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법칙은 태양계 운동을 미적분 수학을 적용하여 정확히 설명하는 데의 경이감과 동시에 수많은 논쟁거리를 끌어들였다. 얼핏 보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그 정확성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모든 현상이 수학을 통한 법칙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의 태동을 확실히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사고에는 영혼이나 정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현상을 기계적으로 고려하여 자연 현상의 설명에 접근하는 태도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뉴턴의 과학 체계는 가까이는 데카르트, 멀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간의 과학 접근의 근간을 뒤흔든 일대 사건으로 근대과학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기본적으로 현대 과학도 뉴턴의 유물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은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쉬우나 매우 파격적으로 써진 책이다. 물론 그의 생각의 근저는 유물론적이다. 다만 뉴턴 이래 유물론자라는 과학자들이 많이 출현했어도 뉴턴 자신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인물이 많았었고 이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줄어들어 소위 과학의 대가라는 인물들의 마음속에 신이 들어앉게 할 만큼의 정보의 자리에 과학이 대신 앉게 된 것은 사실이다.
‘과학의 망상’은 현대 과학이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는 사고를 착각의 믿음이라 비판하는, 기계적으로 자연을 여태껏 접근하는 과학은 착각이고 망상이라고 비교적 강한 주장을 펴는 책이다. 물리에서의 환원주의자들을 공격하며 생물에서의 유전정보로부터 의식의 비밀을 인간을 기계적으로 파악하여 알아낼 수 있다는 일련의 실험들의 불완전성을 제시하고 기억이 컴퓨터라는 기계처럼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고처럼 있다는 가정 하에의 연구들, 즉, 과학이라는 연구 저변에 깔린 우주 모두를 물질 만으로 파악하여 이를 기계로 간주하는 유물론적 사고에 대한 문제를 장황하게 다양한 예제를 들어 발제한다.
저자는 무엇을 해도 불완전하고 급기야 뒤에 가서는 객관성에 의심을 불어넣으려 한다.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논지는 정신(또는 영혼)을 배제하고 과학을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고 유물론적 사고로서는 우리가 현재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라 한다. 대안으로서 그는 정신을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의 메커니즘과 그 저장소가 있을 것이라는 데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형태 공명이라는 것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 공명의 뜻은 과거 또는 현재 같은 종에게 기억되고 하는 모든 것들이 공간에 관계없이 (즉, 어디에 있거나 관계없이) 서로 전파된다는 알 수 없는 논리를 편다. 여기서 알 수 없는 논리라는 것은 공명의 뜻은 알겠으나 정말 그런지 그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물론적 사고 바탕 하에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들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고 이들은 모두 실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 난제(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은 유물론적 사고냐 아니면 이원론적(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사고냐의 차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적어도 나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 나아가 유물론 신봉자라고 자연 현상을 모두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언젠가는 자연 현상 모두를 기계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얼마나 될까는 의문이다.
저자가 정신을 얘기하며 풀어 놓은 응시 감지, 텔레파시 등의 모든 것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즉, 과학은 형이하학으로서 지난 인류의 세월은 고대 인류가 의문점으로 제시한 형이상학을 이해함으로 형이하학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이 둘은 반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남아있는 형이상학은 유물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직 그 단계에 과학적으로 근접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객관성을 논하는데 주된 예들로서 과학자의 윤리를 얘기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양립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윤리와 관계없을지라도 과학의 객관성 문제의 예로서 실제의 측정값들이 자주 변하는 – 변할 수 있다고 본인은 생각 – 것들을 제시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예를 들어 만유인력 상수의 값은 소수점 아래 12자리로서 매우 적은 값이어서 측정이 어렵다. 이를 소수점을 다 떼어놓고 6.**라는 수치의 차이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논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만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과학의 연구에 임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저자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형태 공명설 등은 그 실체를 실험으로 증명할 일이고 기존의 유물론적 사고에 입각한 일련의 연구들이 아직 결말(또는 결말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름)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공명이 맞다고 얘기할 수 없다.
열린 마음은 언제 불쑥 우리같이 평범한 과학자들이 자는 사이 나타나 내가 아인슈타인이요 하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과학의 망상’의 논지의 취지는 알겠으나 자기주장의 체계화가 좀 덜 된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논지와 상관없이 어차피 과학이라는 것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에 발을 담그지 않고는 안될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를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어서 올해 그의 탄생 2400년을 다시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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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바꾸어야 할 typo를 지적한다. 끈 이론에서의 해의 개수는 10,500개가 아니라 10의 500승이다.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