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華苑의 향연 - 이야기 장자 철학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송항룡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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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 말이 너무도 어렵고 난해하여 궤변론으로 유명했던 명가(名家) 철학자인 공손룡을 떠올리게끔 하기도 한다. 도가와 불교의 사유방식을 배우려면 이성이나 기존지식은 한쪽에 고이 모셔다 놓고 와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해했다고 해서 철학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경전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그러나 동양적 사고방식을 서양철학의 사유로 측정하고 판단해서 같은 결론을 얻어낸다면 어떨까? 상당히 모험적이고 당돌한 이 생각이 ‘남화원의 향연’이라는 이야기 장자 철학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칸트의 사유방식으로 생각해보는‘장자(莊子)’


 

‘남화원의 향연’의 ‘말의 덫’이라는 장을 보면 맹랑자와 무하자의 대화가 등장한다. 맹랑자가 소크라테스처럼 대화와 질문으로 어떠한 결론으로 이끌어가려는 사람이라면 무하자는 그 대화 상대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불은 뜨겁다’는 말을 가지고 혼란은 시작된다. 맹랑자는 ‘불은 뜨겁다’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입에 대고 ‘불’이라는 말을 해도 뜨거울 것이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무하자는 ‘사실의 불이 뜨거운 것이지 불이라는 말 자체가 뜨거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는다고 라면이 끓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맹랑자는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되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칸트의 감성과 오성으로 분석하면 숨겨져 있는 오류를 발견해 낼 수 있다.

감성은 수용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 이에 해당하며 이를 직관형식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오성은 자발적으로 사유 가능한 능력이며 이에 해당한 여러 논리적 판단들과 함께 범주형식이라고 표현한다. 감성과 오성을 정립한 후에 칸트는 그 형식들이 규범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전제를 제시한다.


 

내용(직관)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즉, 감성과 함께 하지 않은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과 함께하지 않은 감성은 맹목적이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불은 뜨겁다’라는 말에 담긴 오류를 지적하며 맹랑자가 했던 말을 분석해보자.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말은 어떠한 선언이나 명제를 뜻하는 것이므로 ‘판단’이라고 생각해보자.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직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개념만을 가지고 있되 직관은 가지고 있지 않은, 직관 없는 개념의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

=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 직관은 가지고 있지 않은 판단


 

이것은 이미 칸트가 공허하다고 입증한 것이다. 만약 내 앞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고 그 불 가까이에 간다면 나는 그 불을 뜨겁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불’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그것이 ‘뜨겁다’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불이라는 말 자체를 한다고 마술처럼 뜨거움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직관 형식을 갖지 않은 오성의 제멋대로 판단인 것이다. 직관 없는 사고의 비슷한 예인 ‘황금 산’과 마찬가지다. 황금산은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개념이다. 둥근 삼각형이 이미 개념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을 안다면 사고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금 산이 개념에 머무를 뿐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감성의 형식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산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식할 수 없다.(존재하지 않았다.) 불은 나의 생각에 의해 말로써 표현되었을 뿐이지 아직 시·공간적으로 인식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말에 지나지 않은 불이 뜨거울 순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고 바다를 건넜다.’는 말도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식될 수 없다. 인식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 개념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감각자료들이 없기 때문이다.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은 우리는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냄새로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직관 없는 오성의 오류일 뿐이며 고삐 풀린 이성의 망동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맹랑자가 말하는 ‘말(판단)’은 위에서 전제했던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판단이 아니다. 즉, 감성과 오성에 합동작전에 의해 내린 판단이 아니라 감성의 굴레를 벗어 던진 판단이다. 장주의 호접몽이 나 라는 존재와 나비라는 존재의 구분을 벗어던진 것처럼, 도가적 사유는 인식의 속박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을 염두하고 ‘말=판단, 의미=개념(오성), 사실=직관(감성)’이라는 공식을 이용한다면 맹랑자의 다음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에는 사실(직관)은 있을 수 없네.

