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문제에서 나는 두 번째로 정답 버튼을눌렀다.
"타케다 아ㅡ"가 들린 순간이었다.
평소 퀴즈 대회라면 버튼을 누를 만한 시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음악 분야로 한정되어 있고 음악 분야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과 관련된 문제만 출제됐다.
"울려라! 유포니엄." - P177

Q. 타케다 아야노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교토부 우지시가 무대이며 취주악부 고등학생들이 전국대회를 목표로 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이 애니메이션은 무엇일까요?
A. 울려라! 유포니엄. - P178

"너 애니메이션도 잘 알아?"
가시마가 물었다.
"가끔 봤거든."
동거할 때 ‘울려라! 유포니엄‘ 애니메이션을 기리사키와 함께 봤다. 그래서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 P178

홀로 한동안 울고 나서 다시 퀴즈를 하고 싶다고생각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딩동댕" 울리는 소리는 퀴즈의 정답을 알리기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답을 맞힌 사람에게 ‘네가 옳다‘고 긍정해 주는 소리기도 했다.
기리사키와 만나지 않았다면, 기리사키와 동거하지 않았다면 ‘울려라! 유포니엄‘을 맞힐 수 없었다. - P179

다시 떠올렸다.
‘심야의 대단한 힘‘을.
‘안나 카레니나‘를.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OTPP‘를그리고 지금까지 정답을 맞힌 모든 퀴즈를퀴즈의 정답을 맞힌다는 것은 그 정답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해 왔다는 증거다. 우리는 퀴즈라는 경기를 통해 서로의 증거를 보여준다. - P180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퀴즈 문제를 맞닥뜨린다.
퀴즈 경기를 할 필요는 없다. 퀴즈는 세상 어디에나존재한다.
상처받고 고민에 빠진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까?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상사에게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그저 참기만 하고 지금 맡은 일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과감히 이직해야 할까?
평은 좋지만 비싼 냉장고와 평은 그럭저럭 평범하지만 저렴한 냉장고 중 무엇을 사야 좋을까? - P181

퀴즈 경기와 다른 점은 이 세상에 출제되는 문제에는 대부분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답을 말한다. 결단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었는지 모른 채 살아간다. - P181

세상에 존재하는 퀴즈 대부분은 정답이 없다. (중략).
 하지만 그녀와 보낸 시간 덕분에 몇 문제를 풀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발전할 수 있었다. 퀴즈 플레이어로서 나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매우 미숙하다. 많은 실수를 하며 살았다. - P182

화면 앞에서 나는 퀴즈를 풀 때 어떤 근거로 답을찾을까 생각했다. 결승전 영상을 보면서 나름대로추론한 내용을 정리했다.
퀴즈 문제집에서 푼 적 있다. 문제를 만든 적 있다. 다른 퀴즈 대회에 출제된 적 있다. 교과서에서 본적이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적 있다.
TV에서 본 적 있다. 실제로 가 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배운 적이 있다.
이 모든 근거의 공통점은 전부 자기 인생의 일부라는 점이다. - P103

"문제.....??
그 소리에 화면 앞에 있는 나는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분명 다음 문제는…………….
"학명은 스트릭스 우랄렌시스이며 ‘숲의 파수꾼‘이라는 이미지 때"
(중략).
이때의 나는 답을 몰랐지만 ‘숲의 파수꾼‘이라는말을 듣고 오랑우탄을 떠올렸다. ‘오랑우탄‘이라는 단어는 말레이어로 ‘숲의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서두에 그 이야기가 나왔을텐데 문제가 학명으로 시작해서 부자연스러웠다. - P184

"자, 정답은요?"
정답 제한 시간이 거의 지나가자 진행자가 재촉했다.
혼조 기즈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랑우탄?"
명백하게 자신 없어 보였다.
땡.
득점 상황은 여전히 5대4.
혼조 기즈나는 득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답기회도 아슬아슬해졌다. 답을 두 번 틀렸기 때문이다. 오답을 세 번 말하면 실격이다. - P185

Q. 학명은 스트릭스 우랄렌시스이며 ‘숲의 파수꾼‘
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지바역 앞 파출소³⁸의 모티브가된 동물은 무엇일까요?
A. 올빼미.


38 지바역 앞 광장이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인공 숲 같다고 하여 파출소 건물을 ‘숲의 파수꾼‘으로 사랑받는 올빼미 모양으로 설계했다. - P186

‘Q-1 그랑프리‘에 출연한 뒤로 이러한 DM이 갑자기 늘었다. 7백 명 정도였던 팔로워도 어느 순간만 명이 넘었다.
(중략). 프로그램 측과 무작정 대립하고 싶지 않았고 눈앞에서 우승을 빼앗긴 가여운 준우승자라는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더 이득일 것이라는 욕심도있었다.
의외였던 점은 그 태도를 흡족해하는 혼조 기즈나의 팬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일부가 내 계정을 팔로우했다. - P187

