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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
이명학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평점 :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너무 많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 쪽의 사료가 부족한 이유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사료들은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학파를 이룰 정도로 역사를 연구하는 상이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견들이 말해주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역사가 특정한 공간에만 제약되지 않고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도 그러했지만 고대인들의 의식 또한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던 것 같다. 비교적 고립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라시대 때마저도 외래인 들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왕족이었던 석씨의 시조 석탈해도 본래 외래인 이었다고 하며 가야국이 인도 아유타이국과의 깊은 연관을 맺었고 상당한 교류를 했던 흔적이 발견되는 등 흥미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라는 이름하에 신라에 전해져 신라 유적지에서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의 역사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졌던 만큼 폭넓은 기록을 통해 우리역사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 만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세계 안의 우리라는 보편성을 가질 때 문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제공받는다.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했던 고구려. 고구려사를 우리의 사료에서 벗어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거시적이기 보다는 걸출한 인물 한 명, 한 명을 조명하여 전체 역사를 되짚어보는 책. ‘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이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를 붙인다면 ‘주몽에서 이사도 까지’라는 부제가 어울릴 것이다. 대개의 고구려사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함락, 또는 고구려 부흥운동까지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고구려사’보다는 ‘고구려 인’에 초점을 맞춘 만큼 중국으로 이주하여 삶을 계속한 고구려인들에까지 역사가 계속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선지를 다룰 뿐만 아니라 이정기, 이납, 이사고라는 조금 생소한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실 고구려를 다룬 중국 정사의 사료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시간적 전후관계 이외에는 어떠한 일관성 등은 발견하기 힘들다. 역사서라고 하면 으레 그렇듯 편집자의 논평이 있거나 논조 등이 고정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어떠한 부분에서도 그런 부분이 직접적으로 표명되는 곳은 없다.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만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으로 기록하고 잘 알려져 있듯 9자루의 칼을 차고 사람을 밟고서 말에 올랐다는 흉포한 모습이 의도적으로 부각한 사료들도 그대로 올라 있다. 이와 같은 일화들이 어떠한 의도에서 재구성되어 전해졌는지 아는 독자라면 상당히 흥분할 만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사를 편협한 테두리에 국한시키려는 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다른 미덕들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 편에서는 『동명왕편』 전문이 실려 있다. 고등학교 ‘국사’에서도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 함께 언급되는 이 작품은 내용이 비록 정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지만 주몽의 사적을 아름다운 운율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혼란기를 겪던 고려시대에 자긍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서에서 주몽을 다루면서 동명왕편을 함께 수록한 책들이 참 드물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한 우리역사에서 국난극복의 힘이 된 것은 고구려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을지문덕 편에서는 권덕규의 『을지문덕』이라는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데 정통역사서의 사실 뿐 아니라 『돈씨가승(頓氏家乘)』이라는 자료의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을지씨의 후손이 고려로 건너가 '돈(頓) 씨' 성을 사성 받았는데 돈씨가승은 가문의 연대기와 비슷한 성격의 자료이다. 거기에는 을지문덕의 묘지와 석상 등이 존재했으며 활쏘기를 연습한 터의 위치 등을 언급하고 있어 그가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존재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색다르다. 『을지문덕』에는 수나라의 침략을 지략으로 격퇴한 사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국한문 혼용체와 다름없는 어투이지만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듯 별로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어 역사서를 통해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 성의 있는 자료를 곁들여 내용을 보완한 효과는 뚜렷하다. 중국의 정사들을 주된 내용으로 삼아 고구려인들에 대해 다소 편파적이고 적대적인 느낌이 없지 않은데 중요한 인물들에게 이처럼 별도로 사료를 덧붙여 우려되는 바를 희석시켰다. 그러면서도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정통적인 사료들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고구려의 전체적인 역사보다도 인물들 위주로 내용을 구성한 데에 따른 특별한 장점들도 있다. 