 유물론자라는 과학자들이 많이 출현했어도 뉴턴 자신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인물이 많았었고 이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줄어들어 소위 과학의 대가라는 인물들의 마음속에 신이 들어앉게 할 만큼의 정보의 자리에 과학이 대신 앉게 된 것은 사실이다.

과학의 망상은 현대 과학이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는 사고를 착각의 믿음이라 비판하는, 기계적으로 자연을 여태껏 접근하는 과학은 착각이고 망상이라고 비교적 강한 주장을 펴는 책이다. 물리에서의 환원주의자들을 공격하며 생물에서의 유전정보로부터 의식의 비밀을 인간을 기계적으로 파악하여 알아낼 수 있다는 일련의 실험들의 불완전성을 제시하고 기억이 컴퓨터라는 기계처럼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고처럼 있다는 가정 하에의 연구들, , 과학이라는 연구 저변에 깔린 우주 모두를 물질 만으로 파악하여 이를 기계로 간주하는 유물론적 사고에 대한 문제를 장황하게 다양한 예제를 들어 발제한다.

 

저자는 무엇을 해도 불완전하고 급기야 뒤에 가서는 객관성에 의심을 불어넣으려 한다.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논지는 정신(또는 영혼)을 배제하고 과학을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고 유물론적 사고로서는 우리가 현재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라 한다. 대안으로서 그는 정신을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의 메커니즘과 그 저장소가 있을 것이라는 데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형태 공명이라는 것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 공명의 뜻은 과거 또는 현재 같은 종에게 기억되고 하는 모든 것들이 공간에 관계없이 (, 어디에 있거나 관계없이) 서로 전파된다는 알 수 없는 논리를 편다. 여기서 알 수 없는 논리라는 것은 공명의 뜻은 알겠으나 정말 그런지 그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물론적 사고 바탕 하에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들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고 이들은 모두 실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 난제(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은 유물론적 사고냐 아니면 이원론적(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사고냐의 차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적어도 나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 나아가 유물론 신봉자라고 자연 현상을 모두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언젠가는 자연 현상 모두를 기계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얼마나 될까는 의문이다.

저자가 정신을 얘기하며 풀어 놓은 응시 감지, 텔레파시 등의 모든 것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 과학은 형이하학으로서 지난 인류의 세월은 고대 인류가 의문점으로 제시한 형이상학을 이해함으로 형이하학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이 둘은 반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남아있는 형이상학은 유물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직 그 단계에 과학적으로 근접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객관성을 논하는데 주된 예들로서 과학자의 윤리를 얘기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양립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윤리와 관계없을지라도 과학의 객관성 문제의 예로서 실제의 측정값들이 자주 변하는 변할 수 있다고 본인은 생각 것들을 제시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예를 들어 만유인력 상수의 값은 소수점 아래 12자리로서 매우 적은 값이어서 측정이 어렵다. 이를 소수점을 다 떼어놓고 6.**라는 수치의 차이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논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만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과학의 연구에 임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저자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형태 공명설 등은 그 실체를 실험으로 증명할 일이고 기존의 유물론적 사고에 입각한 일련의 연구들이 아직 결말(또는 결말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름)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공명이 맞다고 얘기할 수 없다.

열린 마음은 언제 불쑥 우리같이 평범한 과학자들이 자는 사이 나타나 내가 아인슈타인이요 하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과학의 망상의 논지의 취지는 알겠으나 자기주장의 체계화가 좀 덜 된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논지와 상관없이 어차피 과학이라는 것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에 발을 담그지 않고는 안될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를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어서 올해 그의 탄생 2400년을 다시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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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바꾸어야 할 typo를 지적한다. 끈 이론에서의 해의 개수는 10,500개가 아니라 10의 500승이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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