; 우리, 인식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지세

 

그러므로 어떤 말도 그 자체로서는 거짓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네.

;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참인 세계에 닿을 수 있다네!

 

자네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말에서 사실을 찾고 있는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 만약 아직도 인식과 구분을 찾는다면 그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없을 것이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인식이나 직관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므로 맹랑자와 무하자는 이것을 안타까워한다.


 

무하자 그러나 말(판단)은 실제로 사실(직관)과 무관하게 사용될 수 없지 않은가?

 

맹랑자 그렇지. 그래서 말이 있는 한 오해가 생기고 속아 넘어가는 거짓말이 없을 수 없지.


 

인간이 말을 할 수 있게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간이 판단을 한다는 것은 물자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주어진 감성과 오성의 형식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가치’라는 것이 생겨났다. 인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 기준은 철저히 인간 편향된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마치 원음을 녹음하여 시디에 담아 재생하면 원음이 그대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디지털 신호로 원음을 흉내 낸 신호들이 재생되면서 실제와는 다른 왜곡이 발생하는 것처럼. 가치라는 인위적인 것이 생겨난 이상 충돌과 파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가 공자를 그토록 조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올바르지 못한 가치 판단으로 혼란을 겪는 인간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예와 악으로써 교화할 것을 주장하는 공자. 본문에서도 표현된 것과 같이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 않은데 일부러 잡아 당기거나 잘라 내어 예라는 액자를 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생각하는 공자는 ‘노나라의 프로크루스테스’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만약 완수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예전의 무질서와 혼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이 근 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것으로부터 도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교화된다 하더라도 인위적인 예로써 가능한 것이었다면 인위적인 가치들은 항상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다시 춘추전국의 참상이 재현될 것이다. 인위적인 것, 인간중심적인 것이 어떠한 파괴를 불러일으켰는지 이미 우리는 쌓고도 남을 실례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지나온 모든 가치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인류에게 도가철학은 하나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호젓한 산보를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길. 헤겔이 우파니샤드를 침대 맡에 놓아두고 잠들기 전 탐독하면서 지혜를 얻었던 것처럼 우화와 선문답으로 가득한 이 책으로부터 독자들은 그 길을 먼저 걸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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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
임방 지음, 정환국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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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서 침대 맡에서 이야기 읽어 주는 것을 끝까지 듣고서야 잠들곤 했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이야기 테이프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듣고, 또 듣고 나중엔 테이프가 늘어져서 듣기 힘들 지경까지 되었지만 그런 부분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부분으로 대신하여 계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좋아하게 되었던 건 글을 깨우치고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리기 시간에 탑에 갇혀 물레를 짜는 공주와 그녀를 구하러 온 왕자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맘때쯤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섭렵하여 알만 하면서도 계속 읽었던 것은 그 세계가 너무도 좋아서였나보다. 어느 정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런 동화와 같은 세상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피터 팬 이야기를 좋아하던 시절엔 상상력을 가지면 이 땅에서 발을 떼고 날아오를 수 있다고 정말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온전히 그 땅에 발붙이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아예 두 발이 뿌리로서 박힌 것처럼.

 

그토록 좋아하던 머나먼 왕국 이야기를 터무니없다고 무시해버리고, 이상한 탈을 쓰고 그 겁나게 먼 왕국 ‘Far far away Kingdom’에서 왔다고 설쳐대는 녹색 괴물을 ‘등신’이라고 부르는 지금. 좋아하는 옛날이야기라고 해 보았자 김동리의 애틋한 이복동기간 사랑이야기도 아니요, 의절한 동생을 강가에서 찾아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며 오직 작가가 몸소 겪고 고생한 회고담들뿐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그들의 질곡에 너무나도 가슴 아파 하지만 여전히 느끼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본성이다.

