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활을 내팽개치고, 최악의 경우에 복지시스템에 의존해 살아갈 각오가 돼 있으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교육이나 즐거움을 제공할 수는 없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의 생활 방식에 따라 불행이 결정된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는 게 맞는 걸까? - P74
결국 슈헤이는 처음 내린 결론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가나미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생활도 내팽개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P75
슈헤이는 솔직하게 대꾸했다.이 "대출 상환만으로도 빠듯해서요. 아이를 기를 상황이 아닙니다." 히로카와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젊은 부부를 번갈아 봤다. - P76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히로카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원해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죠?" - P76
"별수 없군요. 그러시다면 협력 병원을 알려 드리죠. 그쪽에도 모자보건법 지정 의사가 있으니까요." - P77
. 비용은 보험처리가 안 되는 탓에 15만 엔 정도가 든다는 듯했다. - P78
마지막으로 나카이는 종이 한 장을 슈헤이에게 건넸다. ‘인공 임신중절 동의서‘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에 부부께서 서명 날인하시고 수술 당일에 가져오시면 됩니다." 10슈헤이는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 제1호에 의거해 인공 임신 중절 수술에 동의합니다.‘ - P79
6
(전략). 오전 진료가 끝나기 무섭게 이소가이는 도다 마이코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중략). 도다 마이코와 남편이 벌써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며느리가 아픈데 왜 내가 가야 한단 말이죠?" "가족 여러분들의 지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 P81
이런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상 도다 마이코의 병은 절대 호전될 수 없다고 이소가이는 판단했다. - P82
"네, 최근 며칠 동안은 부엌일도 하고 있고, 상당히 호전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까? 가족 여러분의 도움도 있었겠군요." 이소가이는 미끼를 던져 봤다. 남편의 표정이 굳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냉랭한 걸까? 하지만 마이코의 표정을 살펴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P83
"선생님?" 남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략). "어머니 일로 좀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더없이 진지한 표정에 이소가이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요?" "요새 아내에게 전보다 더 가혹하게 굴고 계십니다." - P84
갑자기 이소가이의 머릿속에 연수생 시절 선배가 해 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자살을 결심한 환자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의사를 속이려 든다고……………. 겉으로는 상당히 답답해 보이던 마이코의 표정과 그와는 정반대로 명확했던 말투를 생각하며 이소가이는 전율을 느꼈다. - P85
병원에서 각종 자살 방지책을 세우더라도 죽을 마음이 있는 환자는 반드시 그 틈을 파고든다………… 이소가이는 입과 코에 휴지를 욱여넣어 질식사한 환자의 사례를 알고 있었다. - P86
도다 마이코의 마른 몸이 6층 높이에서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중략). 도다 마이코는 지상에 정차돼 있던 차 상판에 온몸을 부딪쳐 크게 튀어 올랐다가 땅 위로 떨어졌다. (중략). 쓰러진 마이코의 주위로 피 웅덩이가 붉게 번져 나갔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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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병실에는 모종의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는 듯했다. 가나미와 함께 개인실에 들어선 슈헤이는 그것이 여자 냄새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그것도 어렴풋한 냄새가 아니라 주위의 수컷을 모두 불러 모을 법한 동물적이고 야성적인 향기였다. - P88
너무 들떠 있었다고 슈헤이는 생각했다. 운 좋게 쓴 베스트셀러. 맨션 선금밖에 안 되는 여덟 자리 숫자를 보고 기고만장해진 끝에피임 기구를 깜빡했다. 그리고 아내를 임신시켜 버렸다. 이게 우습지 않다면 뭐란 말인가. 세상에서 중절 문제를 대대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건 이유가 터무니없이 멍청해서였다. - P90