인터넷상에서 나는 어느새 ‘어려서부터 퀴즈를위해 살아왔고 그 때문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
이 되어 있었다. (중략).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를 말버릇처럼 달고 사는 사람. (중략). ‘Q-1 그랑프리‘ 결승전에서 혼조 기즈나라는 진정한 천재와 만났고 마지막문제에서는 전설의 ‘문제 안 듣고 정답 맞히기‘ 때문에 패배했다. 하지만 혼조 기즈나의 버튼 빨리 누르기에 감동해 그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전부 망상이다. - P188

나는 세상에는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꿈도 많다는 것을 아는 상식 있는 사람이다. - P183

TV에 잠깐 나온 내 모습만 보고 어떻게 그렇게단정 지을 수 있지?
화면으로 전해지는 정보만으로 내 무엇을 안다는말인가.
자신을 ‘미시마 레오의 팬‘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풀어놓은 망상을 보며 기분 나빠졌다. 잠깐 보고 알게 된 미미한 정보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다.
나는 아주 잠깐 TV에 출연했을 뿐인데 나와는 동떨어진 캐릭터가 형성되었다. - P189

그제야 비로소 이 문제가 지바역의 올빼미 파출소와 관련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묘한 퀴즈였다.
(중략). 참고로 이케부쿠로에도 올빼미 파출소가 있고 퀴즈 문제로 나온 적도 있다.
혼조 기즈나가 문제 도중에 버튼을 누른 탓에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문제는 지바시 출신인 사람에게 상당히 유리한 문제였다. 지바역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올빼미 파출소를 알것이다.
‘둘 다 같은 상황이었구나.‘
나는 깨달았다. - P190

혼조 기즈나가 한 글자도 듣지 않고 문제를 맞힌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문제는 특정 지역 출신자만 맞힐 수 있는 문제이다시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바시 출신인 나만 맞힐 수 있는 문제도 마련되어 있었다. - P191

가설을 세웠다.
사카타 야스히코는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준비한 것 아닐까. - P191

"‘Q-1 그랑프리‘ 결승전도 후반부를 달리고 있는데요. 그러면 다음 열세 번째 문제로 가보죠."
진행자가 신호를 보냈다.
"문제......"
(중략).
"이벤트一"
삐一.
혼조 기즈나가 버튼을 눌렀다. (중략). 나는 누를 생각조차 못 했지만 문제를 읽는 아나운서의 입 모양을 보고 감을 잡았다.
‘이벤트‘의 다음 글자는 아마도 일본어 50음도 중
‘코こ‘나 ‘호ほ‘일 것이다. - P193

틀려라.
틀려서 실격해라.
"사건의 지평선"
혼조 기즈나가 대답했다. 한껏 자신 있는 큰 목소리였다.
딩동댕. - P194

Q. ‘이벤트 호라이즌‘으로도 불립니다. 이것을 지나는 순간 원리적으로 무한한 시간이 지나야 관찰자에게도착한다고 하는데요, 정보 전달의 경계를 뜻하는 이것을 우리말로 무엇이라고 할까요?
A. 사건의 지평선 (또는 사상의 지평선, 슈바르츠실트 반경). - P195

나는 도미즈카 씨에게 받은 파일을 열었다. ‘Q의 모든 것‘에 나온 모든 문제를 정리한 목록이었다.
문제를 각각 살펴보기 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방송되지 않은 문제가 많았다. 걸러진 문제. 오답이었던 문제. 아마도 정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 문제. 정답은 나왔지만 멘트가 재미없던 문제.
‘Q의 모든 것‘의 총연출자였던 사카타 야스히코는 가차 없이 편집했다. - P196

‘Q의 모든 것‘은 어려운 문제와 기발한 문제가 많았다. 그만큼 초인적인 정답도 눈에 띄었지만 아무도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문제도 늘어났다. 사카타야스히코는 방송에 사용할 수 없는 장면이 쏟아질것에 대비해 문제를 많이 준비했을 터다. - P197

사카타 야스히코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퀴즈 프로그램 생방송에서 가장 피해야 할 사태는 어떠한 상황일까?
문제를 다 읽어도 아무도 정답을 맞히지 못한다.
그런 문제가 계속 나오면 거의 방송사고다.
‘Q의 모든 것‘에서는 그런 문제들이 편집됐다. 출연자에 따라 오답이라도 재미있는 오답은 편집되지않았다. 하지만 생방송에서는 편집이라는 기술을 쓸수 없다. 그러니 정답을 맞히지 못할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되고 되도록 오답 수도 줄여야 한다. - P198

물론 퀴즈란 필연적으로 참가자의 인생과 관련된경기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제작진은 생방송이라는 특수한 형식에서 ‘참가자의 인생‘이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서로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199