 

한동안 옛날이야기를 잊고 살았는데 무심결에 읽게 된 책 한권이 어렸을 적 생각을 이토록 장황하게 풀어내게 한다. 처음엔 장화홍련 이야기같이 무섭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줄만 알았던 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에서 예전에 읽었던 ‘어른들을 위한 그림동화’라는 책이 떠오른다. 첫 장을 열면 ‘지리산에서 신선 장도령을 만난 벼슬아치’라는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어느 벼슬아치가 지리산을 가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는데 뜻밖에 신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난 신선은 뜻밖에도 자기가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던 비렁뱅이 식객이었던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식객이 사실은 도력이 높은 신선이라 선비의 호의에 감사하여 극진한 환대를 베푼다.

 

선비가 머무르며 유람하던 신선세계에 대한 묘사에서 역설적이지만 익숙지 않은 친근함을 느꼈다. 산호와 수정으로 이루어진 전각이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궁전들이 뾰족한 첨탑의 서구식 건물들이 아니라 기와로 덮인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의 궁전이라는 것. 그리고 예로부터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었기에 어김없이 손님접대에 풍악이 연주되는 것 하며. 그러한 친근함을 익숙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나는 슬프게도 나도 모르는 새 이방인이 되어버렸던 걸까.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건 화자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뛰어난 솜씨 때문이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세한 묘사도 그러하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선비들의 말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만을 주로 서술함으로써 글을 읽는 누구나가 선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이야기에서 유생이 신선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을 때 내 일인 것만 같아 황홀했다.


 

책의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너무 짧아 다소 감질 맛나게 한다는 것이지만 의외로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원래 민간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채록한 것이다. 일부는 허황되게 여겨지고 사실을 윤색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장황하고 긴 이야기라면 누구나 이것을 틀림없는 허구라고 치부하겠지만 아름다운 하나의 단편을 접하고 그것이 예상외로 너무나 짧게 끝나게 되었을 때엔 사실인지 거짓인지 혼동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내용 중에 전우치가 조선의 3대 신선을 언급하는데 장도령, 정렴, 윤세평 각각의 이야기가 뒤이어 나오기에 더욱 사실처럼 여겨진다. 생각해보라. 그 시절 순박한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힘든 노동의 중간이나 하루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이한 이야기들이 지금의 뉴스인 것 마냥 전해졌으리라.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이인(異人)이 와서 고단한 삶을 구원해주거나 자기도 먼 길을 가다가 그런 신선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삶의 청량감을 얻었을 것이다.

 

이야기들을 읽으며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을 받는 건 거의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전란과 참화로 고단하고 피폐한 삶을 살았던 선조들이지만 그러한 아픔이 마음속의 착한 심성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던 것일까. 게르만 인들의 대서사시였던 ‘니벨룽겐의 노래’를 읽으며 그 참혹한 결말이 충격적이기까지 했지만 우리네들의 이야기에선 죽을 만큼 중한 죄를 지은 사람도 없고 설령 죄를 짓거나 인심을 잃는 행위를 했다손 치더라도 크게 징벌되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지존의 존재에 대한 불경이었다손 치더라도. 책 속의 김유신 혼령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해인사에 내려오는 민담 중 불경한 자가 부처를 욕하고 대장경이 보관된 전각을 향해 오줌을 누자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담장 밖으로 내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벼락을 맞아 죽거나 급사를 맞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처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선조들의 관용의 정신이 그립기까지 하다.

