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 한국과학문학상 대표작가 앤솔러지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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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전문 출판사 허블이 한국과학문학상 10주년을 기념해 펴낸 앤솔러지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지금 한국 SF 문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작가가 한데 모여 만든 작품집이다. 허블 편집부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 “솔직하게 마음이 가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다섯 작가는 모두 죽음 너머의 세계”, “그곳에 남은 사랑이라는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단절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랑, 존재, 기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초엽 비구름을 따라서〉 — 그녀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건너갔을지도 몰라

<비구름을 따라서〉는 죽은 룸메이트 이연의 이름으로 도착한 한 통의 추도식 초대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보민은 처음엔 장난으로 여겼지만, 초대장이 집 안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날짜가 바뀌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한다.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두 사람이 노바 파우치라는 보드게임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며 친밀해졌던 시절로 이어진다. 이연의 추도장에 모인 보민과 이연의 지인들의 대화 속에서, 이연이 죽은 것이 아니라 반투막 너머의 세계로 건너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는 결국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비구름과 햇볕이 공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조차 끝이 아닌 세계로 이어지는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천선란 우리를 아십니까〉 — 좀비가 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랑

우리를 아십니까는 좀비가 지배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존엄사를 준비하던 한 여성이 간호사에게 물려 감염되고, 혼수 끝에 깨어나 스스로 좀비가 된 자신을 인식한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녀는 아내가 남긴 녹음기를 통해,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으려 했던 사랑의 기록을 듣는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한 호러나 생존담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성을 잃은 몸에서도, 아내를 그리워하고 장풍이라는 거북이와 교감하며 바다로 향하는 화자의 모습은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언어임을 말해준다. 작가가 직접 밝힌 것처럼 좀비에게 느껴지는 고독속에서 느껴지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김혜윤 오름의 말들〉 — 언어의 벽을 넘어서

오름의 말들은 외계 생명체 오름과의 언어적 교류를 시도하는 언어학자 정희정과 암호학자 이류의 이야기다. 오름은 달팽이처럼 생긴 전기 생명체로, 인간의 언어 대신 전기적 신호로 의사를 전달한다. 희정은 오름과의 소통을 위해 수학, 이진법, 심지어 스포츠 클라이밍까지 동원한다. 그는 이 외계생명체에게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언어가 단순한 신호를 넘어 감정의 형태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과 상업화 시도로 오름이 상품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희정은 인간이 진짜로 소통을 원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김혜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지기만 하는 싸움이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싸움을 언급한다. 희정과 류의 싸움이 그렇게 보였다.

 

청예 Amo Ergo Sum〉 —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문장을 변주한 제목이 인상적이다. Amo Ergo Sum은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SF. 주인공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복제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복제체를 창조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은 사랑이 존재의 증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복제체가 깨어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복제된 인간이 원본과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그 감정이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이 철학적 질문을 따라가며, 결국 사랑의 불완전함 속에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난해하지만, 사유의 깊이와 감정의 밀도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진다.

 

조서월 I’m Not a Robot〉 —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슬픈 선언

I’m Not a Robot인간성과 기계성의 경계에 선 철학적 이야기다. 폐허가 된 미래의 사막 외곽, 노인 프랭크와 고장난 로봇 랜슬롯이 함께 살아간다. 프랭크는 로봇 수리공이자 웹에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글을 올리기 위해 매번 CAPTCHA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즉, 자신이 로봇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인간의 존재가 점점 기계화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읽힌다. 죽음을 앞둔 인간과 감정을 배우려는 로봇의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프랭크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말할 때, 그 문장은 인간과 로봇, 사랑과 의무의 경계를 동시에 녹여낸다. 프랭크가 세상을 떠나고도 랜슬롯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결말은 사랑조차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까라는 냉정한 질문을 남긴다.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여 이루는 감정의 성좌 같다. 각기 다른 작가의 언어와 세계관이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죽음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이 자리한다. 김초엽이 말하는 따뜻한 상상, 천선란의 고독한 연민, 김혜윤의 윤리적 사유, 청예의 철학적 탐구, 조서월의 인간성 탐색이 모두 사랑이 인간을 완성시킨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이 책은 단순히 SF 장르의 재미를 넘어 우리는 왜 여전히 사랑하고, 왜 그리워하며, 왜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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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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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책 제목만 보아도 묘한 이질감이 먼저 다가온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연을 경험했을 때 이불 속에서 한없이 웅크리고 눈물을 삼키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고, 아침이 오면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에 눌려 일어나기도 힘든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백영옥 작가는 그 고통스러운 실연의 시간을 아침 일곱 시 조찬 모임이라는 낯선 풍경 속에 담아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실연과 조찬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이 모임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각자의 상처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작은 의식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소설 속 배경은 SNS를 통해 알려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이다. 모임은 단순한 아침 식사 자리가 아니다. 함께하는 조찬, 영화 상영, 실연의 기념품 교환 이렇게 세 가지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가장 상징적이고 독특한 것은 실연의 기념품 교환이다. 실연의 흔적은 늘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버리기에는 추억이 너무 선명하고, 간직하기에는 상처가 여전히 아프다. 그래서인지 기념품을 가지고 오는 순간, 그것은 곧 각자의 고통을 정리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인 항공사 승무원 윤사강과 컨설팅 회사 직원 이지훈은 이 모임에서 처음 만난다. 우연히 서로의 기념품인 로모카메라와 책을 집어 들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작은 우연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에 닿는 첫 순간이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실연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두고도 인물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극명히 다르다는 점이다.