나는 심호흡하고 양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이제 혼조 기즈나에게 오답 기회는 없는데 버튼을 누르는 시점을 보면 도박을 하는 듯 느껴졌다. 그 도박이 나를 아주 조금 압박했다.
5대5.
오답을 세 번 말하면 실격인 상황에서 나는 한 번,
혼조 기즈나는 두 번.
다음 문제에서 도박을 시도할 권리가 있다. 팽팽한 상황에서 버튼을 눌러도 된다. - P200

"문제…"
문제를 읽는 아나운서의 얼굴을 응시했다. 입이열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코우테こうて-??
(중략). 나는 무아지경으로 버튼을 눌렀다. (중략)
삐ㅡ
‘누구지?‘
램프를 확인했다. 내 램프에 불이 켜졌다. (중략)
한발 늦게 뇌가 문제 소리를 받아들였다. ‘코우테こうて-‘에서 버튼을 눌렀지만 아나운서는 ‘코우테이토こうていと‘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코우테이こうてい‘와 ‘토と‘ 사이에 약간 공백이 있었다. - P201

마지막으로 내 눈과 귀로 얻은 정보를 문장에 덧붙였다. 아나운서의 입 모양을. 그 입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한숨을.
‘소そ‘다. 아나운서는 마지막에 ‘소そ‘라고 말하려고 했을 터다. 즉 내가 얻은 정보는 ‘코우테이, 토소こうてい、とそ‘다. - P202

"자, 정답은요?"
초조했다.
"심볼리 루돌프"
너무나 초조해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 P202

. 즉 이 퀴즈는 ‘교정‘도 ‘긍정‘도 ‘공정‘도아닌 ‘황제‘로 시작하는 문제다.
‘황제라고 불리는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심볼리 루돌프‘라고 답했다.
딩동댕.
정답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브이 포즈를 취했다.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40 ‘~로 불리다‘는 일본어로 ‘~と称される(~토쇼우사레루)‘다. - P203

Q. ‘황제‘라고 불리기도 하는, 일본경마사상 최초로7관왕을 달성한 경주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A. 심볼리 루돌프. - P204

내가 ‘심볼리 루돌프‘를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는지난해 경마 방송의 의뢰를 받아 경주마 퀴즈를 열문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심볼리 루돌프‘ 문제도 만들었다.
거기서 깨달았다.
이 문제도 역시 내 인생과 연관된 문제구나. - P205

혼조 기즈나의 경우는 어떤지 생각했다.
예컨대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는 노벨상 수상자를 모두 암기한 혼조 기즈나를 위한 문제다. ‘사이언스‘ 문제에서도 고등학생 때부터 읽었다고 대답했다. ‘노지마 단층‘은 ‘Q의 모든 것‘에 나온 문제였고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는 야마가타현에 거주한 적이 있는 그를 위한 문제였다. 내가 몰랐을 뿐 혼조기즈나와 관련된 문제도 비슷하게 출제된 것 아닌가. - P206

물론 그래도 마지막 문제를 한 글자도 듣지 않고버튼을 누른 이유는 아직 모른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답에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과거 혼조 기즈나는 ‘자-‘까지만 듣고 ‘끝이 좋으면 다 좋아‘를 맞힌 적 있다. 문제 자체보다 문제가나온 상황이나 문맥을 읽고 풀어낸 정답이었다. 그런 식으로 버튼을 빨리 누르는 데 뛰어난 사람이다.
마지막에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가 출제되리라는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07

내 몸 주위에 퀴즈가 맴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내 주위에 퀴즈가 맴돌고 있었다.
사카타 야스히코는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문제만 냈다. - P208

일곱 번째 재생했을 때 나는 사소한 사실을 눈치챘다.
마지막 문제에서 아나운서는 "문제......"라고 말한 뒤 숨을 들이마시며 문제를 말하려고 입을 다물었다. - P209

일본어를 발음할 때 입을 닫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글자는 ‘마 행⁴¹‘과 ‘바 행⁴²‘과 ‘파 행⁴³‘ 뿐이다.
혼조 기즈나는 문제를 한 글자도 듣지 않고 버튼을 눌렀지만, 사실 첫 번째 글자에 대한 정보가 약간 존재했다.

