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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평점 :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1.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공포, 굶주림 무엇보다도 여성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기는 전시 중 강간에 대한 묘사가 더없이 리얼하고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2.
이 책은 베를린이 소련군에 함락된 시기인 1945년 4. 20. ~ 6. 22.까지 한 이름 없는 여성이 겪은 20여일 간의 나날을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기술한 일기이다.
작년 김태우의 신간 <냉전의 마녀들>을 읽으며 이 책을 알게 되어 구매해 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초반 너무 참혹한 모습에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다가 서서히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다 읽게 되었다.
3.
책 내용 중 핵심 부분을 이루는 것은 전쟁 중 굶주림과 점령군 소련 군인에 의해 저질러지는 베를린 거주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다. 또한 패전 후 독일 남성들의 무기력함도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의 한 장면이다.
소련군에 의한 강간 모습은 과장 없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소련군인들을 단순히 악마화 하지 않는다. 독일군들도 소련에서 같은 혹은 더한 참혹한 만행을 저지른 사실을 소련군인의 입을 통해 공평하게 진술하고 있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상황에 적응해 가게 되고, 개중에는 인품과 교양과 매너를 지닌 소련 장교들과도 교제하며 그들의 도움으로 굶주림을 견뎌나간다.
책을 읽으며 참혹한 전시 강간 장면 못지 않게 생과 사를 넘나드는 굶주림에 대한 상황묘사가 피부에 와 닿았다. 한 조각의 빵, 약간의 기름, 생선, 고기 등에 대한 소중함이 생생히 느껴진다.
4.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현실에 적응하며 힘차게 시간을 견디어 나간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파멸시키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60쪽 및 259쪽)라는 문구를 상기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현실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라틴어 경구(홉스의 말이라고 함)를 되뇌이며 힘겹게 이겨낸다.(211쪽 및 236쪽)
5.
멀게만 느껴지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8월 현재까지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중간의 대만 문제는 전쟁위기를 고조시기고 있다.
영화 또는 드라마로 가볍고 영웅적인 스토리로 소비되고 있는 '전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핀다로스의 말이라고 하는데 에라스무스로 인해 유명해졌다는 다음 라틴어 경구로 글을 맺는다.
“ 격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은 달콤한 것이다”
(Dulce bellum inexpert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