윤사강은 실연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여긴다. “치유도, 용서도 결국 자기 몫이라는 태도 속에는 체념과 동시에 단단한 자립심이 엿보인다. 그는 타인의 위로에 쉽게 기대지 않으려 한다.


반면 이지훈은 연애를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정의한다.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환상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냉철하지만 동시에 진지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가 안고 있던 실연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는다. 상처를 드러내고 들어주는 과정에서,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이야기 중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 정미도는 조찬 모임의 분위기를 뒤흔든다그녀는 남의 슬픔을 보며 위로받는다는 인간 본성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누군가의 아픔은 때로 타인의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그 속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적 욕망이 숨어 있음을 보여준다. 정미도의 존재는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단순히 함께 울고, 함께 치유되는 따뜻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 관계의 이중성과 솔직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들이다.


인간은 슬픈 쪽으로만 평등하다. 어쩌면 행복한 쪽으로는 늘 불평등했다.” 


이 문장은 실연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행복은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그 크기와 모양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불행과 상실은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잔인하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실연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구절은 미도의 대사다.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실연은 잘못된 선택이자 아픈 기억일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은 고칠 수 있는 오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독자에게 강한 위로를 건넨다.


소설은 실연을 둘러싼 인간의 다양한 태도와 본성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누군가는 아픔을 회피하고, 누군가는 집요하게 파헤치며, 또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을 위안 삼는다. 그 모습들은 때로 불편하지만, 우리 자신의 그림자 같아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실연을 경험했기에 다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진부할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실연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삶 속에서 수없이 쓰게 되는 오답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은 많은 위로가 된다.


실연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 속 문장들이 가슴을 아프게 찌르면서도 동시에 위로를 줄 것이고,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사랑은 질문이고, 실연은 그 질문에 대한 오답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오답을 고쳐가며 결국 자신만의 정답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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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온다 리쿠 지음, 이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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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소설 스프링은 천재 무용수이자 안무가 요로즈 하루의 삶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하루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세 명의 서로 다른 인물들이 차례로 화자가 되어 그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독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하루를 다각도로 관찰하며, 마지막에 가서야 하루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좁혀져 결국 중심 인물에게 모이는 것 같은 구조다.


1뛰어오르다

발레 학교 워크숍에서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준의 눈에 비친 하루는 단순한 발레 소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무언가를 몸으로 구현하는 존재다. 하루는 즉흥 안무로 동료들을 매료시키며, 친구이자 동료인 준과 함께 작품 <야누스>를 완성한다. 발레라는 낯선 세계와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독자도 무대 위 장면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2싹트다

삼촌 미노루의 시선에서 하루의 어린 시절이 드러난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관찰한 세상을 곧바로 춤으로 표현해낸다. 체조를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운동과 동작에 익숙했고, 발레 교사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는 가족의 품에서 자라면서도 이미 한 명의 예술가였다. 15세 무렵, 하루는 과감히 해외 유학을 결심하며 더 넓은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 이 부분은 한 소년이 천재 무용수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자, 동시에 가족의 사랑과 이해가 그에게 어떤 토양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3솟아나다

이번 화자는 작곡가 다키자와 나나세다. 그녀는 발레니나였던 언니와 달리 음악의 길을 택했고, 하루와 협력하며 무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예술 창작의 본질이 드러난다. 하루는 작품마다 끊임없이 고뇌하며, 창작의 고통과 집념 속에서 =이라는 철학을 굳힌다. 나나세와의 협업은 때로 긴장과 갈등을 낳지만, 그 긴장감이 오히려 작품 <어새슨>의 완성도를 높인다.

