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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팔지 마세요! 청년사 고학년 문고 1
위기철 지음, 이희재 그림 / 청년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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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학적 서사로 이야기할 만한 것이 의외로 없어서...^^; 주요인물별로 감상을 정리해봤음.)

보미 : 교실에 들어올 때 이마에 비비탄 총알을 맞고, 그냥 상대방 아이와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라 뭔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느낀다. 벽보를 만들기 직전까지는 놀라운 용기와 추진력으로 무기와 무기 장난감의 위험성을 파헤쳐 간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집단 테러 행위와 겁부터 먹은 친구 민경이의 눈물 앞에서 보여주는 의연하고 냉철한 판단은 압권이다. 그런데 설득력 있는 자료를 찾고 벽보 문구를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주도권이 급속하게 민경이에게 넘어간다. 또 비비탄 테러의 주동자였던 경민이가 평화모임을 보며 변화하여 재능 기부를 자원하고 민경이와 가까워져 찰떡 호흡을 보여주는데(그러고 보니 이름도 대칭!), 보미는 그때 그저 친구에게 질투를 부리는 평범한 아이가 되어 버린다. 제니에게 발견된 이후의 행적이 그래서 더 궁금하다. 국제 연대의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아쉽다.

 

보미의 선생님 : 첫 등장 장면의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권위적이면서도 반권위를 지향하는 이중성? 무기 장난감 가져오기를 금지해서 반발을 불러오는데, 그 대신 보미가 스스로 깨달은 생각을 아이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탐구 활동을 이끌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역시 그것은 여러 가지 제약에 막히는 이상적인 바람일 것이다. 교장님의 지시로 하고 싶은 칭찬도 애써 참는데, 꼭 그렇게 완전 무심한 척 할 필요가 있을까? 초반에 긴장감을 높이려고 의도한 설정 같은데, 사실은 그런 이유보다 더 큰 갈등 상황을 기대하게 했었다. 반권위의 가치 지향 밑에서 드러나는 권위적 성품의 제동 같은.

 

보미의 아빠 : 같은 자세와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이 이야기의 전개와 병행한다. 50개의 TV 채널을 돌리며 하품을 하다가 보미를 보고 놀라서 보미 엄마를 부르는 행동을 이야기의 주요 전환점에서마다 반복한다. 그런데 휴일을 이렇게 늘어지게 보내는 아빠에게서 어떻게 그런 실천력 충만한 딸이 나왔을까?

 

제니 : 사실은 무기 문제가 정말로 심각한 미국의 아이가 뒤늦게 한국의 보미 등에게 자극 받아 행동에 나서고 있다. 아이들의 결집과 의견 표출도 한국의 경우보다 훨씬 어른 의존적이다. 아마도 한국 작가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염소와 늑대의 옛이야기가 축이 되는데, 한국 이야기에서는 오누이와 호랑이 이야기를 축으로 삼았다면 대칭적으로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미국 이야기로 넘어오면서 문체조차 미국식으로 변하는 재미있는 양상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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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아이들 : 작품에 한국, 그리고 미국의 아이들만 나오는 것은 상당히 아쉽다. 어차피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내세우는 기획 동화라면 더 거창한 연대의 상상을 해도 좋았을 것이다. 더 끔찍한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풀이되는 곳까지. “2006년 이후 이스라엘에 의한 혹독한 봉쇄가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의 아이들에게 폭력과 죽음은 일상의 한 부분이다. (······)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팩트북' 자료를 보면, 서울의 절반을 조금 넘는 넓이(360㎢)에 사는 가자지구 인구 171만명 가운데 만 14살 이하 아동은 44% 정도인 75만 명에 달한다.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을 '아이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공격'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008년 이스라엘 공습 때 숨진 1400여 명 가운데 어린이는 353명, (2012년 11월) 14일 이후 닷새째 이어지고 있는 폭격으로 숨진 48명 가운데 어린이는 10명 안팎이다.” (한겨레, 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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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졸업 송언 초등학교 웅진책마을 53
송언 지음, 유승하 그림 / 웅진주니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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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살아오면서 정말 그때는 더없이 친밀한 관계였던 것이 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에 정리가 안 된다면? 대단한 인적 자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새로운 만남들과 뒤죽박죽 엉키면서 굉장히 복잡하고 성가신 삶이 될지도 모른다.

