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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華苑의 향연 - 이야기 장자 철학 ㅣ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송항룡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도(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 말이 너무도 어렵고 난해하여 궤변론으로 유명했던 명가(名家) 철학자인 공손룡을 떠올리게끔 하기도 한다. 도가와 불교의 사유방식을 배우려면 이성이나 기존지식은 한쪽에 고이 모셔다 놓고 와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해했다고 해서 철학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경전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그러나 동양적 사고방식을 서양철학의 사유로 측정하고 판단해서 같은 결론을 얻어낸다면 어떨까? 상당히 모험적이고 당돌한 이 생각이 ‘남화원의 향연’이라는 이야기 장자 철학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칸트의 사유방식으로 생각해보는‘장자(莊子)’
‘남화원의 향연’의 ‘말의 덫’이라는 장을 보면 맹랑자와 무하자의 대화가 등장한다. 맹랑자가 소크라테스처럼 대화와 질문으로 어떠한 결론으로 이끌어가려는 사람이라면 무하자는 그 대화 상대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불은 뜨겁다’는 말을 가지고 혼란은 시작된다. 맹랑자는 ‘불은 뜨겁다’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입에 대고 ‘불’이라는 말을 해도 뜨거울 것이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무하자는 ‘사실의 불이 뜨거운 것이지 불이라는 말 자체가 뜨거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는다고 라면이 끓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맹랑자는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되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칸트의 감성과 오성으로 분석하면 숨겨져 있는 오류를 발견해 낼 수 있다.
감성은 수용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 이에 해당하며 이를 직관형식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오성은 자발적으로 사유 가능한 능력이며 이에 해당한 여러 논리적 판단들과 함께 범주형식이라고 표현한다. 감성과 오성을 정립한 후에 칸트는 그 형식들이 규범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전제를 제시한다.
내용(직관)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즉, 감성과 함께 하지 않은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과 함께하지 않은 감성은 맹목적이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불은 뜨겁다’라는 말에 담긴 오류를 지적하며 맹랑자가 했던 말을 분석해보자.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말은 어떠한 선언이나 명제를 뜻하는 것이므로 ‘판단’이라고 생각해보자.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직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개념만을 가지고 있되 직관은 가지고 있지 않은, 직관 없는 개념의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다.
=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 직관은 가지고 있지 않은 판단
이것은 이미 칸트가 공허하다고 입증한 것이다. 만약 내 앞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고 그 불 가까이에 간다면 나는 그 불을 뜨겁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불’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그것이 ‘뜨겁다’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불이라는 말 자체를 한다고 마술처럼 뜨거움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직관 형식을 갖지 않은 오성의 제멋대로 판단인 것이다. 직관 없는 사고의 비슷한 예인 ‘황금 산’과 마찬가지다. 황금산은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개념이다. 둥근 삼각형이 이미 개념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을 안다면 사고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금 산이 개념에 머무를 뿐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감성의 형식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산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식할 수 없다.(존재하지 않았다.) 불은 나의 생각에 의해 말로써 표현되었을 뿐이지 아직 시·공간적으로 인식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말에 지나지 않은 불이 뜨거울 순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고 바다를 건넜다.’는 말도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식될 수 없다. 인식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 개념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감각자료들이 없기 때문이다.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은 우리는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냄새로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직관 없는 오성의 오류일 뿐이며 고삐 풀린 이성의 망동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맹랑자가 말하는 ‘말(판단)’은 위에서 전제했던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판단이 아니다. 즉, 감성과 오성에 합동작전에 의해 내린 판단이 아니라 감성의 굴레를 벗어 던진 판단이다. 장주의 호접몽이 나 라는 존재와 나비라는 존재의 구분을 벗어던진 것처럼, 도가적 사유는 인식의 속박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을 염두하고 ‘말=판단, 의미=개념(오성), 사실=직관(감성)’이라는 공식을 이용한다면 맹랑자의 다음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에는 사실(직관)은 있을 수 없네.
; 우리, 인식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지세
그러므로 어떤 말도 그 자체로서는 거짓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네.
;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참인 세계에 닿을 수 있다네!
자네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말에서 사실을 찾고 있는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 만약 아직도 인식과 구분을 찾는다면 그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없을 것이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인식이나 직관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므로 맹랑자와 무하자는 이것을 안타까워한다.
무하자 그러나 말(판단)은 실제로 사실(직관)과 무관하게 사용될 수 없지 않은가?
맹랑자 그렇지. 그래서 말이 있는 한 오해가 생기고 속아 넘어가는 거짓말이 없을 수 없지.
인간이 말을 할 수 있게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간이 판단을 한다는 것은 물자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주어진 감성과 오성의 형식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가치’라는 것이 생겨났다. 인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 기준은 철저히 인간 편향된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마치 원음을 녹음하여 시디에 담아 재생하면 원음이 그대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디지털 신호로 원음을 흉내 낸 신호들이 재생되면서 실제와는 다른 왜곡이 발생하는 것처럼. 가치라는 인위적인 것이 생겨난 이상 충돌과 파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가 공자를 그토록 조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올바르지 못한 가치 판단으로 혼란을 겪는 인간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예와 악으로써 교화할 것을 주장하는 공자. 본문에서도 표현된 것과 같이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 않은데 일부러 잡아 당기거나 잘라 내어 예라는 액자를 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생각하는 공자는 ‘노나라의 프로크루스테스’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만약 완수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예전의 무질서와 혼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이 근 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것으로부터 도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교화된다 하더라도 인위적인 예로써 가능한 것이었다면 인위적인 가치들은 항상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다시 춘추전국의 참상이 재현될 것이다. 인위적인 것, 인간중심적인 것이 어떠한 파괴를 불러일으켰는지 이미 우리는 쌓고도 남을 실례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지나온 모든 가치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인류에게 도가철학은 하나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호젓한 산보를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길. 헤겔이 우파니샤드를 침대 맡에 놓아두고 잠들기 전 탐독하면서 지혜를 얻었던 것처럼 우화와 선문답으로 가득한 이 책으로부터 독자들은 그 길을 먼저 걸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