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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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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코 고전 중 최고의 만듦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완전 소장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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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세상의 문을 여는 코드 - 모든 것은 숫자로 통한다
피터 벤틀리 지음, 유세진 옮김 / 수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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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나가면서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책은 칼 세이건 의 명저 ‘코스모스’이다. 한동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코스모스만큼이나 다방면의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어찌 보면 호기나 객기처럼 여겨지는 이 책의 부제 - 세상의 문을 여는 코드라는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확실히 여러 방면에 이해를 돕는 충실한 내용들이 많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완전수 6에 대한 찬양, 부처가 수학자 아르주나와의 대결에서 낸 문제에 숨어있는 원자의 크기에 대한 답. 새뮤얼 스마일스가 ‘자조론’에서 근대 방직공업의 아버지로 소개하는 조셉 자카드. 그의 문직기가 사실은 현대의 컴퓨터와 다름없었다는 것. 천문학자들의 수명을 늘려준(?) 로그의 발견 등 천문학, 공업, 종교 등 인간 세계의 거의 모든 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숫자의 위대한 힘에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놀랄 만 한 거리가 남아있다면 숫자가 언어와 풍속마저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숫자 3은 시와 음악에 영감을 제공하는 숫자이다. 음악에서 셋잇단음표가 자주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에도 3에 의존한 각운이 많다. ‘런던다리’라는 영국의 유명한 동요에는 ‘무너진다네(falling down).’이라는 말이 세 번씩 반복된다.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연설문의 ‘피, 땀, 눈물’은 세 단어가 가슴에 와 닿으면서도 가장 익숙한 세 어절의 운율을 맞추었기 때문에 더 유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가장 숭고한 뜻으로 쓰이는 ‘영원(eternity)’이라는 단어는 ‘삼위일체(trinity)’의 고대어 ternity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민족도 예로부터 3과 5를 길하게 여겨왔고 전통장단에도 5박자가 많으며 음계 또한 5음계 인 것을 생각하면, 졸업하고 나면 수학과는 ‘영원히’ 안녕이라는 말도 그리 옳은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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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다이어트 - 당신이 먹는 음식,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앨런 C. 로건 지음, 서예진 옮김 / 수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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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어른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있다. 살아가다보면 무심코 대했던 속담과 격언들을 어느 순간엔가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 『브레인 다이어트』와 관련해서도 인용할 수 있는 훌륭한 속담이 있다. ‘밥이 보약이다’라는 옛 말이다. 현대인들에게 영양 결핍으로 인한 결핵 같은 질병은 이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매일 수십, 수백 톤의 음식물 쓰레기를 걱정하는 판국에 어떻게 영양이 부족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의외로 현대인들은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신경과민이나 불면증 같은 질환들은 그야말로 과민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영양결핍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 최근에 유행했던 웰빙 열풍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잘 먹고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미식’이라는 말이나 먹을 것을 잘 챙겨 먹는다는 표현도 보기 좋고 구하기 어려운 음식들을 관심을 가지고 찾아다니며 먹는다는 말일 뿐 영양상의 균형을 고려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뇌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공부나 자기계발 외에 ‘필요한 영양소를 잘 섭취하는 방법’도 있음을 지적한다면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쓰이는 다이어트의 의미와 달리 이 책 『브레인 다이어트』는 DIET 즉, 올바른 영양을 취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서두에서 말했듯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영양소의 풍부한 섭취를 권장하고 있다 -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식습관과 섭취하는 영양소의 차이에 따라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마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비타민과 미네랄과 같은 영양소들은 아주 미세한 양만 섭취해도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므로 ‘미량영양소’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권장량마저도 채우지 못해 결핍증을 겪는다. 그래서 특별히 이러한 성분이 강화된 식품들을 찾아서 먹지만 효과는 의문이다. 강화된 성분의 영양소뿐만 아니라 설탕이나 그 밖에 몸에 해로운 첨가제도 같이 섭취하기 때문이다. 만성 피로와 우울증 같은 증세는 놀랍게도 아연이라는 미량 영양소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아연은 해조류나 견과류를 통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아연이 첨가된 음료를 마심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아연이 필요하다고 그런 음료수를 몇 잔이고 들이켰다간 필요 이상의 설탕도 섭취하게 되어 결국 쇠 뿔 바로잡으려다가 소 잡는 격이 된다.