동화 작가이자 초등학교 선생님인 지은이의 축 졸업······’은 지은이 본인이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면서, 여러 각도로 달리 읽힐 수 있는 여지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지은이는 과거에는 분명 동화와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자아 정체성이 교사라는 직업적 정체성보다 앞에 서는 모습을 보였었다. 변화된 모습은 일군의 개구쟁이 연작들을 잦은 간격으로 발표하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작품들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과 아동문학다운 캐릭터가 비로소 나타났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는 연작들은 두 다른 정체성이 이제 화해를 이루고, 심지어 정체성의 우선순위가 바뀌기까지 한 소산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작가로서 어깨에 잔뜩 들었던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과 작가 자신의 관계를 편안하게 관찰한 소산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연작들 사이에서 축 졸업······’은 특별히 긴 호흡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를 풀어갔다. 일단 교사로서 승진과 거리가 먼 자신을 작가적 능력으로 포장한 자랑담으로 아니꼽게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작품 속 다른 선생님들이 할아버지 선생님을 부러워하고 있다. 아니꼽게만 보지 않으려 하면,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일깨우는 자극이 발견된다. ‘할아버지 선생님이 비교의 기준이 되어, 끈질긴 승민이의 행동에 대해 계속 이유를 묻게 된다. 그런데 그 승민이가 끈질기게 이어가는 행동의 이유에 눈을 맞추다 보면, 보편적인 또 다른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진실되고 오래 가는 관계 맺기는 실은 작은 반복적 실천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꼬마들에게 할아버지 선생님은 처음으로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자고 말한다. 승민이는 그 말을 진심으로 실천한다. 4학년(?) 담임선생님에게 승민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기억하기 위해 계속 찾아간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 눈도장만 찍고 나오는 그 일과가 승민이의 초등학교 생활을 보이지 않게 지탱하는 자못 숭고한 의식이 되고, 독자들은 그 점점이 이어지는 싱거운 의식을 지켜보며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자기 식으로 실천하는 한 아이의 성장과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소중한 만남이니까 이어간다기보다 이어갔기 때문에 만남이 소중해진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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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비룡소 걸작선 2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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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의 선입관을 깨는 이야기이다. 가출은 부모와 가정의 울타리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지독한 고생과 함께 자기 파괴에 이르기 십상인 반항 행위이다. 그런데 클로디아는 가출을 결심하고도 품위 있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 결과는 거리를 무작정 헤매는 것이 아닌 거대 미술관으로의 치밀하게 계획한 잠입이다. 그리고 16세기 유물인 호화 침대를 잠자리로 택한다.