요즘의 몇몇 역사책들 중에 역사 전체를 다룬다기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도서들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의복의 변천사를 통해 시대상의 변화를 같이 서술한다거나 중요한 발견이나 특별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통시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방법에는 큰 이점이 있다. 역사책이 지루한 것으로 평가받는 주된 요인인 긴 호흡이나 딱딱한 내용에서 벗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몇 백 년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기도 하기 때문에 집중과 긴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에 미시적인 관점이 주는 혜택은 고구려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스스로도 인식했듯 고대 동북아시아의 중심세계였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주변 세계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겪었다. 또한 고구려라는 국호가 없어진 다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어 멸망 후에도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 책의 <모용운(慕容雲)> 편은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포함된 부분이다. 선비족의 성씨였던 ‘모용씨’가 고구려인에 포함된 것을 보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사실 후연의 왕이었던 모용운은 고구려인이었던 고화의 손자로 원래 ‘고운(高雲)’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정권을 잡은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구려와는 각별한 관계였으며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중국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겐 고선지가 대표적인 경우로 알고 있지만 왕사례나 왕모중 같은 인물들도 당대 역사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고구려인이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발해(대진국)와 함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인식해야 할 또 하나의 국가가 있는데 바로‘평로치청국(平盧淄靑國)’이다. 이 책에서는 이정기로부터 이사도로 이어지는 역사가 바로 치청국 제왕들의 역사이다. 『구당서』에 기록된 이들의 모습은 당나라 절도사의 직위와 고위 관작을 제수 받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무언가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기와 그 일족이 거듭해서 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위는 더욱 높아만 졌기 때문이다.
치청국은 15개 주에 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이정기가 대운하를 차단해서 당나라의 조정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는 끊임없이 당나라를 위협하여 당나라가 치청국을 침공하려 비축해 둔 군량미 창고인 하음전운원의 200만석의 곡식을 불태운다.
이렇듯 당나라로 보면 내환을 넘어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지만 구당서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들을 단순히 조정에 반감을 품은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치청국의 황제 이납이 죽자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폐하였다는 기록은 웃음을 넘어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청국의 황제 이정기에게는 사후 태위의 관작을 추증했고 이사고는 태부에 추증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 깨달은 사실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렇게 쉽게 수긍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역사가 바로 역사이다.’그 사람들이 권력자나 지배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사람이나, 누구든지’를 뜻하는 말이라면 쉽게 긍정할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독식하는 무대로 생각해 왔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느냐’며 반역을 일으킨 노비 만적은 아직도 우리에게 회자되며 시대의 선구자로 인식된다. 비록 그의 이상이 당대 기득권과 역사를 집필한 승자의 세력에게는 불온한 것에 비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서에서 간악하게 비추어졌던 그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정신과 이상은 가려질 수 없었다.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면에서 공정한 곳이다. 의도적 곡필에도 끝끝내 사실과 진실은 감출 수 없으니 말이다.
오랜 전란과 거듭된 외침으로 이 땅은 여러 번 불탔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살아있다. 그동안 이룩해 왔던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조상들의 역사마저도 우리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승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폄훼한 기록에서마저도 조상들의 높은 뜻과 큰 기상이 온전히 느껴진다. 서구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를 그토록 칭송하면서 우리 고유의 호전적 정신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다.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을 신묘한 계략으로 몰살시키고 침략자들의 뼈가 묻힌 곳에 ‘경관’이라는 사적을 세워 기념한 고구려인들의 호탕함. 큰 힘만 믿고 안하무인의 무례한 태도로 싸움을 걸어온 수나라의 국서를 보고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하며 결연한 의지로 외교적 결례를 꾸짖은 강이식 장군의 기백을 기억해야 한다. 왕후장상이 따로 있어 역사에 남는다는 말 보다 평범한 우리의 사려 깊은 행동, 위급한 상황에서의 지혜로운 대처가 기억되어 역사가 된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