 

 

잘못 알고 있는 상식들도 얼마나 우리 몸에 심각한 해로움을 끼치는가 하는 것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흔히들 공부할 때는 열량이 많이 필요하므로 초콜릿을 먹으라고 한다. 그런 이유 외에도 잠이 오거나 하는 것을 막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탕을 권하곤 한다.

 

본문에서는 이런 단당류가 몸에 들어왔을 때 뇌와 신진대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즉, 두뇌에 영양을 공급해서 잠깐의 힘을 낼 수는 있지만 곧 혈당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두뇌를 더욱 굶주리게 만든다! 이를 두고 책에서는 ‘첫 만남 후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는 남자’라는 다소 코믹한 말로 설명하고 있다. ‘황동석(금과 비슷하지만 금은 아닌 광석)’이나 ‘공허한 약속’이라는 재치있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알게 된다면 웃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과다한 소금을 섭취하면 고혈압에 걸리게 된다는 상식과 마찬가지로 과다한 설탕류를 섭취하면 당뇨에 걸리게 된다는 것 또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당뇨나 고혈압에 걸리면 체내 인슐린 농도를 높게 만들어 알츠하이머나 우울증 같은 신경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도 커진다고 한다. 단지 일상생활에서 단 것을 좋아하고 자주 먹는 습관이 우울증이나 치매라는 심각한 결과로 발현되는 것이다.


 

책의 어느 장을 펴도 몸에 유익한 정보들이 아주 자세하고도 이해가 쉽게 담겨 있기에 이 책을 ‘가정용 동의보감’이라고 부른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오메가 3지방산이라고 한다면 쉽게 알아듣기도 어렵고 친숙하지도 않지만 DHA나 EPA라고 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참치에도 많이 들어있는 이 성분들의 효능과 효과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이 책은 매우 시각적이고도 즉각적인 이해가 되도록 묘사한다.


 