클로디아가 왜 가출을 결행하는지, 가출 행위가 왜 조각상의 진위 탐구로 전환되는지, 작품 속에 나름의 설명이 나오지만, 그 설명의 설득력은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서 언급되는 부모의 말 못할 마음고생과 클로디아가 조각상의 스케치를 품에 안고 우는 모습은 때늦은 부연설명이거나 지나친 정서적 비약으로 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매력이 크다. 단지 이야기 전체의 화자와 주인공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의문을 품고 따라가게 하는 구조 덕분만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 구조도 신선하긴 하지만, 그 이야기의 화자가 풍기는 우아한 귀족미가 바로 보편적인 매력의 근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결이 미술관의 르네상스 미술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우아하고 고상한 세계가 풍기는 매력은 시종 작품 전체에서 흘러나온다. 따지고 보면 영미의 많은 아동문학 고전들이 그 매력 요소를 활용했다. ‘소공녀’, ‘소공자’, ‘키다리 아저씨’, ‘비밀의 화원’, 그리고 (작가는 일본인이지만) 만화 캔디. 클로디아가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검은 대리석 욕조의 물을 틀고 마는 화려한 욕실 장면은 그 우아한 매력의 감각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비밀의 힘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즐거움을 준다. 비밀의 내용보다 비밀을 가진 그 자체가 타인 앞에서 나의 자긍심을 세워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클로디아의 가출이 내적 성장으로 승화되게 하는 힘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작품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카드게임에 그 의미가 이미 담겨 있다. 나의 패를 보여주지 않고 상대방의 호기심을 증폭시켜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게 만드는 것. 어떻게 하든 내 궁금증의 노출을 상대방의 것보다 지연시키면서 참는 것. 그것이 게임에서 이기는 비결이고,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것을 지키면서 클로디아와 제이미는 프랭크와일러 부인의 마음을 샀고, 프랭크와일러 부인은 조각상의 비밀을 푸는 클로디아의 감격을 배가시켰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한 아이가 고상한 비밀을 가지는 것이 곧 인간으로서 멋진 성장에 다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1962년 작가 코닉스버그는 동시에 출간한 데뷔작 두 편으로 영미권 아동문학의 최고 권위 상인 뉴베리 상 후보에 오르더니, 결국 두 작품이 모두 상을 받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두 작품의 원 제목이 아동문학 작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매우 특이해서 또한 재미있다. 매우 특이하지만, 모범적인 제목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글 번역본의 제목은 또 너무 평이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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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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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 이 책을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책이 그토록 좋은 작품이라고 고전 대우를 받는 까닭을 알고 싶어서였다······.

낭기열라라는 괴상한 이름의 땅에서 주인공 형제가 겪는 난데없는 모험. 게다가 그 괴상한 땅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낭길리마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연결된다니······. 판타지는 현실에서 다른 세상으로 과학적 논리를 뛰어넘어 연결되는 이야기이지만, 이상하게 이 작품의 판타지 세계는 내게 자연스럽지 못했고 그것은 다시 읽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낭기열라와 낭길리마라는 다른 시공간을 줄줄 설명하는 카알의 형 요나탄은 누구란 말인가? 카알이 전혀 생소해하는 것으로 봐서는 북유럽 전설 속의 익숙한 무대만도 아닌 것 같은데······. 현실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방식이 납득되지 않아서, 낭기열라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사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없었던 것이 이 책을 첫 번째 읽을 때의 소감이었다. 그리고 카알 스스로 희한해하듯 결정적인 순간마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기막힌 우연, 우연······.

이번에 새로 읽고 나서 카알과 요나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카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형 요나탄. 그러면서도 요나탄은 카알을 끔찍이 아끼고, 모든 것을 함께 하려고 하고, 카알은 형과 함께라면 두려움을 견디며 없던 용기를 내고, 그리고 조금씩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흠 잡을 데 없는 엄친아 요나탄이 아니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민폐만 끼치는 꼬맹이 카알이다. 카알은 바로 평범하고 내세울 것 별로 없는 우리 보통 독자들를 대표하는 것 아닌가? 카알이 한없이 의지하는 형 요나탄은 어쩌면 카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계속 울려나오는 자기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 목소리를 용기라고 불러도 좋겠고, ‘자존심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겠다. 낭기열라든 낭길리마든 다 카알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곳이 아무 다툼 없는 이상향이 아닌 것은 그 갈등과 위기를 헤쳐가는 모험 자체가 카알이 꿈꾸는 멋진 삶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 공간으로의 통로는 죽음이다. 죽음을 어린이문학에서 이렇게 파격적으로 다룬 예가 흔치 않을 것이다. 작품의 결말은 아예 형제의 동반 투신이다. 더 성숙한 경지로 올라선다는 상징의 의미가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극단적 행동이다. 사자와 같은 용맹함은 때로 매우 두려운 실천을 해냈을 때 가질 수 있다. 엄마 아빠 없이 처음 동생과 집을 지켜야 할 때, 돈을 뺏는 동네 선배에게 맞서서 순순히 따르길 거부할 때, 친구들의 따돌림 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똑같이 될 각오로 당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 때······.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길에는 여러 번의 두려운 실천이 캬틀라의 아가리처럼 불을 뿜으며 용기를 시험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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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동네 (양장)
김남중 지음, 류충렬 그림 / 창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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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1, 2학년을 보낸 곳은 서울 변두리의 움푹 패인 분지 같은 동네였다. 처음 그 동네에 이사를 갔을 때에는 목장에서 키우는 젖소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코는 금방 적응을 하고 무감각해졌다. 대신 나는 내 성장기의 거의 유일한 자연 체험을 그 동네에서 할 수 있었다. 마을의 너른 공터에서 자치기하기, 뒷산을 헤매며 동네 형들과 칡뿌리 캐먹기, 겨울에 얼음이 깔린 논에서 썰매타기, 그리고 마을의 터주대감인 500년 묵은 은행나무 그늘에서 날마다 쳐다본 잘게 부서진 하늘······. 마을 아저씨들 중에는 재건대원이라고 불린 넝마주이로 먹고 사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아저씨들 등에는 덩치의 두 배도 넘는 대나무 광주리가 걸려 있었고, 그 광주리에는 큰 고개를 뜻하는 한자가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한강 남쪽의 대치동이었다.