 

지금은 예전의 기이한 이야기나 야담이 조그마한 흥미조차 끌지 못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이미 헐리웃의 네버엔딩 스토리에 중독되어 버리고 생명이 걸린 사투가 아니면 시시하게 여기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 ‘갈’이라는 모나지 않은 소리가 지금의 ‘칼’이라는 소름 돋는 거센소리로 바뀐 것은 임진왜란 이후라고 한다. 여러 전란을 거친 이후로 언어마저 거세고 된소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딜 가나 억척스럽고 성격 급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인들. 옛 것과 그닥 호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들이 옹이가 되어 만들어진 사람들 같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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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유학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김성기 외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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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동양 고전이라 한다면 삼국지가 되겠지만 그를 제외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논어가 될 것이다. 동양철학의 범주에 포함된 것 중엔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제자백가의 사상 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학을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상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양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논어나 맹자의 한 구절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에서 황진사가 자못 박학한 체 하며 ‘관관저구는 재하지주요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關關雎鳩 在荷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하며 한 구절을 읊어내도 그것이 실소를 자아내는 이유는 시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시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어야 할 전근대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 수용된 이후로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거치면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한 원흉으로 온갖 핍박을 받아 왔다. 여기에는 침략자인 일본의 조선의 유교역사에 대한 조롱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그것이 식민지 패배주의를 납득하게 하는 기제로서 훌륭하게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의아할 만하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체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뛰어난 성취를 이룩한 혁신이라고 추켜올리곤 하지만 근대 일본의 과두 정치가들이 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유교적 충의관념이 효과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패망원인을 고루한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곤 하지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한 괴변임에 다름 아니다.

 

비단 우리나라의 특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아우르게 하는 유교문화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재인식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동아시아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논리인 신유교윤리, 서구적 가치관의 폐해를 치유할 대안으로서의 유학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을 앎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예측해 보고 개인이 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미시적 측면에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에 제목처럼 이러한 논의에 대해 충실한 해답으로서 추천할 만한 책이 ‘지금, 여기의 유학’이다.






 

1. 가장 기본적인 물음 - 유교는 종교인가?

 





유학의 역사와 그 흐름에 집중하고 유학 본연의 학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는 장이 대부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그리고 한 번쯤 궁금함을 가져봤을 만한 의문들에 대해 색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내용들 또한 돋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유교는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에 대답이 될 만한 부분이 ‘종교로서의 유교, 그 역할과 전망’이라는 장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혹자는 ‘유교’라고 답하기도 하지만 아마 그 질문에 대답했던 사람도, 그 대답을 들었던 사람도 잠깐이나마 의아하게 생각해봤을 수 있다.

 

기독교나 불교에 비교해 보았을 때 절대자를 섬기는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보면 유교는 뭔가 일탈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흠숭받는 초월자의 존재나 그에  헌신하는 독신 수도자들의 존재도 없다. 그런데 글쓴이는 바로 그러한 면이 현대적인, 대안적인 종교로서의 유교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고 말한다. 자기초월의 신화를 신봉한다는 것에서 원시불교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머나먼 내세나 사후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현세에서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게 유교의 ‘군자론’이다.

 

즉물적인 현대의 세태에서 점점 자기 자신의 판단만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성공을 갈망하며 자기 절제와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유교의 ‘일용지사가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히 하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 가르침과 방법론에서 맞닿아 있다. 지고의 목표인 ‘천인에 합일되는 경지’가 유교가 지향하는 궁극점이기도 하지만 그런 거창한 담론 이전에 성인이 되기 위한 수행방법의 근본은 일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현대인들이 꿈꾸는 ‘생활의 발견’혹은 ‘일상의 신화’와 유사하다. 항상 근면하고 자기 계발에 큰 관심을 쏟는 한국인들이 오로지 재테크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현실은 방향성을 잃은 감이 없지 않으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유학의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學)의 모델과 항상 자신을 연마하는 생활습관은 최선책이 될 수 있다.


 

2. 유학의 자연관은 자연중심적인가?