나카이는 베테랑 의사답게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다소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아기를 지우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처치를 위해 분만대에 오르시자마자 아내 분께서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시더니 기절하셨습니다." - P91
마침 가나미가 눈을 떴다. 슈헤이는 깜짝 놀라 물었다. "가나미?" (중략). 슈헤이의 말허리를 자르고 가나미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가나미?" "아까도 그 방에 있었죠?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 P94
가나미는 고개를 저었다. 겁먹은 듯 의지하려는 듯한 눈길로 슈헤이를 올려다봤다. "수술은 연기하기로 했어. 검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슈헤이는 말을 마치고 가나미를 포옹했다. - P95
이튿날부터 가나미는 분교의과대학병원 통원 치료를 시작했다. (중략). 뇌에 기질적 이상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MRI검사, 약칭 EEG인 뇌파 검사, 근육 반사 운동을 보기 위한 검사 등이 이뤄졌고 어느 것 하나 이상 소견이 나오지 않았다. - P96
"그때 아내 분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말을 거셨다더군요" (중략). "마지막으로 딱 한 명, 저희 병원 의사를 소개해 드리죠. 그분께 진료를 받으세요." - P97
"이소가이 선생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산부인과 의사였다가 다른 과와 연계하는 리에종 정신 의학을 전공한 의사예요." - P97
슈헤이는 본심과 달리 아내를 타박했다. "지금은 가나미의 병을 치료하는 게 먼저야. 아기는 당분간 잊고지내자. 알겠지?" - P98
슈헤이는 책상 앞에 앉아 굳어 버린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앞으로 가나미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나미 역시 계약 사원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계속 휴가를 내다가는 계약을 해지당할지도 몰랐다. - P98
갑자기 방 안 전기가 전부 꺼졌다. 슈헤이는 깜짝 놀라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이내 두꺼비집이 꺼졌음을 알아챘다. (중략). "뭔가 이상해." "두꺼비집이 꺼졌어." "아냐, 방 안에 누군가가 있어." - P99
가냘픈 목소리가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가나미가 다시 말한 순간 바닥에 늘어뜨려진 긴 머리칼이 거꾸로서기 시작했다. - P100
슈헤이는 아내 위에 올라타 활처럼 구부러진 몸을 내리누르려 했다. 계속 헐떡이는 가나미의 호흡이 두 눈에 와 닿았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경련을 멈추려 들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 속의 아기를 짓눌러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P101
슈헤이는 다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가나미?" 눈앞에 선 여자가 웃음 지으며 말했다. "가나미가 아냐." 아내의 목소리가 아닌 그 낮은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슈헤이의 양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 P101
그걸 본 여자가 비웃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슈헤이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 P102
2장
빙의
1
메마른 타구음이 울려 퍼졌다. (중략). 가나미는 구급차가 도착한 순간 원래대로 돌아왔다. - P103
상대방이 배트를 내리고 이쪽을 돌아봤다. 정신과 의사의 생김새는 상상과 딴판이었다. 슈헤이와는 대조적으로 운동선수 같은 체격이었다. 근육질인 어깨 위에 산적 같은 얼굴이 얹혀 있었다. 저 너머에서 날아온 공이 홈 베이스 위를 지나 그대로 네트에 꽂혔다. (중략). "휴직 중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중략). "이러지 마시죠. 의사라면 저 말고도 얼마든 있지 않습니까?" (중략). 가나미를 진찰한 내과 의사는 이소가이야말로 적임자라고 단언했었다. 더이상 아내를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다. - P104
‘아내 분에 대해선 간단히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직 간대발작과 환각 증상이었죠?" (중략).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러고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죠." "전혀 다른 사람처럼요?" - P106
이소가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발 부근을 봐 주시겠습니까?" 슈헤이는 이소가이의 말에 따라 자신의 발 부근을 내려 봤다. 흰 콘크리트 위에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제 환자가 6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P108
이소가이는 땅바닥을 내려다본 채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내 분을 제가 진료하는 게 옳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나쓰키 씨가 결정하세요.‘ - P108
