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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화
C.P.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평점 :
보통 책을 얘기할 때 필자는 책 내용 배경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 언급 때문에 글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이런 방식이 혹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만 이 책에 대해서는 배경을 포함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책의 중간까지 읽었을 때까지 계속 의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두 문화’는 과학과 인문 두 영역을 이름이다. 이를 문화로 총칭하여 두 문화로 얘기하는 것은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데 여하튼 ‘두문화’라 해서 우선 출판사가 책의 띠를 넣어가며 강조한 것처럼 ‘통섭’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책은 반 정도가 저자의 얘기이고 나머지 반이 이에 대한 논문 형태의 해제로서 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이 해제는 비교적 최근에 기술된 것으로 보이고 해제는 앞을 이해하고 현재를 보는 데 있어 더욱 분명한 시각을 주므로 모두 읽어야 한다.
저자는 과학자가 문학을 우습게 알고 문학자는 과학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에게 문학(저자는 문학이라 표현했는데 이를 인문이라 하는 것이 더 맞음)은 전통문화이고 과학은 새로운 문화인데 서로의 몰이해로서 상호 간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의 과학혁명이 막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쌍방 간의 이해의 정도가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 이것이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더 나아가 빈국과 부국의 차이, 요소로 보고 있다.
소위 이 연계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당사자들, 즉, 과학과 문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일 것이다. 일반인들이라면 교육을 통해서 접하게 하면 되는 것이고 오늘날 그런 식의 교육이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논증이 오늘날에는 안 맞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진 당시의 영국 교육을 보면 이해가 간다. 즉 포괄적 과학 교육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 관점을 살펴보자. 만약 과학자와 문학가들이 서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과학자는 문학을 읽지 않고 문학가는 과학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관연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아님 과학과 인문을 연계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약간 문제가 보이는 것이 이 둘 다의 논점을 벗어나고 있는 듯 보인다. 저자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의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쯤은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으로 뉴턴이 세르반테스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혼동 또는 미완성의 말은 영국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고 저자의 논증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즉, 이런 종류의 논증은 시대성이 없게 꾸려가야 하고 이러이러 해서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논조로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야기는 이 책의 뒤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논문 형식의 해제에서 다 확인된다. 우선 시대 상황과 저자의 핵심적 논점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오늘날 학문은 그 당시, 영국의 20세기 초,에 비해 정교하고 더욱 전문적이 되었다. 물리 분야도 세부 분야가 20개가 넘고 이들 각각은 서로를 모르며 다른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학문 간을 연결해 주는, 엄밀히 말해서 학문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과학철학, 과학 사회학 등 새로운 학문이 번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당사자들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이며 교육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과학을 초중고 때 채택하여 배우게 함으로서 과학에 대한 소양을 쌓도록 하기에 일반인 관점에서도 해소된 듯하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만 이 ‘두 문화’라는 명명이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관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지점까지 인류는 와 있다고 본다. 지식의 팽창이 너무 급속적이었으므로 지식의 양이 너무 커졌고 지식의 창출이 각 학문이 극도로 세부화된 오늘날에는 점점 더 어려울 수가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한데, 필자의 가장 중요한 화두임, 미래는 점점 새로운 지식의 창출의 속도와 양이 느려지기 시작하며 세부 영역 간의 교류를 통한 지식 창출 시도가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학문 간의 융합이라는 말이 약 20년 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서서히 커지고 있는데 그 뒤에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의 창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두 문화’라는 책은 시대에 안 맞기는 하지만 논문 형식의 해제를 넣어 오늘날의 관점을 비교적 정확히 집어내고 있으며 저자가 원치 않았지만 필자는 다시금 인류가 창출하는 지식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