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옆동네 (양장)
김남중 지음, 류충렬 그림 / 창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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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1, 2학년을 보낸 곳은 서울 변두리의 움푹 패인 분지 같은 동네였다. 처음 그 동네에 이사를 갔을 때에는 목장에서 키우는 젖소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코는 금방 적응을 하고 무감각해졌다. 대신 나는 내 성장기의 거의 유일한 자연 체험을 그 동네에서 할 수 있었다. 마을의 너른 공터에서 자치기하기, 뒷산을 헤매며 동네 형들과 칡뿌리 캐먹기, 겨울에 얼음이 깔린 논에서 썰매타기, 그리고 마을의 터주대감인 500년 묵은 은행나무 그늘에서 날마다 쳐다본 잘게 부서진 하늘······. 마을 아저씨들 중에는 재건대원이라고 불린 넝마주이로 먹고 사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아저씨들 등에는 덩치의 두 배도 넘는 대나무 광주리가 걸려 있었고, 그 광주리에는 큰 고개를 뜻하는 한자가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한강 남쪽의 대치동이었다.

새로 길을 닦거나 택지를 개발할 때 말 그대로 재건사업에 우르르 동원되고, 일이 없을 때에는 광주리를 메고 넝마를 줍던 아저씨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저씨들이 고향을 등지고 올라와 먹고 살려고 닦아 놓은 길 옆으로 아파트와 빌딩들이 들어서고, 아저씨들과 대치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삶의 흔적은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지금의 대치동은 옛날의 그 궁상맞은 기억을 굳이 간직할 필요가 없을까. 간직해주든 말든 지금의 그 길 밑에는 그 길을 다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리시였던 지금의 익산시는 1977년의 폭발사고 덕분에 30년은 개발이 앞당겨졌다는 말을 듣는다. 교통의 요지이면서 무분별한 유흥가로 굳어지던 도시가 본의 아니게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빛고을이란 뜻을 담은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성지로 떠오르면서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역사의 화석으로 자리매기고 있다. ‘기찻길 옆 동네는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역사의 물줄기 옆에서 고스란히 그 물살을 맞으면서 그 흐름에 크든 작든 영향을 끼친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흐름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물살의 방향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작품 속의 국어선생이 한 말처럼, ‘똥통 속에 빠져도 더러워지지 않는, 왜냐면 때를 지우고 악취를 없애는 데 제 몸을 녹이기 때문인 비누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제 몸을 녹이지 못한 사람들이 쓸모없지 않은 것은 처음에 누군가 뚫은 길도 살아남은 다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야 비로소 길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크고도 잘 이어지지 않는 두 사건을 절묘하게 엮어 하나의 주제로 가져간 작품의 서사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다 각자의 삶을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고, 마지막의 출석부 장면은 끈질긴 희망의 확인을 형상화해서 감동을 자아낸다. 그런데 그런 세부적인 생명력 부여와 주제의 튼실한 부각이란 요건에서 볼 때 아쉬움 또한 분명히 있다. 선학이는 광주에 와서 한동안 서경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정말 괴로워한다. 그 고통이 충분히 당연한 것이기에 은성이에 대한 풋풋한 열정에 돌연 묻혀 버리는 전개는 적잖이 갑작스럽다. 진심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대목이다. 결국 모아지는 역사적 관점도 여러 평범한 인물의 삶에서 직조되다 보니 핵심에 육박하지 못한 미흡함이 있다. 광주 항쟁의 내외적 발생 구조는 그만큼 제대로 다루기에 벅찬 문제이다.

大峙라고 굵게 쓴 광주리를 멘 아저씨들이 대치동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든 지금의 대치동은 휘황찬란한 자본의 에너지로 빛나고 있다. 그것을 알든 모르든 이렇게 지금은 대치동이 이끌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우리는 옆에서든 그 속에서든 몸으로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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