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파편들 - 도널드 그레그 회고록
도널드 P. 그레그 지음, 차미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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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그레그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 그가 주한미대사로 내정되었다는 <한겨레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CIA 출신으로 비밀공작을 담당해 온 그가 주한미대사로 부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기사 내용이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첫 인상은 당연히 어둡고 음습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 부터인가 그는 대사직을 그만 둔 이후에도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을 보며 그에 대한 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갔다.

 

지금도 그 당시의 기사 스크랩을 보존하고 있는데, 다시 스크랩북을 찾아 확인해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은 도널드 그레그의 평생에 걸친 그의 발자취를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그의 자서전이다.

 

우리와 연관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그의 역할, 한국의 CIA 지부장으로서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그의 생명을 구하는데 일조하고, 주한미대사로 근무하며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시킴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 작성에 기여하는 장면, 현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뉴욕의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직을 맡아 현재까지 남북의 평화정착에 힘을 보태고 있는 등 그의 평생은 우리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현대사의 내밀한 속살 한켠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다.

 

그는 요즈음 보수쪽 인사들로부터 친북인사쯤으로 경원시 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이고 그의 신념에 따라 평생을 성실하게 공직에 종사해온 사람이다.

 

그는 윌리엄스 대학 재학시절 철학과 학과장이던 존 윌리엄 밀러 교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그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한다.인간을 절대로 하나의 물건으로 대하지 말라, 인간은 타고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겉모습 뒤에 숨은 실체를 파헤쳐라

 

책은 시종 담담하게 진행되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고 매우 흥미진진하고 따뜻하다. 저자의 숨결이나 체온이 전해진다고 할까. 특히 일본 근무 시절은 그에게 있어 더 없이 행복하고 안온했던 시간이었던 듯싶다. 그가 그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느껴진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1> 그레그는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활동을 상술하지 않고 있다. 부끄럽고 슬픈 기억 때문일까?

 

참고로 팀 와이너의 잿더미의 유산(랜덤하우스, 2008) 105쪽에는 그레그의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활동에 대한 기술이 있다. 한국인 요원들을 훈련시켜 압록강 너머 중국 지역으로 침투시켰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참담한 작전 실패의 내용이.

 

2>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의 기술은 너무 표피적이어서 전쟁의 역사적 배경이나 성격에 대해서는 이해의 균형을 위해 다른 서적을 함께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저자가 존경하는 에이브럼스 장군이나 저자 모두 베트남전쟁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 무지하거나 짐짓 눈을 감고 있는 느낌이다.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창비), 우상과 이성(한길사), 베트남전쟁(두레)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배경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8월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쫒겨났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지명(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프랑스군과 대결했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 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 디엔 비엔 푸에서의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제1차 베트남 전쟁이다.(<베트남전쟁> 6)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전쟁이었던 1946~ 1954년까지의 1차 베트남전쟁이 종결되면서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 그 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확대된 전쟁이 말하자면 2차 베트남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휴전협정은 북위 17도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남북 베트남으로 잠정적 행정 관할구역을 정한 뒤에, 2년 후인 1956년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1954년 정전협정합의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휴전성립 1년 이 지난 1955년에 미국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이 제2차 베트남전쟁의 결정적이 원인이 되었다.(리영희, <대화> 341쪽 참조)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 · 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전환시대의 논리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 가장 보람 있고 평생을 바쳐 노력하고 있는 분야는 남북한 사이의 평화와 협력이다. 빛도 나지 않고 미국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기도 힘든 분야에서 애쓰고 있는 저자의 진심에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부디 그의 노력이 작은 결실이나마 맺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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