 

서양인들은 동양의 가치관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계문명의 치료방편으로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유교에서도 그 미덕을 찾아볼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 ‘동아시아의 미학지평과 유가예술정신’과 ‘유학의 생태 친화적 자연관’이란 장은 논의의 기반을 제공해 준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之者)’에서 도출된 ‘락(樂)’의 개념은 원래 군자의 적극적 삶의 태도를 표현한 단어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식될 때는 ‘대상과 (주체가)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상태(p149)'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관을 생각해 볼 때 눈여겨 볼 점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어떠한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세한고절이라는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나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성현과 지사의 고결한 품격으로서 표현된다. 이처럼 자연물이 인간의 덕성에 대비되어 표현되어 있기에 만약 유가에서 인식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칸트식 철학용어와 굳이 비교해본다면 ‘물자체(Ding an sich)’보다는 ‘표상(Vorstellung)’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요컨대 자연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기보단 인격적인 덕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데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사군자에서도 보이듯 ‘사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되 그 보다 ‘자신을 통해 사물을 해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다.(p153) 유물급인(由物及人)의 연원은 이러하다. 그렇기에 도덕과 예술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며(p150) 유가적 미학원리인 비덕(比德)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

 

결국 ‘천인합일’의 경지는 글자 그대로 인간이 자연에 완전히 귀속되거나 원시적인 형태의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연의 모습에서 포착하고 이상화한 덕성을 내면화한다는 뜻이 더 옳다. 그렇기에 아마 서구인들이 현재 추구하는 가치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도가적 자연관이며 유가적 가치관은 서구의 기독교적 자연관처럼 부분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이상화된 자연을 존숭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대안으로서 유효하다.


 

그런데 서양의 관념론에서 인식하는 유교의 자연관과 실제는 큰 차이가 있다. ‘계몽의 빛 유교’에서 말하고 있듯 공자는 유럽에 일찍이 소개되어 루이14세의 궁정에선 논어의 번역본이 읽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마치 그리스의 현인처럼 Confucius라는 이름을 얻는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공자와 그의 유학사상은 관념론자들에 이르러 전근대적이고 하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유교의 자연관을 ‘극복되지 못한 자연으로의 세속화된 기본적인 신비한 관계(p178)’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락’의 개념에서도 보이듯 자연과의 일체라는 사고가 주체적이기 보단 수동적으로 비쳐질 여지가 더 많았으며 이미 이성에 대한 합리적인 사유로 신적인 직관으로부터 벗어난 그들은 아직 자연과 구분된 독립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 중국인들을 저열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교적 미학관점의 자연관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위와 같은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 서구적 관점이 지적하듯 극복되지 못한 자연과 그에 묻어가는 인간이 아닌, 사유의 틀에 의해 재단된 자연과 그것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3. 유학은 과연 여성의 족쇄인가?

 

이 책에서 현대 우리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이슈와 가장 부합하는 장면은 ‘여성의 경험으로 읽는 유교’일 것이다. 점진적으로 증대되는 여권의 신장에 있어 과연 유학은 여성억압적인 성격이 원래 내재되어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여성 권익을 위해 유학은 타파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철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 서술자는 이미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놓았다. 즉, 과거 대부분의 사상과 종교가 가부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가부장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p113)

 

오경은 남성의 역사였다!?라는 거의 반문에 가까운 도발적인 부제로 시작하는 글은 매우 신선하게 기존의 고정관념을 불식시킨다. 중국 고대왕조의 시조설화를 분석해 보면 고대는 모계중심의 사회였으며 여권이 오히려 우월한 사회였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여성의 혼인과 재가가 자유로웠으며 자유연애 또한 활발했다. <시경>에서 각국의 민요를 다룬 부분인 [국풍]은 그래서 연애 시로 보는 게 더 합당하며 부분적으로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褰裳)’와 같이 깜짝 놀랄 만큼 적극적인 구애시도 존재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가의 5경을 남녀관계를 기초로 해서 논평하는데 1) 이렇듯 유학의 주요 경전이 성립될 때만 해도 여성의 권익은 그리 낮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중국 역사에서 여권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에 있었다. 남녀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뒤바뀐 사건을 서술자는 ‘주나라의 은나라 정복’이라고 주장하는데 조직적인 국가체계를 갖춘 주나라가 모계중심의 씨족사회였던 은나라를 정복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래의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인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한 무왕(武王)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여성을 수천 년간이나 옭아맨 족쇄가 되었다.