우리 몸에서 만들 수 없고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 지방산이라고 하는데 이 필수 지방산은 두뇌가 촉촉하게 유지되도록 기름을 쳐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신경 세포를 감싸는 신경 세포막을 형성한다. 신경 세포막은 유연하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를 통해 중요한 전달물질이 지나간다....(중략).....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이 부족하고 포화 지방산이 너무 많으면 세포막이 단단해져서 신경 세포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지방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신경 정신 질환의 발병이나 치료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현대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닌 질환들(예를 들면 신경과민이나 불면증)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기 때문에 잘 읽어두고 참고한다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건강문제는 보통 자신에게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다가오지만 의사나 타인들에겐 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생사가 엇갈리는 중병들에 비한다면야 불면증과 같은 증세는 매일 같은 질환으로 수십 명의 환자들을 대면하는 의사들에겐 이미 기계적인 처방이 마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면증으로 여러 날 밤을 고통스럽게 지내는 일반인들에겐 더없이 심각한 문제이다. 더군다나 수면제를 사용하기엔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것 같고 그러다 고통에 못 이겨 수면제를 한두 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끊을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 때문에 약으로 해결하기에도 곤란한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반신욕이나 발 마사지, 그 외에 쉬운 것 같으면서도 번거로운 방법들(사실 욕조가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과 달리 적절한 영양소를 일상 음식을 통해서 섭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점점 더 문명화되어가는 인간은 원시 자연생활이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문제들을 점점 더 많이 겪게 되는 듯하다. 인간이 직립보행하면서 얻은 가장 고약한 질환은 치질이라고 한다. 억세고 딱딱한 음식들을 먹다가 부드럽고 정제된 음식들을 먹다 보니 얼굴골격이 작아져서 사랑니가 나기 시작하면 굉장히 고통스럽고 두렵기까지 하다. ‘잠을 잊은 그대에게’는 더 이상 낭만에 젖은 심야 프로그램이 아니라 불면증에 걸린 현대인들의 애환이 담긴 프로그램이다. 극단적으로 자연으로 모든 것을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바이지만 어느 정도 인간 고유의 생활방식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장방법의 미약함과 풍족하지 않은 먹잇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일 새롭고 신선한 음식을 섭취했던 원시인들은 현대인들보다 더 미식가이며 행복했을지 모른다. 바로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리 먹어도 허기지고 배고프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제는 끼니를 거르고 별로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붙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 우리가 지금 먹는 음식들이 대체 어떤 것들인지 잘 알고 먹어야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으며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 육체적인 운동과 정신적인 노력 외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해 주는 문구를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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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
이명학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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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너무 많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 쪽의 사료가 부족한 이유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사료들은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학파를 이룰 정도로 역사를 연구하는 상이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견들이 말해주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역사가 특정한 공간에만 제약되지 않고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도 그러했지만 고대인들의 의식 또한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던 것 같다. 비교적 고립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라시대 때마저도 외래인 들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왕족이었던 석씨의 시조 석탈해도 본래 외래인 이었다고 하며 가야국이 인도 아유타이국과의 깊은 연관을 맺었고 상당한 교류를 했던 흔적이 발견되는 등 흥미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라는 이름하에 신라에 전해져 신라 유적지에서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의 역사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졌던 만큼 폭넓은 기록을 통해 우리역사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 만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세계 안의 우리라는 보편성을 가질 때 문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제공받는다.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했던 고구려. 고구려사를 우리의 사료에서 벗어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거시적이기 보다는 걸출한 인물 한 명, 한 명을 조명하여 전체 역사를 되짚어보는 책. ‘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이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를 붙인다면 ‘주몽에서 이사도 까지’라는 부제가 어울릴 것이다. 대개의 고구려사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함락, 또는 고구려 부흥운동까지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고구려사’보다는 ‘고구려 인’에 초점을 맞춘 만큼 중국으로 이주하여 삶을 계속한 고구려인들에까지 역사가 계속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선지를 다룰 뿐만 아니라 이정기, 이납, 이사고라는 조금 생소한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실 고구려를 다룬 중국 정사의 사료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시간적 전후관계 이외에는 어떠한 일관성 등은 발견하기 힘들다. 역사서라고 하면 으레 그렇듯 편집자의 논평이 있거나 논조 등이 고정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어떠한 부분에서도 그런 부분이 직접적으로 표명되는 곳은 없다.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만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으로 기록하고 잘 알려져 있듯 9자루의 칼을 차고 사람을 밟고서 말에 올랐다는 흉포한 모습이 의도적으로 부각한 사료들도 그대로 올라 있다. 이와 같은 일화들이 어떠한 의도에서 재구성되어 전해졌는지 아는 독자라면 상당히 흥분할 만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사를 편협한 테두리에 국한시키려는 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다른 미덕들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 편에서는 『동명왕편』 전문이 실려 있다. 고등학교 ‘국사’에서도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 함께 언급되는 이 작품은 내용이 비록 정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지만 주몽의 사적을 아름다운 운율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혼란기를 겪던 고려시대에 자긍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서에서 주몽을 다루면서 동명왕편을 함께 수록한 책들이 참 드물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한 우리역사에서 국난극복의 힘이 된 것은 고구려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을지문덕 편에서는 권덕규의 『을지문덕』이라는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데 정통역사서의 사실 뿐 아니라 『돈씨가승(頓氏家乘)』이라는 자료의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을지씨의 후손이 고려로 건너가 '돈(頓) 씨' 성을 사성 받았는데 돈씨가승은 가문의 연대기와 비슷한 성격의 자료이다. 거기에는 을지문덕의 묘지와 석상 등이 존재했으며 활쏘기를 연습한 터의 위치 등을 언급하고 있어 그가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존재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색다르다. 『을지문덕』에는 수나라의 침략을 지략으로 격퇴한 사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국한문 혼용체와 다름없는 어투이지만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듯 별로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어 역사서를 통해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 성의 있는 자료를 곁들여 내용을 보완한 효과는 뚜렷하다. 중국의 정사들을 주된 내용으로 삼아 고구려인들에 대해 다소 편파적이고 적대적인 느낌이 없지 않은데 중요한 인물들에게 이처럼 별도로 사료를 덧붙여 우려되는 바를 희석시켰다. 그러면서도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정통적인 사료들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고구려의 전체적인 역사보다도 인물들 위주로 내용을 구성한 데에 따른 특별한 장점들도 있다. 요즘의 몇몇 역사책들 중에 역사 전체를 다룬다기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도서들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의복의 변천사를 통해 시대상의 변화를 같이 서술한다거나 중요한 발견이나 특별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통시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방법에는 큰 이점이 있다. 역사책이 지루한 것으로 평가받는 주된 요인인 긴 호흡이나 딱딱한 내용에서 벗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몇 백 년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기도 하기 때문에 집중과 긴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에 미시적인 관점이 주는 혜택은 고구려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스스로도 인식했듯 고대 동북아시아의 중심세계였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주변 세계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겪었다. 또한 고구려라는 국호가 없어진 다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어 멸망 후에도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 책의 <모용운(慕容雲)> 편은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포함된 부분이다. 선비족의 성씨였던 ‘모용씨’가 고구려인에 포함된 것을 보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사실 후연의 왕이었던 모용운은 고구려인이었던 고화의 손자로 원래 ‘고운(高雲)’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정권을 잡은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구려와는 각별한 관계였으며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중국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겐 고선지가 대표적인 경우로 알고 있지만 왕사례나 왕모중 같은 인물들도 당대 역사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고구려인이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발해(대진국)와 함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인식해야 할 또 하나의 국가가 있는데 바로‘평로치청국(平盧淄靑國)’이다. 이 책에서는 이정기로부터 이사도로 이어지는 역사가 바로 치청국 제왕들의 역사이다. 『구당서』에 기록된 이들의 모습은 당나라 절도사의 직위와 고위 관작을 제수 받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무언가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기와 그 일족이 거듭해서 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위는 더욱 높아만 졌기 때문이다.