41 일본어 50음도 중 ‘마, 미, 무, 메, 모‘,
42 일본어 50음도 중 ‘바, 비, 부, 베, 보‘.
43 일본어 50음도 중 ‘파, 피, 푸, 페, 포‘. - P210

Q. ‘뷰티풀, 뷰티풀, 뷰티풀 라이프‘라는 노래로 친숙합니다. 일기예보 프로그램 ‘프티웨더‘ 광고에 나온적도 있고 독특한 로컬 CF로도 유명한, 야마가타현을중심으로 네 개 현에 점포를 운영하는 세탁 체인점은 무엇일까요?
A.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정답을 맞힌 사람은 혼조 기즈나였다. 편집되어방송되지 않았지만 제3회 ‘Q의 모든 것‘에 ‘Q-1 그랑프리‘ 결승 마지막 문제와 똑같은 문제가 나왔다.
이 내용을 도미즈카 씨에게 말할까 고민했다. - P211

혼조 기즈나의 트위터 계정에 접속했다.
몇 시간 전, 그는 한 달 만에 트위터 활동을 했다.
유튜브 채널 ‘퀴즈왕 기즈나 채널 개설과 월정회원제 온라인 살롱 ‘기즈나의 진심‘ 개시 소식이 공지되어 있었다.
혼조 기즈나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새 수입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 P212

(전략).
제가 혼조 씨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 무수한 선택지 중 어떻게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를 선택할 수 있었는가.
둘, 혼조 씨의 ‘문제 듣지 않고 정답 맞히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퀴즈 플레이어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Q-1 그랑프리‘ 준결승에 출연한 퀴즈 플레이어들은프로그램이 짬짜미였던 것 아니냐며 분노했습니다. 제나름대로 조사한 결과 짬짜미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찾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한 글자도 듣지 않고 정답을 맞혔는지 혼조씨께서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편하실 때 답장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완전히 녹초가 됐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인생을 다시 시작한 기분이었다. - P214

잠시 잠이 들었다.
메일이 도착한 소리에 깼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혼조 기즈나의 답장이었다. 오후 7시가 지난 시간, 에이후쿠초의 맨션에서 창밖을 확인하니 주변은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꼭 부탁합니다.
답장을 보냈다. - P216

"미시마 씨의 추측은 한 가지만 빼고 다 맞아요."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나서 고개를들더니 내게 말했다.
"한 가지요?"
"네. 출연자가 반드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내가 대결 중에 깨달았다고 미시마씨는 추측했죠. 하지만 실제로 나는 방송 전부터 예상했어요." - P217

"네. 그래서 출연자 전원을 분석했어요. 대결 상대가 어떤 분야에 강한지, 어떤 식으로 버튼을 누르는지, 최근 대회에서는 어떤 문제를 맞혔는지 그런점을 위주로 조사했죠. 출연자들이 아는 문제가 고르게 나온다면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위해 준비된 문제를 맞혀야 하니까요."
혼조 기즈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 P218

점원이 내온 흑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본론을꺼냈다. 혼조 기즈나는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미시마 씨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야마가타현에 살았다는 걸 아세요?"
"네. 유토 씨에게 들었습니다."
(중략).
"힘든 일을 겪으셨네요."
"곰의 장소라는 소설 아세요?"
"마이조 오타로 씨 작품 말입니까?" - P219

"확실히 야마가타로 돌아가 반창회에 참석했죠.
내 곰의 장소와 마주하려고 하지만 곰의 장소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내게 곰의 장소는 단순히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거든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학교폭력을 당해서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곰의 장소였어요." - P221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마지막 문제에서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라고 답할 수 있었군요?"
"네.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문제가 방송되지 않은 이유는 녹화 중에 제가 갑자기 울어서였어요. 사카타 씨는 당연히 그 일을 알고 있었죠. 그 문제를 계기로 제가 진심으로 퀴즈 공부를 하게 됐다는 것도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문제로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 사카타 씨라면 분명 그 문제를 내지 않을까 하고.
문제를 읽는 아나운서가 입을 다문 순간 저는 문제첫 글자가 ‘뷰‘라고 확신해 버튼을 눌렀어요." - P223

"이런 스토리는 어떤가요?"
혼조 기즈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중략).
"네?"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의 진상 말이에요.
방금 이야기 감동적이었어요?"
"네, 감동적이었는데…………. 무슨 말씀이시죠?"
혼조 기즈나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 P224

"완전히 거짓은 아니에요. 상당 부분 진실이 포함되어 있죠. 야마가타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일도 사실이고 3회 ‘Q의 모든 것‘을 녹화할 때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문제가 나온 것도 사실이에요. 그때 내가 정답을 맞힌 것도, 그 장면이 편집된 것도 사실이고요."
"혼조 씨가 정답을 맞히고서 울었다는 이야기는요?"
"그건 지어낸 이야기예요." - P225

"그렇습니까. 혹시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가 정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꽤 확신이 있어서 버튼을 눌렀어요. 사카타 씨는심술궂어서 ‘Q-1 그랑프리‘ 어느 시점에 반드시 ‘엄마. 클리닝 오노데라예요‘ 문제를 내리라 생각했거든요. 나를 괴롭히려고 말이죠. 그래서 정답을 맞힐수 있었어요. 물론 만약 틀려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승이 걸린 문제에서 한 글자도 듣지 않고 버튼을 누른다? 그 자체로도 나름 화제가 되리라 판단했죠."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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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앞서 걷던 초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 스승님은 나한테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서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 일곱 살까지는 쭉 보육원에서 지냈거든."
건방이는 말문이 막혔다. 어색함을 풀어 보려다가 도리어 분위기만 더 썰렁하게 만들어 버렸다. 건방이는 자신의 가벼운 혓바닥을 저주했다.
"아이고, 괜한 얘길 꺼냈구나‘ - P113