"아내를 봐 주세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이소가이는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과로 가서 아내 분의 진료 기록부를 가져오지요. 본관 1층 로비에서 기다려 주세요." - P109
외래 진찰 시간 짬에 얼굴을 들이밀고 "가나미 씨 진료 기록 좀." 이라고 말하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의욕이 좀 생긴 건가?" "개인적으로 진찰할 거야. 휴직은 계속 할 거고." 진료 기록을 들고 로비를 향하면서 정신과 교수에게 인사를 해둘까 생각했다. 도다 마이코의 자살 미수 사건 이후 병원 내에서는잇따라 자살을 시도하는 ‘집단 자살‘ 현상을 막기 위해 입원 환자에 대한 주의를 배로 기울이고 있었다. - P110
"나쓰키 씨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슈헤이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작년에 책을 냈는데 그게 좀 팔렸거든요." - P110
가나미의 단발성 발작은 인공 임신 중절 전 처치 단계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단서였다 - P111
슈헤이는 잠시 생각했다. "1분 정도 되려나요. 다만 저도 상당히 놀랐기 때문에 실제로는더 짧았을지도 모릅니다." "1~2초 정도가 아니었단 말씀이죠?" "아뇨. 적어도 10초 이상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카이 원장이 진단을 단정하지 못했던 이유를 납득했다. 기질성정신 장애로 강직 간대 발작을 일으켰더라면 초기의 비명 소리는 길어야 수초 내로 끝난다. - P112
"두꺼비집이 나갔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가나미를 안심시키려고 거실로 갔죠. 그러고 곧 발작이 시작됐습니다. 가나미가 ‘방 안에 누군가가 있어.‘라고 말하자마자 쓰러졌고 머리가 거꾸로 서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요? 머리카락 말씀인가요?" "네. 누군가가 잡아끌고 있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위를 향해 일어섰습니다." - P113
"그 3주 전에 있던 일말입니다만,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린 후 곧 아내 분께서 돌아오셨다고요?" "네, 맞아요." 가나미의 증상은 이미 그 단계에서부터 시작됐던 걸까? "그날이나 그 전 며칠 동안 아내 분께서 마음고생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까?" - P114
"저건 제 아내가 아니에요." 이소가이는 깜짝 놀라 슈헤이를 돌아봤다. 젊은 남편의 얼굴도 공포 탓인지 긴장해 있었다. "인격이 바뀐 상태예요. 게다가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을 겁니다." "제가 의사라는 사실도 말입니까?" "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어요." - P116
갑자기 도다 마이코의 모습이 떠오른 이소가이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 처음 만난 나쓰키 가나미가 그 일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 P117
환자가 무언가 트라우마를 경험한 뒤 일부러 병을 꾸며 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나미에게는 그런 거짓스러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 보인 가나미의 행동은 완전히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 P118
"아까 말씀하신 임신부 말입니다만, 이런 증상과 관련이 있다고생각하십니까?" (중략). "그 사람이 어느 사이인지 가나미 씨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단 말씀입니까?" "네." - P120
이소가이는 일단 상대방을 안심시킨 뒤 슈헤이에게 종이와 펜을 빌렸다. 최저한이긴 했지만 벌써 환자로부터 주요 증상을 들은 셈이었다. 한 시간여를 들여 현재 병력부터 가족력, 생활사 등을 귀기울여 들었다. - P121
(전략). 위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소가이는 해리성 장애의 심인(心因)이 생기기 쉬운 시기인 유년기의 가정 환경과 사춘기 이후 성적 발달에 대해 물었다. - P122
초경 나이를 묻자 가나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대답했다. "열두 살 때요." 하지만 당시 일부 여성들이 겪는다고 알려진 굴욕감이나 불안감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수 년 동안 생리 불순을 겪었지만 이소가이가 볼 때 10대 여자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정도로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 P123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협력하겠습니다. 조만간 또 방문해도 괜찮겠습니까?" 가나미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슈헤이가 끄덕이자 가나미는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치료 계약이 성사됐다는 점에 이소가이는 만족했다. - P125
"그래서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가나미의 상태는 어떤가요?" "증상은 파악한 것 같습니다. 빙의 현상이라는 보기 드문 병례 같군요."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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