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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1.
30대 중반 한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평생 짊어지고 가게된 고통의 원인을 기억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억이냐고요? ^^
왕따 학생 후지슌의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해자 미시마와 네모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서에 절친으로 올라간 주인공, 그리고 그가 짝사랑했던 사유리 네 명에 얽혀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지만 주인공의 기억 속에는 감정의 과잉이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왕따 학생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추상적 수식어나 장황한 설명이 배제된 체 진행되는 이야기는 피해자와 방관자, 가해자의 모습을 극명하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때는 찔리는 순간이야.
(.....)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하는거야. "
p74~5
제목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직접 가해하지 않았지만, 제물이 된 후지슌을 바라만 보았던 주인공, 그는 평생 십자가의 말을 등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방관자 효과라고 하죠? 위급한 순간에 있는 사람의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책임감은 분산되어 결국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그 당시, 그 일이 일어나는 순간 가진 책임감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지게 되는 죄책감에 100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살아 있는 한 계속 등에 지고가야 하는 일이 될 것이란 걸 알았더라면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하나의 십자가, 후지슌의 가족
사실 그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남겨진 동생 겐스케에게 아픈 상처이자 십자가가 된 후지슌.
소설을 읽으면서 어머니, 아버지, 겐스케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주룩~ 주룩~참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면 흘렸던 눈물이었습니다.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는,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 상처를 벗을 수 있었던 가족. 가족들이 서로를 생각하며 힘들어하고 힘들어할 수 밖에 없음을 숙명처럼 여기는 굴레를 이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왕따라는 문제는 그렇기에 단순히 한 학생 개인만의 상처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난이 될 수도 없고, 어리기에 눈감아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아직도 가해자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실수"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 소설은 남겨진 자의 "숙제"를 많이 남겨주고 있는 듯 합니다.
#2. 술술 잘 읽히는 문체 & 섬세한 번역
단문 위주의 간경한 문장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 책은 술술 잘 읽힙니다. 잘 읽힌다는 말을 쓴 것은 어휘나 문장에 힘이 빠져있어 한 문장 한 문장 뜯어 읽지 않아도 읽다보면 작가의 말이 저절로 머리에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소재가 왕따학생의 자살인만큼 문장에 힘이 들어있었다면 읽는 중간중간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작가는 소재와 주제를 무겁게 다루는 대신 문체엔 힘을 뺐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가를 닮듯, 번역 역시 술술 잘 읽히도록 신경 쓴 흔적이 보였습니다.
#3. 기억에 남는 문장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삶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혀진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추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 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 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p284~285
기억이란 단어를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몇 번을 읽었습니다. 기억, 추억, 상처 이 모두 우리의 삶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허우적 거리길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 지나서 파도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겨우 하나 잊을 수 있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