11. 금강산에 가다


오방도사와 건방이는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금강산에 가기로 한 날이다.
도시락이 든 괴나리봇짐을 떼면서 건방이가 물었다.
"진짜 돈 안 갖고 가도 돼요? 대체 거기까지 어떻게 가려고요?" - P114

"흐흐, 내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둔 것이니라"
"팔면 무지 비싸게 받을 수 있을 텐데."
(중략).
"약효가 여섯 시간뿐이니 어떻게든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느니라. 꼭꼭 씹어 먹고 나서 몸에 뜨거운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기러기‘를 세 번 외치거라." - P115

"자부만 폼 나는 걸로 변하고・・・・・ 나도 매가 좋은데!"
송골매가 된 오방도시는 꿀밤 대신 부리로 건방이의 머리를콕 쏘았다.
"이놈아! 다 너를 위해 그런 거야! 장거리 비행엔 기러기 같은철새가 제일 편해"
"그럼 사부는요?"
송골매로 변한 오방도사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나 같은 고수한텐 품위 유지란 게 필요한 법이야 잔말 말고어서 따라와!" - P116

오방도사와 건방이는 유유히 휴전선을 넘어 북한 상공으로 들어섰다. - P117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오는 건데."
건방이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죽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엄살 그만 부리고 밥이나 먹자"
오방도사는 한 삼십 분 가볍게 조깅한 사람처럼 쌩쌩해 보였다. 건방이는 녹초가 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도시락을 풀었다.
처음에는 별로 생각이 없던 건방이도 일단 밥이 입 안으로 들어가자 입맛이 돌았다. - P117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밥을 다 먹고 나서야 금강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4월의 금강산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중이었다. 봄꽃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기이한 바위며 흰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까지. - P117

"봉우리를 잘못 선택한 거 아녜요?"
건방이가 슬슬 오방도사를 탓했다.
"이 이놈아! 너도 일만이천 개 봉우리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고 생각해 봐라! 그게 쉬운가!"
오방도사는 민망한 마음에 되레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봉우리를 잘못 선택했다고 느끼는 건 오방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 P118

"우리보다 먼저 신통풀을 캐 간 놈이 있구나"
"여긴 사람 출입이 통제된 곳이잖아요."
"사람이 아니야"
오방도사는 주변의 풀을 뒤적여 푹 파인 발자국 하나를찾아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아마…………… 곰 비슷한....." - P119

오방도사는 주변에 둘러보았다. 마침 근처에 사람 머리통만한 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방도사는 그 돌을 주워서 곰을향해 휙 던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곰이 돌을 앞발로 탁, 잡아 버린 것이다. 오방도사와 건방이는 입이 떡 벌어졌다. 흑곰은 가소롭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돌을 두 앞발로 짓이겼다. - P120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안 따라오는 건데!"
흑곰은 절대 곰 같지 않은 속도로 둘을 따라왔다. 신통풀을먹고 자란 곰이라 그런지 반쯤은 영물(靈物, 신령스러운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정신없이 뛰던 건방이는 앞서 가던 오방도사가보이지 않자 소리를 질렀다.
"사부! 어디 갔어요!"
잠시 후, 건방이의 발밑이 훅 꺼졌다. - P121

 주위를 살펴보니 먼저 도착한 오방도사가 낙엽을 털털 떨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골짜기였다. 나무가 우거진계곡 사이로 푸른빛이 도는 맑은 물이 졸졸 흘러가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골짜기 안은 물안개로 자욱했다.
산세와 지형을 살피던 오방도사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몇 백 년간 사람 발길이 전혀 안 닿은 곳인 것 같구나"
건방이는 계곡물부터 조금 떠 마셨다. 계곡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달아서 정신이 번쩍 났다. - P122

오방도사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자야! 회춘풀이다, 회춘! 아무리 못 돼도 이백 년은 묵은 회춘풀이야!"
간신히 오방도사의 품에서 빠져나온 건방이는 일단 함께 기뻐하며 외쳤다. - P123

"돌아올 회(回)‘, ‘봄 춘(春) 이게 바로 젊어지는 신통풀이란 말이다! 이 정도면 이십 년은 젊어지겠구나. 이걸 사려고 갑부 무술인들이 억만금을 싸 짊어지고 올 거다. 우린 한마디로...."
건방이의 얼굴도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대박난 거네요!" - P124