여기서 특히 하루의 음악을 작곡을 하는 나나세의 말이 인상 깊었다. 

오리지널리티를 계속 유지하려면 진화해야 하고, 심화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4봄이 되다

마지막으로 하루 자신이 무대 위에 선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뜻, ‘텐 사우전드 스프링스(만개의 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피어나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앞선 화자들의 시선을 모두 거친 후, 하루는 고국으로 돌아와 <봄의 제전>이라는 독무를 추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독자는 이 순간, 하루가 단순한 무용수가 아닌 예술 그 자체임을 실감한다.


스프링은 발레라는 특정한 장르를 다루지만, 사실상 예술 창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무용을 모르는 독자도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장면 묘사가 생생하다. 하루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자기 길을 개척할 때 겪는 두려움과 닮아 있다.


다만 주인공 하루가 너무도 비범한 인물이다 보니, 때로는 현실성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예술을 의인화한 존재로서의 하루다. 그를 통해 우리는 평범한 삶 속에서는 쉽게 체험하기 힘든 집념과 창조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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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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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든 맥파든의 소설 네버 라이는 트리샤와 이선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현재 시점과 정신과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가 이끌어 가는 과거의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됐다. 또한 등장인물의 심리와 사건을 짐작케 하는 헤일 박사의 상담 녹음본이 간간히 등장해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소설의 시작인 프롤로그에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

아무리 성능이 좋은 거짓말 탐지기도 오차율이 25퍼센트에 달하지만 내 눈은 거의 정확하다. 내 앞에 앉은 인물의 표정, 몸짓,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나는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다.

예외 없이 언제나.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5-6)


제목인 '네버 라이(Never Lie)'와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헤일 박사의 독백이 묘하게 어울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 트리샤와 이선은 신혼부부로 그들이 꿈꾸던 집을 찾기 위해 외딴 고급 저택의 오픈하우스를 방문했다. 하필이면 이들이 집을 보러 간 날은 갑작스러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로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가까스로 저택에 도착했지만 약속한 부동산 중개인은 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트리샤는 이 집이 탐탁지 않았다.


"이 집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14)


그들이 하루 묵어갈 이 집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이드리안 헤일 박사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3년 전 돌연 실종되었으며, 책 출간 일주일 후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이런 사연이 있는 집이지만 트리샤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으려 그 책을 꺼내다 숨겨진 방을 발견했다. 역시 의문의 사연이 있는 집에 숨겨진 방을 묘사하는 데 스티븐 킹의 소설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그 안에는 헤일 박사가 남긴 수많은 심리치료 녹음 테이프(환자들의 세션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었다.


반면 정신과 전문의 헤일 박사는 거대한 자신의 저택에서 환자들을 상담했다. 상담 내용을 녹음하는 그녀의 환자 중 'EJ', 'PL', 'GW' 이니셜로 표시가 된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언급됐다. 그녀 주위 사람들은 외딴 곳의 거대한 저택에 혼자 있으며 정신과 상담을 하는 그녀에게 방범 시스템이라도 구축해 놓으라 조언했지만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병원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는 루크와 가까워질 무렵, 그녀에게 집착하는 내담자가 생겼다. 바로 EJ라는 이니셜로 표시된 에드워드 제이미슨이었다. 상담 종료를 통보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상담을 요구했다


병원에서 예약 진료가 계획된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주차하려던 자리를 새치기한 어느 차량 때문에 예약 시간에 조금 늦었다. 다행히 예약이 미뤄져 그날 진료는 잘 넘어갔으나, 새치기 차량에 해코지를 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에드워드는 그녀를 협박하게 됐고 상담과 함께 원하는 처방전까지 받았다. 내키지 않는 루크를 설득한 그녀는 그와 함께 에드워드에게서 그 영상을 다시 빼앗았다.


소설이 절정으로 진행되면서 헤일 박사에게 일어난 실종 사건과 현재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 트리샤, 이선과의 관계가 조금씩 이어졌다. 그리고 놀라운 반전이 이어졌다. 이는 네버 라이의 정수이기에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다. 스포된 반전은 김빠진 탄산음료와 같으니 말이다.