 


치청국은 15개 주에 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이정기가 대운하를 차단해서 당나라의 조정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는 끊임없이 당나라를 위협하여 당나라가 치청국을 침공하려 비축해 둔 군량미 창고인 하음전운원의 200만석의 곡식을 불태운다.


 


이렇듯 당나라로 보면 내환을 넘어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지만 구당서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들을 단순히 조정에 반감을 품은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치청국의 황제 이납이 죽자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폐하였다는 기록은 웃음을 넘어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청국의 황제 이정기에게는 사후 태위의 관작을 추증했고 이사고는 태부에 추증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 깨달은 사실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렇게 쉽게 수긍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역사가 바로 역사이다.’그 사람들이 권력자나 지배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사람이나, 누구든지’를 뜻하는 말이라면 쉽게 긍정할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독식하는 무대로 생각해 왔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느냐’며 반역을 일으킨 노비 만적은 아직도 우리에게 회자되며 시대의 선구자로 인식된다. 비록 그의 이상이 당대 기득권과 역사를 집필한 승자의 세력에게는 불온한 것에 비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서에서 간악하게 비추어졌던 그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정신과 이상은 가려질 수 없었다.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면에서 공정한 곳이다. 의도적 곡필에도 끝끝내 사실과 진실은 감출 수 없으니 말이다.