12. 납치


(전략).
"회춘풀을 캤다면서?"
건방이는 화들짝 놀라 초아에게 목소리를 죽이라는 시늉을했다.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초아는 청개구리처럼 목소리를 더 높이며 아예 건방이 옆의자에 앉았다. - P125

"그냥 대단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대단한 거야. 회춘풀은 단순히 겉모습을 젊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몸을 과거의 상태로 돌리는 신통풀이거든. 이를테면 되돌린 시간 이후에 얻은 병이나 상처 같은 것도 다 사라지는 거지. 점박이 아저씨 말로는 최근오백 년 동안 회춘풀이 세상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아저씨가 살 사람을 물색하고 있다니까 곧 연락이 올 거야. 아마 엄청난 가격으로 팔릴걸?"
건방이는 약간 빼기듯이 말했다. - P126

사실 건방이의 꿈은 따로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우는 일. 그게 바로 건방이의 오랜 꿈이다. 그래서 돈이 없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죽음만 기다리는 노인들을 공짜로 치료해 주고 싶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뜨는 사람이 없도록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얘기하자니 너무 멋쩍어서 엉뚱한 너스레만 떨고 말았다. - P127

건방이와 초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면상이가 눈앞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28

점심시간이 끝나가는지 애들이 교실로 하나둘 들어왔다. 초아가 면상이의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건방이에게 속삭였다.
"야, 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뭐가?"
"나도 몰라. 콕 찍어 말은 못 하겠는데, 그냥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
건방이는 초아의 말을 들으면서 곁눈질로 면상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 P128

요즘 오방도사와 설화당주는 핑크빛 열애 중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건방이와 초아가 닭살이 돋아 괴로울 정도로,
"근데 둘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초아랑 나는 대체 무슨 관계가 되는 거야?‘
건방이는 복잡한 생각을 떨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회춘풀은 대체 어디다 둔 거예요? 잘 있는 거죠?" - P130

"떡! 그걸 갖다 준다고 해도 꽃님 소저가 냉큼 받겠느냐? 꽃님 소저라면 혼자만 젊어지는 건 싫다면서 그냥 사이좋게 늙어가자고 하고도 남지!"
당황해하는 오방도사를 보고 건방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갖다 주긴 했단 말이군. 설화당주님이 거절한 거고 그럼 그렇지, 어쨌든 다행이다‘ - P131

건방이가 거실로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누군가 창문에서 휙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눈만 뚫린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작은 걸로 봐서 건방이 또래인 것 같았다.
"거기서!"
건방이는 서둘러 복면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복면은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 자취를 감추었다.  - P132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둑맞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책상 위에 놓아 둔 지갑도 그대로였다.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다가 그냥 도망간 것 같았다. - P132

양말에 도꼬마리 열매가 하나 붙어 있었다. 건방이는 도꼬마리 열매를 떼어 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영락없이 작은 고슴도치 모양이었다. - P133

‘진짜 도꼬마리가 왔다 간 걸까? 아님 면상이가?‘
건방이는 슬쩍 뒤를 돌아 면상이 자리를 바라봤다. 면상이는 벌써 자리를 뜬 뒤였다. (중략).
"설마... 아니겠지. 그나저나 그 도둑놈을 대체 어떻게 잡지?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 P134

호길이가 계단 아래쪽을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소리를 죽여 말했다.
"너 좀 싸우는 거 알아. 지난번에도 나한테 일부러 맞아 준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면상이한테는 알아서 기는 게 나을 거다. 니가 주먹을 얼마나 쓰는지는 몰라도 그놈은 달라. 갠・・・・・ 진짜 무서워."
호길이의 표정에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면상이랑......." - P135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건방이가 하도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 P136

하지만 옆에서 어깨너머로 편지를 훔쳐본 호길이는 엉뚱한 대목에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이럴 수가...... 너……… 초아랑 사귀는 거야?" - P137

13. 봉화대 결전


‘역시・・・・・・ 면상이가 도꼬마리인 게 틀림없어!‘ - P138

웃음기가 전혀 없는 면상이의 얼굴이 딴 사람처럼 낯설어 보였다.
"일단 초아부터 풀어 줘. 니가 잘 모르나 본데, 재네 사부가얼마나 무서운......
면상이 건방이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말했다.
"알아. 그 악명 높은 설화당주지. 하지만 지금 여기 달려올 정신은 없을걸? 네 사랑 꽃구경하며 희희낙락 놀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건방이는 흠칫 놀랐다. - P139