네버 라이는 이 문장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340)


여기서의 두 사람은 주인공인 트리샤와 이선이었다. 그들의 비밀은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헤일 박사의 프롤로그와 대비를 이루면서 그 비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이니셜로만 표시된 환자들의 정체, 그리고 숨겨진 방에서 발견한 녹음 테이프까지. 네버 라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던 헤일 박사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과정과 트리샤와 이선의 신혼여행이 악목으로 변하는 과정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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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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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작가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을 한데 모은 작품집이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보여준 과학적 설정 위에 인간 존재와 감각을 탐구하는 김초엽 특유의 문장이 어김없이  빛난다. 각 편마다 질문과 여운이 달라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라는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비춰본다.


(1)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미래 사회,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현이는 회사 갈등으로 연구원을 그만두고 솜솜 피부관리숍에서 일한다. 그곳을 찾아온 안드로이드 수브다니는 잘 녹슬고 싶다는 이유로 금속 피부 이식을 요청한다.


과거 그는 인간 예술가 남상아와 함께 예술적 실험을 했으나 관계가 틀어졌다.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금속 피부 위에 새긴 채 스스로 녹슬어 사라지길 택한다.


타인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라지려는 선택, 존재의 자기결정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2) 양면의 조개껍데기

표제작이자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외계 행성 셀븐출신의 샐리는 두 개의 자아, 레몬과 라임을 한 몸에 지닌 채 지구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연인 류경아는 이 두 자아를 모두 사랑하지만, 레몬의 충동적 행동으로 갈등이 깊어진다.


샐리는 자아 분리 시술을 고민하지만 결국 레몬과 라임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화해에 이른다우리 역시 하루에도 수많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남긴다.


(3) 진동새와 손편지

알파 C 서브섹터의 조난 우주선에서 집단 네트워크 지성체인 화자는 이곳에서 진동새라 이름 붙인 미지의 생물을 발견한다진동새는 몸을 떨며 고유한 패턴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데, 그 패턴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닌 감각과 감정까지 품는다.


화자는 인간의 언어가 지닌 한계를 돌아보며, 결국 “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 (131쪽)라는 단 한 줄의 마음을 위해 수많은 진동이 필요했음을 깨닫는다소통의 본질을 묻는, 낯설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다.


(4) 소금물 주파수

울산 해역을 배경으로, 기억을 잃은 로봇 돌고래 해몽과 과학자 임영선, 손녀 모아의 이야기가 교차한다바다의 소리와 주파수, 인간과 로봇, 과거와 현재가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한 번은 돌아와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해몽과 모아의 여정은 귀향과 성장을 상징한다태화강 복원과 철새 귀환 같은 실제 도시 변화가 서사에 스며 있어 더욱 생생하다.


(5) 고요와 소란

어느 날 전 세계 사물과 동물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그러나 북극에서 소리를 채집하던 연구자 서해겸은 유일하게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수십 년이 지난 뒤 화자 서영은 해겸을 찾아가 사물의 목소리에 대해 묻는다.


물건과 생명에 깃든 영혼, 인간이 도구가 되어 그것을 기록한다는 해겸의 가설은 세계가 가진 보이지 않는 층위를 떠올리게 한다다소 난해하지만, 읽고 나면 사물과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6) 달고 미지근한 슬픔

인류가 물리적 몸을 버리고 데이터 세계로 이주한 시대를 배경으로 양봉가 백단하는 벌을 기르며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고, 연구자 이규은과 함께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다.


가상 공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고통과 쾌락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양자 큐비트 결정이 곧 우리의 신체라는 설정은 과학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며,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7) 비구름을 따라서

룸메이트 최이연의 추도식 초대장을 받은 보민이 미스터리한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각기 다른 날짜와 장소가 적힌 초대장, 그리고 이연이 즐기던 보드게임 노바 파우치는 현실과 평행 우주를 잇는 단서가 된다이연은 반투막 너머의 세계를 찾아 비구름을 따라간 것일까.


삼투 현상을 은유로 한 결말은 경계와 이동, 선택의 자유를 상징한다.


(8) 일곱 편의 단편들

일곱 편 모두 장르와 결이 다르지만, “존재와 선택이라는 굵은 축으로 묶인다안드로이드, 다중 자아, 진동으로 소통하는 생명체, 데이터화된 인류 등배경은 미래와 우주를 넘나들지만,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향한다.


개인적으로는 비구름을 따라서의 물리 현상 삼투를 서사로 풀어낸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었다하루 한 편씩 천천히 곱씹어 읽으면 더 좋겠지만, 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는 양면의 조개껍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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