‘칠거지악’과 소박맞은 여성을 구제하는 ‘삼불거’에 대한 서술자의 지적도 매우 신랄하다. 여성을 구속하는 논리인 칠거지악으로부터 여성을 배려하는 장치로 인식되었던 삼불거가 실제로는 여성의 노동력을 계속해서 장악하려는 지배구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억압했던 족쇄가 얼마나 무겁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는지 저자는 날카롭게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유학 자체에 여성 억압적인 성격이 있었느냐 하는 점에서 서술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공자가 시경을 두고 ‘삼백 편엔 사악함이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공자 또한 자유로운 연애에 어느 정도 개방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2) 오히려 후대로 오면서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승격된 유교는 점점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남존여비로 대변되는 가부장제가 인민을 지배하는 원리의 연장선이라는 주장은 매우 적확하며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왔다. 일본에선 ‘이에(家) 제도’로 흡수되어 메이지 시대 내셔널리즘을 가속화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4. 인간의 미래를 위한 시급한 해결방안

 

이 책이 우리에게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담론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유학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고도로 발달된 인류 문명의 한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현재가 인류 발전의 최 정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현재의 병폐들을 해결할 사상의 마련이 시급하다. 그 사상을 이룩하기 위해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들도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가치관으로서 유학은 새로운 해석을 모색해볼 가치가 있다. H.G. 크릴 교수의 <공자 - 인간과 신화>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 필요하다면 지선(至善)으로 추앙되는 공자마저도 성스러움의 장막을 걷어내고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공자 왈 맹자 왈’로서의 유학이 아니라 공자와 맹자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유학과 현대 사회와의 접점을 찾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주석


 

1)본문 p124에 소개된 <사기>의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역경>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건과 곤에 기초하고, <시경>은 남녀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는 [관저]를 머리로 삼으며, <서경>은 순이 아황과 여영의 두 자매에게 장가듦을 찬미하였고, <춘추>는 남녀간의 음란함을 풍자하였다.”

 


2)공자가 시경을 연애 시의 성격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했다고 보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 H.G 크릴교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시의 문맥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유교적 관점에 따라 곡해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표현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연원한 것인데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여, 소박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 라는 구절에 대해 제자인 자하가 묻자 공자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해석한다. 이를 두고 자하가 “(인(仁)이 바탕이고) 예(禮)는 나중입니까?”라고 묻자 비로소 시를 같이 논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공자가 흡족해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유가에선 현상에 대해 일정한 가치관을 덧씌우고 그것을 견강부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비판하는데 절차탁마(切磋琢磨)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비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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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베쓰야쿠 미노루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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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던지는 잔혹한 조소


 옛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옛 것에 매달려 그것을 고수하려 하는 사람은 추하게 느껴지며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중세’가 지나가 버리고 난 후에도 철갑을 입은 기사의 모습을 하고 판타지에 빠진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후자의 대표적 유형이다. 그러나 그가 경원시 될지언정 우리에게 영영 배척되지는 않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희극과 골계 때문이다.

그 인물은 오히려 사랑받았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는 회자되었고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변형의 한 유형으로 베쓰야쿠 미노루에 의해 2명의 돈키호테가 창조되기에 이른다.

비슷한 품성을 가진 그들은 어리둥절하게도 서로를 혐오한다. 타인의 시선은 전혀 반영하려 하지 않던 막무가내와도 같은 이 인물(들)이 자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우습게도 또 다른 자신에 의해 자신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난 이후에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분열된 돈키호테는 웬일인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정의의 사도라 부르짖지만 악의 세력에 대해 맞설만한 능력은커녕 멀쩡한 풍차에 돌진해서 고꾸라지기나 하던 무기력한 인물이 눈 깜짝하지도 않고 살인을 자행한다.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무엇이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무엇을 죽인 걸까. 그리고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1. 버려진 영웅들. 비참한 우리들의 자화상

전혀 달갑지 않은 두 인물들이 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유혈이 낭자한 잔혹극을 펼치는 걸까. 잠시 후면 제 발로 무덤 속에 처박힐 것 같은 그들이. 한 발은 벌써 관 속에 들여놓은 듯한 유령 같은 존재들이.