"오방도사 제자랍시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대던데, 죽기싫으면 당장 회춘풀부터 내놔"
건방이는 이상한 걸 느꼈다. ‘오방도사 제자랍시고‘ 하는 말투에서 뭔가에 비비 꼬인 듯한 심사가 느껴진 것이다.
‘사부랑 아는 사이인가? 눈치를 보아하니 무슨 원수라도 되는 것 같은 분위긴데……………‘ - P140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건방이는 손을 타고 지잉, 올라오는 통증에 당황했다. 수석술을 썼는데도 손이 아픈 건 처음이었다. 건방이는 정신이 번쩍 났다.
‘젠장. 녀석도 수석술을 쓰는구나! 게다가 나보다 한 수 위야.‘
쉴 틈 없는 공격과 방어가 더 이어졌다. 면상이의 공격은 점점 날카로워지는 반면, 건방이의 방어는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언뜻 보면 비등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차이는 확연했다.
‘이대로 가면 지겠어‘ - P141

"면상인지 낯짝인지, 이젠 나랑 한번 붙어 볼까? 아깐 기습으로 어이없이 당했지만 이번엔 쉽지 않을걸?"
초아가 연검을 휘두르며 매섭게 공격했다. 잠깐 당황했던 면상이가 곧 냉정을 되찾고는 착착, 연검을 막아 냈다.
"계집애라고 봐줬더니 안 되겠구나. 너부터 없애 주지."
다음 순간, 면상이는 초아의 연검을 맨손으로 잡아 팔뚝에 둘둘 감아 버렸다. - P144

면상이가 손을 감싸 쥐며 한발 물러섰다. 건방이는 놀라서 자신의 손을 만져 보았다. 싸늘하게 날이 선 느낌이 났다.
"수검술......."
면상이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오방도사가 그런 것도 가르쳐 준 모양이지? 흥, 하나뿐인 후계자라 이건가?"
"아니, 도대체 뭔 소리야?" - P145

건방이가 수검술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챈 면상이가 비열하게 웃었다. - P145

살기등등한 면상이의 얼굴이 마치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건방이는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오방구결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인 흙의 가운, 즉나 자신을 믿는 신(信)‘의 마음가짐이다.

건방이는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얍!‘
그러자 놀랍게도 손에 싸늘한 칼의 기운이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 P146

14. 정체가 탄로나다!


"초아야 거기까지만 하거라"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초아가 공격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갈참나무 그늘 아래에서 설화당주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뒤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오방도사도 보였다. - P147

면상이가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발목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오방도사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가만히 면상이를 내려다보았다. 면상이는 뼈가 부러졌는데도 여전히 독기어린 목소리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흥! 그러지 말고 아예 날 죽이지 그래? 어서 죽이라고!"
면상이가 이를 꽉 깨물고 일어섰다. 한쪽 발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는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방도시는 말없이 면상이 앞으로 걸어갔다. - P148

잠시 후, 면상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으헝엉엉엉.
깊은 한이 맺힌 것처럼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건방이는 일그러진 면상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샌가 면상이의 얼굴이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맞아 초아가 전학 온 날!‘
언뜻 면상이의 얼굴 위로 겹쳐지던 그 노인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 P149

이십 년 전, 변면술 때문에 파문당한 제자오방도사는 도꼬마리의 흐느낌이 잦아질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두루마리 고름을 풀고는 바지 속으로 손을 쑥집어넣었다.
(중략).
오방도사는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바지 속에서 손을 한참 꼬무락대더니 뭔가를 꺼내 들었다. 회춘풀이었다. - P150

"사부, 미쳤어요? 저걸 주면 어떡해요!"
건방이가 펄쩍 뛰며 달려가려는데 설화당주가 건방이에게말을 건넸다.
"오라버니에게 들었을 때도 설마했는데, 진짜로 수검술을 쓰더구나" - P151

"수검술은 검으로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경지에 오른 고수만 썼다는 전설의 기술이란다. 놀랍구나. 정통 수검술과는 좀달라 보이긴 하다만, 가벼이 여길 재주는 아니다. 네가 지닌 재능은 권법이 아니라 검법 쪽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시간 날때마다 나에게 와서 검법을 배워 보려무나."
건방이는 설화당주의 칭찬에 왠지 쑥스러워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술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난생 처음 들은 터라 기분이 들떴다. - P152

"흥! 그나저나 웃기는 일 아니니? 알고 보면 네가 한술 더 뜨는데 말이야. 곤경에 빠진 애들한테 돈 받고 대신 싸워 주는 거,
너희 스승님도 아셔? 말이 좋아 머니맨이지, 겁줘서 돈을 뺏는거랑 뭐가 다르단...………."
(중략).
오방도사의 눈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 P153

"호길아,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서로를 위해 지켜줘야만 하는 비밀도 있고."
초아가 검지를 펴서 입에 갖다 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그..... 그럼, 이, 이해하지. 걱정 마. 아, 아무한테도 마 말 안할게"
초야가 싱긋 웃자 호길이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 되었다. - P154

15. 돌아온 머니맨, 그리고......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고등학생 서너 명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머니맨인가 뭔가가 여기를 떴다는 거, 확실한 정보지?"
"짜식, 쫄았냐? 걱정 마셔 다시 활동을 개시한 애들 말이요즘 그놈 코빼기도 못 봤다."
"아오, 그놈 때문에 몇 달간 찌그러져 있던 걸 생각하면………" - P156