 


오랜 전란과 거듭된 외침으로 이 땅은 여러 번 불탔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살아있다. 그동안 이룩해 왔던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조상들의 역사마저도 우리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승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폄훼한 기록에서마저도 조상들의 높은 뜻과 큰 기상이 온전히 느껴진다. 서구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를 그토록 칭송하면서 우리 고유의 호전적 정신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다.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을 신묘한 계략으로 몰살시키고 침략자들의 뼈가 묻힌 곳에 ‘경관’이라는 사적을 세워 기념한 고구려인들의 호탕함. 큰 힘만 믿고 안하무인의 무례한 태도로 싸움을 걸어온 수나라의 국서를 보고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하며 결연한 의지로 외교적 결례를 꾸짖은 강이식 장군의 기백을 기억해야 한다. 왕후장상이 따로 있어 역사에 남는다는 말 보다 평범한 우리의 사려 깊은 행동, 위급한 상황에서의 지혜로운 대처가 기억되어 역사가 된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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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세대를 위한 유교철학 에세이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성균관대학교 유학주임교수실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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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도리는 가축의 도리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며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확연한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무례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을 지탄할 때 동물을 빗대어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타인과의 언쟁 와중에 자신이 개나 소 취급을 받을 때 분노가 머리 끝 까지 치밀어 오름을 느껴보았다면 이것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일까? 만약 유교적인 가치관에 근거하여 대답한다면 예의와 염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흔히들 예의를 차린다고 하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의식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예의 근본의미를 안다면 그 당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항상 맞부딪치는 것이지만 진지하게 되돌아볼 기회는 없었던 것. 유교의 참신한 해석과 우리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본 책이 ‘N세대를 위한 유교철학 에세이’이다.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매우 혼란하며 추악한 인간 군상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암담한 세상이었다고 한다. 친남매들이 근친상간을 범하거나 권력을 위해 아비를 죽이며, 포악한 도적이 그 잔혹함으로 명성을 얻어 도척이라는 자는 사람의 간을 날로 회쳐먹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세상이 혼란하다고 하지만 결코 그때 당시보다 더하진 못할 것이다. 법에 근거하여 나라가 다스려지는 지금에서도 패륜적이고 간악한 범죄가 벌어지면 인간 본성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은 원래 저렇게 교활한 동물이야’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춘추 전국의 혼란상을 직접 보게 된다면 어떠할까. 결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혼란의 한 가운데서도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임을 굳게 믿고서 약간의 수정(?)만 가능하다면 다시 선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공자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는 참신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추악함은 이미 매양 보아왔던 것이고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던 시대였다. 또한 백성이란 전쟁에 필요한 군사이며 물자를 생산하는 도구로밖에 인식되지 않던 때였다. 그런 와중에 부형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을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군주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더군다나 전쟁을 일으켜 국가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에.

 


시대상황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았을 때 공자를 비롯한 유가 사상가들의 주장은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들렸을 것이다. 당장 진나라와 같은 변방의 나라는 상앙을 위시한 법가의 정책을 받아들여 초강국으로 변모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이룩하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상앙마저도 결국엔 자신이 실행한 몰 인간적인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자승자박이다. 후에 법가를 받아들였던 진나라는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한나라를 시초로 중국 역대 왕조들이 계속해서 유교를 받아들였음을 본다면 유학은 매우 성공적인 가치관이었음이 자연히 입증된다. 그렇다면 유교의 핵심적인 가치관인 예와 인은 무엇일까?


 

예와 인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여러 장에 걸쳐 등장한다. 먼저, 예의 근본정신을 아주 핵심적으로 함축한 말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장에서 나온다. 대표적인 허례허식으로 일컫는 제사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부모에 대해서도 그렇게 극진하게 섬길 것이면 살아있는 부모야 오죽하겠는가.”하는 이면의 의미가 담겨있다.― p38」즉, 제사는 귀신을 섬기기 위해 지내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선조를 극진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아계신 부모님들을 봉양하는 마음을 살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계기가 허례허식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다. 책에서는 맹자의 충격적인 한 구절을 소개한다. 좋은 음식과 따뜻한 옷으로 부모를 잘 모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와 말을 잘 키운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구절이다.  