기사1, 2가 서로의 충실한 복제품인 것과 동시에 두 기사 모두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의 복제이자 변주다. 그들은 악령과도 같다. 죽었지만 채 눈을 감지 못하고 무덤 밖을 배회하는 실체. 마음이 어딘 가에 정주하지 못 하고 떠도는 우리들 같이. 더 이상 비참한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던 그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죽여주길 바란다. 그러나 스스로 눈을 감지 못해 외력에 의해 소멸되길 바라는 존재들이기에 세상을 편력한다.

두 명의 기사는 분열된 실체를 상징하며 상실과 소외의 시대인 현대의 자화상이다. 역설적이게도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혐오감을 느끼는 그들.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혐오한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불편한 현실' 을 해소하는 마지막 영웅으로서의 두 기사

의사와 목사는 현대인의 병리적인 모습을 해결해 주는 존재로서 부각되곤 하지만 사실 그들도 위선자들일 뿐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거의 알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그 일을 한다. 무지한 나머지 문맹인 것도 모자라 간호사보다 사리분별이 못한 의사. 그보다 좀 낫긴 하지만 이익에만 기민할 뿐 아무런 미덕도 갖지 못한 목사.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타자가 죽길 바라는 그들. 이제 우리의 문제는 구시대의 주술이나 과학문명의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것은 두 인물을 통해 조소하듯 폭로된다.

두 떠돌이 기사는 불편한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이 둘을 제거한다. 아주 능숙하고 잔인하게. 그리하여 돈키호테가 영웅을 흉내 내려 한 바보였다면 두 기사는 바보처럼 보이는 영웅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3.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두 영웅

그들에게 묵과될 수 없는 원죄와도 같은 과거는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과거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모습이었다. 등장에서, 그들은 아직도 과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바보들 인 듯하다. 중세풍의 갑옷을 흉내 내려 냄비를 쓰고 망토를 걸친 모습은. 그러나 어딘가 다르게 보이던 두 인물은 확실히 ‘원본’과 다르다. 

거대한 악당 브레아레오를 향해 돌진하고 여관집 딸을 공주로 여겨 그녀를 위해 충성서약을 바치며 기분을 내는 그들. 그러나 현실을 잃고서라도 헛된 이상을 위해 희생하던 그와는 달리 그들은 현실을 직시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기사라는 호칭의 유래인 ‘말’을 먹어치울 정도로. 여관집 주인을 공주를 핍박하는 악당이라고 낙인찍으며 무참히 학살하는 과단성을 보이는 이들은 다소 폭력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린 듯하다. 경악을 금치 못하게도 모험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공주(여관집 딸)마저도 자살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이제 구시대의 율법은 더 이상 유효치 않으며 자신을 구속하는 어떠한 속박에도 개의치 않으려 한다. 그들의 원본이 구태히 공주를 만들어 자신을 ‘신성한 의무’라는 속박에 얽어두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그리하여 두 기사는 돈키호테가 저지른 불행한 공과를 청산하기에 이른다.