새로 길을 닦거나 택지를 개발할 때 말 그대로 재건사업에 우르르 동원되고, 일이 없을 때에는 광주리를 메고 넝마를 줍던 아저씨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저씨들이 고향을 등지고 올라와 먹고 살려고 닦아 놓은 길 옆으로 아파트와 빌딩들이 들어서고, 아저씨들과 대치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삶의 흔적은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지금의 대치동은 옛날의 그 궁상맞은 기억을 굳이 간직할 필요가 없을까. 간직해주든 말든 지금의 그 길 밑에는 그 길을 다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리시였던 지금의 익산시는 1977년의 폭발사고 덕분에 30년은 개발이 앞당겨졌다는 말을 듣는다. 교통의 요지이면서 무분별한 유흥가로 굳어지던 도시가 본의 아니게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빛고을이란 뜻을 담은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성지로 떠오르면서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역사의 화석으로 자리매기고 있다. ‘기찻길 옆 동네는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역사의 물줄기 옆에서 고스란히 그 물살을 맞으면서 그 흐름에 크든 작든 영향을 끼친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흐름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물살의 방향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작품 속의 국어선생이 한 말처럼, ‘똥통 속에 빠져도 더러워지지 않는, 왜냐면 때를 지우고 악취를 없애는 데 제 몸을 녹이기 때문인 비누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제 몸을 녹이지 못한 사람들이 쓸모없지 않은 것은 처음에 누군가 뚫은 길도 살아남은 다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야 비로소 길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크고도 잘 이어지지 않는 두 사건을 절묘하게 엮어 하나의 주제로 가져간 작품의 서사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다 각자의 삶을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고, 마지막의 출석부 장면은 끈질긴 희망의 확인을 형상화해서 감동을 자아낸다. 그런데 그런 세부적인 생명력 부여와 주제의 튼실한 부각이란 요건에서 볼 때 아쉬움 또한 분명히 있다. 선학이는 광주에 와서 한동안 서경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정말 괴로워한다. 그 고통이 충분히 당연한 것이기에 은성이에 대한 풋풋한 열정에 돌연 묻혀 버리는 전개는 적잖이 갑작스럽다. 진심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대목이다. 결국 모아지는 역사적 관점도 여러 평범한 인물의 삶에서 직조되다 보니 핵심에 육박하지 못한 미흡함이 있다. 광주 항쟁의 내외적 발생 구조는 그만큼 제대로 다루기에 벅찬 문제이다.

大峙라고 굵게 쓴 광주리를 멘 아저씨들이 대치동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든 지금의 대치동은 휘황찬란한 자본의 에너지로 빛나고 있다. 그것을 알든 모르든 이렇게 지금은 대치동이 이끌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우리는 옆에서든 그 속에서든 몸으로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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