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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벤트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마지막 이벤트』 (유은실, 바람의 아이들)

죽음은, 남은 사람들이 죽은 이의 빈 자리를 수습하며 의미를 갖게 된다. 죽은 이의 삶은 그곳에서 하나의 생애 전체로 회고 되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회고를 할, 회고를 받을 기회도 잃어버리고 있다. 조급하고 조잡하게 자리잡은 우리의 근대를 결혼식과 장례식 풍경은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서약과 추모를 대행해주는 업체에게 쫓겨, 의미를 되새기고 감정을 나눌 여유도 없이, 다들 안 바빠도 바쁜 척 일을 해치워버린다. 그런 우리의 기억에 전통이나 대안은 이제 떠오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어린이 독자들에게 죽음의 형식적 절차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준다. 영욱이의 시선을 따라 독자들은 장례식장에서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구경하게 된다. 수의를 입히는 것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향 피우기와 절하기 중에 어느 것을 먼저 하는지, 늘어선 화환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지, 상주들은 몇날며칠을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등을 알려주는 문화 교육적인 기능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 작품의 약 1/3을 차지하는 할아버지 생전의 이야기는 죽은 할아버지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영욱이의 감정을 이해하게 하는 기초 설정에 해당한다. 죽음의 수습 과정과 유족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꼼꼼히 간접 체험하게 해주는 동화는 분명 보기 드문 사례이다. 말미에 밝혔듯, 분명 작가 본인에게 최근 있었던 일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준비한 수의가 여자용이었다는 것, 할아버지는 다음 생에 여자로 살고 싶다고 유서까지 써서 남겼다는 것, 그 선택에 유족들이 당황하고 저항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들이 말하자면 ‘마지막 이벤트’이다. 죽음은 끝이 아닌 건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들을 유족들의 어깨 너머로 독자는 해볼 수 있다. 씩씩하게 가족을 대표해서 조문을 하고 가는 보람이와, 할아버지의 전 부인이자 ‘젊은 일본 놈’의 새 아내인 할머니가 하는 “사람으로 살기가 지겨웠다.”는 말 등은 영욱이의 눈높이에서 오래 기억될 만한 것들이다. 장례식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상조회사 김부장이라는 인물도 오늘의 장례 문화를 대표하는 요소로서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에 두고 할아버지의 회한과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 속 상처와 영욱이에게 할아버지가 그토록 소중했던 이유 등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은 것이 이 작품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암시와 함축을 곳곳에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해될 뿐 공감까지 하게 되진 않는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왜 독재적이었는지, 거듭된 실패는 어떤 욕망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어떤 상처를 아직까지 마음에 가지고 있는지, 그 상처가 어떻게 마지막 입관할 때는 눈물로 터져나왔는지, 영욱이는 어떻게 냄새 심한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쓰는 게 더 좋았는지, 할아버지의 검버섯이 어떻게 토끼로 보일 수 있는지, 좀 더 공들인 이야기 제시를 보고 싶었다. 그런 많은 여백들 때문에 이 작품은 장례 문화에 대한 관찰기로서의 가치가 더욱 도드라진다. 작가 유은실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지만, 기대만큼 아쉬움도 남는 작품이다.
할아버지는 포토샵으로 검버섯을 지운 환한 얼굴로 웃으며 쪽배를 타고 서쪽 나라로 갔다. 영욱이는 죽음과 정체성에 대한 가볍지 않은 체험으로 아버지와 이전과는 좀 다른 관계를 새로 맺어갈 것 같다. 그리고 제발 그 ‘······는데여’ 버릇부터 고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장례와 결혼의 문화가 진정한 내용으로 변화하는 흐름이 우리에게 일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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