부정하고 더러운 현실에 살면서도 세상 앞에 당당하지 못하고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소심인들’인 소시민들, 바로 우리의 모습은 기력이 다된 노인의 모습을 한 얼토당토않은 두 인물로 상징된다. 불의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살인’이라는 방식을 택한 그들의 결단(?)도 사실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형국으로 아무 의미 없는 듯 그려진다. 그리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두 영웅마저 살해하고야 마는 작가의 조소에 몸서리 처질 정도의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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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양산
마쓰다 마사타카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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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의 죽음은 지축을 흔들고 창공을 어둡게 한다. 그리고 기이를 일으킨다. 신이 죽고 난 후 태양이 구름에 가리우고 땅이 흔들려 성소 휘장이 양쪽으로 찢긴 것 처럼.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의 죽음은 주변인들에게 어떠한 예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은 예술의 주요한 모티브였다. 죽음을 그리고, 죽음을 쓰고, 죽음을 연주해 온 인간들. 그 속에서 죽음은 항상 극적이고 무언가 큰 전환을 만들어내는 계기였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대해 너무나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상에서 맞부닥치는 죽음은 어떤가. 그것은 지인들의 슬픔 외엔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 죽음으로 어떤 이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고있다 하더라도 그 날의 해는 떴다가 지고,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부단히 운행할 뿐이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보이는 니힐리즘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이 책 '바다와 양산'은 그런 일상적인 죽음을 그리려 한 작품이다. 시한부 인생 부인과 그 남편의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우리는 실제와 가장 비슷한 죽음의 모습,그리고 평범한 삶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은 희곡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인물의 대사와 지문 그리고 간단한 해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상당히 제한적이고 절제되어 있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품의 얼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서 독자들은 어떤 극적인 갈등과 극복을 느끼길 기대하며 행간을 읽어 내려가지만 정작 발견해내는 것은 나오코의 죽음과 무덤덤하게 밥을 떠 넣는 남편의 모습 뿐이다. '죄와 벌'에서 그려진 수 많은 사상의 다툼과 주인공의 내면과 대치하는 외력들도 보이지 않고, 햄릿처럼 극적이고 유장한 분위기의 약간 조차 느끼지 못한 채. 시원한 청량음료를 기대하며 마셨지만 병 안에 들어있던 것은 시원한 생수였던 경험을 떠올리게 하듯 작품은 그렇게 끝을 낸다.

무척 어렵고 복잡한 소설을 읽고 난 후, 그리고 선문답을 듣고 난 후 곰곰 생각해 보기 위해 다시금 떠들어 보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책장을 다시 펼치지 않았다. 책을 다시 읽어 작가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싶은게 아니라 내 영혼이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모습이었다. 문득 나오코의 조용하고, 극의 비중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죽음을 오랫동안 헤아려 보고 난 후에 느낀 것은. 일상은 똑같은 터미널을 반복적으로 드나드는 여행의 반복일 뿐이다. 목적지도 같고 귀환할 곳도 같지만 언젠가는 끝이 날 여행. 놀라운 생명의 경이 조차도 일상의 반복성에 색이 바래고 만다. 내가 큰 기대를 가지고 드디어 도착한 어느 곳은 그곳에서 기념품을 파는 상인에겐 지루한 일상의 공간일 뿐인 것 처럼. 결국 어느 사람의 곁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죽음과 탄생도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죽음에 가까울 수록 우리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지만 종래엔 자신의 목적지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부인의 죽음을 앞둔 요지에게 동네 운동회 참가를 권유하는 다케후미 부부, 출판부 일을 위해 그에게 원고를 받으러 오는 요시오카 처럼.

그렇다고 누구도 자신의 삶을 소홀히 할 순 없다. 소설 등신불에서 산 채로 몸을 공양해 숯덩이가 된 육체 앞에 들어보이는 상처 난 손가락이 얄밉긴 하지만 누구도 지탄(指彈)할 순 없듯 말이다.

바다와 양산을 읽으며 발견하는 것은 그대로 재현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일 뿐.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양적인 여백의 미는 주인공 부부의 대화 사이의 적막이 아니라 외려 존재의 기로에 선 주인공 주변인물들의 무채색의 일상일 것이다. 누구도 그 감동을 설명해 줄 순 없다. 세상엔 무수한 인간들이 살고 그 인간들은 나와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발견한 감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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