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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베쓰야쿠 미노루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세상을 향해 던지는 잔혹한 조소
옛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옛 것에 매달려 그것을 고수하려 하는 사람은 추하게 느껴지며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중세’가 지나가 버리고 난 후에도 철갑을 입은 기사의 모습을 하고 판타지에 빠진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후자의 대표적 유형이다. 그러나 그가 경원시 될지언정 우리에게 영영 배척되지는 않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희극과 골계 때문이다.
그 인물은 오히려 사랑받았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는 회자되었고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변형의 한 유형으로 베쓰야쿠 미노루에 의해 2명의 돈키호테가 창조되기에 이른다.
비슷한 품성을 가진 그들은 어리둥절하게도 서로를 혐오한다. 타인의 시선은 전혀 반영하려 하지 않던 막무가내와도 같은 이 인물(들)이 자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우습게도 또 다른 자신에 의해 자신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난 이후에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분열된 돈키호테는 웬일인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정의의 사도라 부르짖지만 악의 세력에 대해 맞설만한 능력은커녕 멀쩡한 풍차에 돌진해서 고꾸라지기나 하던 무기력한 인물이 눈 깜짝하지도 않고 살인을 자행한다.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무엇이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무엇을 죽인 걸까. 그리고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1. 버려진 영웅들. 비참한 우리들의 자화상
전혀 달갑지 않은 두 인물들이 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유혈이 낭자한 잔혹극을 펼치는 걸까. 잠시 후면 제 발로 무덤 속에 처박힐 것 같은 그들이. 한 발은 벌써 관 속에 들여놓은 듯한 유령 같은 존재들이.
기사1, 2가 서로의 충실한 복제품인 것과 동시에 두 기사 모두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의 복제이자 변주다. 그들은 악령과도 같다. 죽었지만 채 눈을 감지 못하고 무덤 밖을 배회하는 실체. 마음이 어딘 가에 정주하지 못 하고 떠도는 우리들 같이. 더 이상 비참한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던 그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죽여주길 바란다. 그러나 스스로 눈을 감지 못해 외력에 의해 소멸되길 바라는 존재들이기에 세상을 편력한다.
두 명의 기사는 분열된 실체를 상징하며 상실과 소외의 시대인 현대의 자화상이다. 역설적이게도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혐오감을 느끼는 그들.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혐오한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불편한 현실' 을 해소하는 마지막 영웅으로서의 두 기사
의사와 목사는 현대인의 병리적인 모습을 해결해 주는 존재로서 부각되곤 하지만 사실 그들도 위선자들일 뿐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거의 알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그 일을 한다. 무지한 나머지 문맹인 것도 모자라 간호사보다 사리분별이 못한 의사. 그보다 좀 낫긴 하지만 이익에만 기민할 뿐 아무런 미덕도 갖지 못한 목사.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타자가 죽길 바라는 그들. 이제 우리의 문제는 구시대의 주술이나 과학문명의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것은 두 인물을 통해 조소하듯 폭로된다.
두 떠돌이 기사는 불편한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이 둘을 제거한다. 아주 능숙하고 잔인하게. 그리하여 돈키호테가 영웅을 흉내 내려 한 바보였다면 두 기사는 바보처럼 보이는 영웅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3.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두 영웅
그들에게 묵과될 수 없는 원죄와도 같은 과거는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과거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모습이었다. 등장에서, 그들은 아직도 과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바보들 인 듯하다. 중세풍의 갑옷을 흉내 내려 냄비를 쓰고 망토를 걸친 모습은. 그러나 어딘가 다르게 보이던 두 인물은 확실히 ‘원본’과 다르다.
거대한 악당 브레아레오를 향해 돌진하고 여관집 딸을 공주로 여겨 그녀를 위해 충성서약을 바치며 기분을 내는 그들. 그러나 현실을 잃고서라도 헛된 이상을 위해 희생하던 그와는 달리 그들은 현실을 직시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기사라는 호칭의 유래인 ‘말’을 먹어치울 정도로. 여관집 주인을 공주를 핍박하는 악당이라고 낙인찍으며 무참히 학살하는 과단성을 보이는 이들은 다소 폭력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린 듯하다. 경악을 금치 못하게도 모험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공주(여관집 딸)마저도 자살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이제 구시대의 율법은 더 이상 유효치 않으며 자신을 구속하는 어떠한 속박에도 개의치 않으려 한다. 그들의 원본이 구태히 공주를 만들어 자신을 ‘신성한 의무’라는 속박에 얽어두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그리하여 두 기사는 돈키호테가 저지른 불행한 공과를 청산하기에 이른다.
부정하고 더러운 현실에 살면서도 세상 앞에 당당하지 못하고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소심인들’인 소시민들, 바로 우리의 모습은 기력이 다된 노인의 모습을 한 얼토당토않은 두 인물로 상징된다. 불의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살인’이라는 방식을 택한 그들의 결단(?)도 사실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형국으로 아무 의미 없는 듯 그려진다. 그리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두 영웅마저 살해하고야 마는 작가의 조소에 몸서리 처질 정도의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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