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노래 -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몇 주 동안 이 책과 사랑에 빠진 듯 조금씩 음미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작년 <한겨레>에 서경식 교수가 이 책에 대해 칼럼을 쓸 당시만 해도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생태였는데 올 9월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주문했다.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저자의 글은 시종 조용하고 온화하지만 깊은 성찰과 날카로움도 아울러 갖추고 있다. 저자는 돈도, 권력도 없고 어떠한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무르며 일본 내부 및 세계의 여러 곳을 깊이 응시하는 삶을 유지한다. 그것은 상대와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주변인의 시선이지 타자에 무관심한 방관자의 시선이 아니다.

 

국가의 선전에 맹목적인 추종을 거부하고 주변인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시선을 잃지 않는 저자는 항상 의심하고 회의하고 사색하는 지성인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종전 후 어느 날 전차안에서 저자는 사람 좋아보이는 아버지나 부부를 보며 똑같은 사람이 어제까지 중국 대륙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한지 혹은 악한지 묻기 보다는 많은 인간을 악마로도 만들고 천사라도 만드는 사회 전체, 그 역사와 구조를 고찰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라는 판단에 도달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이후 그의 사고방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어떤 인간도 악마가 아니기에 나는 사형에 반대하며, 전쟁은 어떤 인간이라도 악마로 만들기에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267)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1919년 양의 해인 기미년에 태어난 저자는 성정이 온화하고 멋부리지 않고 물 흐르듯 낮은 음성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되 깊고 치열한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가 더 분명히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고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강요할 수 있겠는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과 역사를 살아갈 뿐.

 

저자가 시종 견지하는 확고한 신념은 .... 생명의 가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그들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전쟁은 정치적 행위요 모든 정치적 행동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492)

 

그는 또한 베트남전쟁을 목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516)

 

 

저자의 날카로운 지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한토막

[슈바이처 박사 관련 일화](363 ~ 366)

프랑스에서 알게 된 덴마크인 간호사가 저자에게 슈바이처 박사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가 현대의 성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는 충격을 받으며 그녀에게 나는 어느 누구도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 “식민지 제국의 국민이 식민지에서 병원을 경영할 때에는 성자가 되기에 앞서 식민지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식민지 제국주의야말로 위선의 체계이며, 개별적인 선의를 그 체계에서 억지로 갈라놓는 것이 체계 자체에 맞서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그러나 저자는 슈바이처 박사를 도우러 아프리카 오지로 찾아가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않기 위해 위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개월 뒤 슈바이처 박사의 행태에 실망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내오게 되는데 저자가 그녀에게 성자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은 성자를 믿고 있던 젊은 아가씨를 믿었기 때문이고 그녀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경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지성과 따뜻한 감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억에 남는 몇몇 구절도 있다.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한다.”(프로방스어 속담) 342

 

젊은 연인들과 노인에게는 모든 날이 소중한 것이기에, 날씨나 환경은 아무래도 좋을지 모른다. 젊은 연인들에게는 미래가 너무도 길기 때문에, 노인들에게는 미래가 너무도 짧기 때문에.”(436)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동료의식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없다.”(453)

 

“.... 두 인간이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기분이 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분은 본인마저도 예측할 수가 없게 그지없이 변전하는 법이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477)

 

여행은 다시간적 경험이다.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에는 각각의 달력과 각각의 축제, 회계연도, 계절,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절목을 붙인 시간이 있다. 물리적 시간은 당연히 공통이겠으나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다시 말해 살 수 있는 역사는 장소에 따라 상이하다.”(541)

 

끝으로 아쉬운 점 몇 가지를 적어둔다.

1. 개인적으로 가토 슈이치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책을 통해서 였는데(마루야먀 마사오와의 대담 형식), 이 책 <양의 노래>에는 저자 가토 슈이치라는 사람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해설이 없는 게 아쉬웠다. 위에 언급한 서경식 선생의 한겨레 컬럼을 아쉬운데로 참고할 수 밖에....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7599.html

 

2. 책 초반부터 일본의 여러지명이 나오고 중후반부로 갈수록 전세계 각지의 체류지가 나오는데 원서에는 없더라도 번역서에는 좀 더 친절하게 해당 지도를 실었더라면 더욱 친근하게 책을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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