그래서 예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논어에는 예의 정신을 생각해 보게끔 하는 대목이 있다. 희생양을 바치는 예에 대해 제자인 자공이 아까워하자 공자는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말한다.(『논어(論語)』-「팔일(八佾))」 공자 시대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지긴 했지만 원래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였다고 한다. 공자의 말은 정신은 없어졌더라도 양을 바치는 예라도 남아 있으면 후손들이 그 양을 보고서라도 본래 정신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뜻이다. 『예는 개인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틀이다 』는 장에서는 서양의 예절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조상들의 예절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서양의 악수는 칼을 찬 상대방들의 공격의사가 없음을 확인하는 예절이고 ‘Lady First’는 위험한 곳에 여자를 먼저 들여보내 위험을 확인하려는 남성들의 가증스런 관습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보다 근본적인 정신에 입각한 형식이었던 조상들의 예절에서 극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맹자의 첫 장인 양혜왕 편에서 왕이 맹자를 모셔다가 ‘선생께서 먼 길을 마다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떤 이로움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한 구절을 두고 사마천은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고 한다. 맹자가 뒤이어 말하듯 위에서부터 이익을 취할 것 같으면 아래까지도 모두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혈안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利)’가 아니라 ‘의(義)와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사실 위에서도 말했듯 백성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던 당시 사회에서 백성에게 ‘인’을 베푼다는 생각은 요원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恕)’을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삼았고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하나로 관철된 도리의 실상(충서)이라고 증자가 말한 것이다.


 

‘인(仁)은 동이족의 마음’이라고 이기동 교수는 말한 적 있다. 군자불사지국이며 공자가 군자의 나라로 동경하여 가서 살고 싶어 했던 동이족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인(仁)이라는 것이다. (이(夷)라는 단어를 풀이해보면 인이라는 글자가 들어있음을 발견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의 것으로부터 짐작하여 생각해 나간다면 인이라는 마음은 사람을 소중히 하고 인간 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다(까치밥과 고수레에서 보듯이) 이 책의 『인은 사랑이다』라는 장에서는 인의 기본 정신을 생명에 대한 사랑이며 ‘낳고 살리길 좋아하는 미덕-p66’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이웃이나 동식물 자연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영양분을 짜낼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들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환경은 풍요로워질 것이고 모든 인간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맹자는 인(仁)한 마음에 근거하여 고기 잡는 촘촘한 그물을 쓰는 것과 마구잡이로 벌목하는 것조차 언급하고 칠십 노인이 따뜻한 옷을 입고 백성이 굶주리지 않으면 도(道)가 이루어져 누구나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오륜의 현대적 해석』에서는 인의 기본 정신에 입각해서 수평적인 가족관계와 평등한 민주사회에서 오륜을 여전히 중점적인 가치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모색한다. 무엇보다도 고루한 생각에 근거하지 않고 과감히 취사선택하는 합리성을 보이면서 본래의 정신과는 다르게 왜곡된 윤리인 ‘삼강(三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綱)’ 즉, ‘벼리’라는 말에서 수직적이고 왜곡된 인간관계가 연상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타당성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의 것에만 연연하지 않고 현대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에서 유교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수 연구자들의 에세이 형식으로 엮어져 전체적인 일관성이 저하된다거나 동일한 구절에 대해 반복적으로 해석하고 그에 담긴 뜻을 취사선택하여 ‘견강부회’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점은 다소 유감이다. 그리고 ‘에세이’라고 보기엔 별로 말랑말랑하지 않고 건조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반면에 『주역 읽기』는 사주팔자 보는 책으로 생각하기 쉬운 주역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난해한 기호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 인문학적 사상들이 담겨 있음을 알려주어 매우 신선했다. 고전읽기에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인 ‘친숙하지 않은 문체’나 ‘싱거움’을 외면하지 않고 연구자가 똑같이 고민하던 때를 생각하며 친절하게 이야기하는 첫 구절은 정말 인상 깊은 것이다. 아울러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의 관조적이고 시적인 문체도 멋지다. ‘삶은, 꽃을 시샘하는 봄바람 한 자락에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오얏꽃, 복숭아꽃처럼 스러지는 덧없는 것’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네 아름다운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라는 시경의 구절을 음미하며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상하게 하지 않는다.『논어(論語)』-「팔일(八佾)」’라며 즐거워한 공자의 깨끗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유학의 인문주의를 이 책을 통해 재발견하게 된 좋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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