"넌 어째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엉아들 피곤하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니들은 어째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엉아 피곤하게."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하고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푹 눌러쓴야구 모자 위로 ‘M‘ 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머니맨!" - P158

머니맨이 손을 들어 핫도그의 말을 끊었다.
"됐어. 앞으로는 안 받아 우리 사부가 곤경에 처한 사람한텐돈받지 말래"
핫도그는 멍하니 머니맨을 바라보다가 먹다 만 핫도그를 불쑥 내밀었다. - P159

머니맨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 사부가 곤경에 처한 사람한테는 돈 받지 말라고 했어도, 곤경에 처하게 한 사람한테 돈 받지 말라고는 안 했거든. 앞으로는 너희가 비용을 지불해 줘야겠어."
머니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불량 청소년들 앞에서 요금을 좔좔 읊었다.
"고딩을 상대로 했을 경우 80,000원, 중딩은 90,000원, 초딩은 100,000원. 오늘은 초딩 한 명이니까 100,000원에 7시가 지났으니까 야간 할증료 10,000원 추가 합이 110,000원이야" - P160

머니맨의 형이랍시고 나타난 아이는 머니맨보다 더 작아서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될까 말까 해 보였다. 아이 역시 야구 모자를꾹 눌러쓰고 있었다. 하지만 야구 모자에는 M‘ 자가 아닌 고슴도치 문양 비슷한 것이 새겨 있었다.
"아우야,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라"
새로 등장한 아이에게서는 음습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 P161

한편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래, 저놈들이 오방도사의 제자들이란 말이지? ㅎㅎㅎ"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낮게 읊조렸다.
(중략).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달이 사내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족제비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아이는 바로 오지랖, 아니 오지만이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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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두 사람을 잠자코 바라보던 게이스케가 씩 웃었다. (중략).
"그건 회사 창립 50주년 기념품입니다. 선대 사장이자 저와 유코의 할아버지인 사이다이지 도시로가 사이다이지 출판 주식회사를세운 지 5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아버지가 이 전망실에 브론즈 북을 장식했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뭔가 후세까지 형태가 남아 있을 기념품을 가지고 싶으셨던 거겠죠. 뭐, 수백 년을 버티는 종이책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종이책은 보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니까요."
"확실히 청동이 풍화에는 강하겠죠." 다카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삼 유리 케이스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 P171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쓰루오카 가즈야가 묘한 소리를 했죠. 자기가 그 비밀을 까발리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고요. 그 말투로 추측건대 쓰루오카는 뭔가 중대한 비밀을 쥐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가 쥐고 있던 비밀은 대체 뭘까. 두 분은 뭔가 짚이는 점이 없으십
"니까?"
"어.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유코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쓰루오카가 그 발언을 했을 때, 유코는 이미 식당을 떠난 뒤라 쓰루오카의 발언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 P172

"(전략).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탐정님. 정말로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면 20년 넘게 비밀을 가슴속에 가만히 품고만 살았을까요?"
"그렇군요. 확실히 잠자코 있지 않았겠죠. 좀 더 빨리 찾아와서 돈을 뜯어내든 어쨌든 무슨 행동에 나섰을 겁니다.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네,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게이스케가 말했다.
"맞아요,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유코도 맞장구를 쳤다. - P173

사야카는 전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생각 한 가지를 꺼내 놓았다.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에 쳐들어와 돈을 갈취하는 짓은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는 다른 형태로 큰돈을 얻었어요.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이라는 형태로요."
(중략).
사야카는 단어를 골라가며 말을 이었다. "어, 그러니까 쓰루오카는 실제로 무슨 비밀을 쥐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사이다이지 고로 씨가 그에게 유산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 P173

 뜻밖에도 다카오가 사야카의 가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하지만 난 납득이 안 돼. 가령 당신말대로 고로 씨가 입막음 조로 쓰루오카에게 유산을 남겼다고 치자. 그럴 경우, 쓰루오카는 고로 씨의 부고를 듣자마자 제 발로 사이다이지 가문에 얼굴을 내밀 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신변을 감추듯 조용히 살고 있어서, 마사에 씨가 그를 찾아내기 위해 실력 좋은 탐정을 고용해야 했을 정도였지."
실력 좋은 탐정?! 아니, 뭐, 됐다. - P174

"그럼 제 상상이 틀린 걸까요? 쓰루오카가 비밀을 쥐고 있던 것과 고로 씨가 쓰루오카에게 유산을 남긴 건 전혀 무관한 일일까요?"
"글쎄, 무관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쓰루오카는 고로 씨가 유산을 물려주리라는 걸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쓰루오카의 태도를 보면 짐작이 가지. 결코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의 비밀을 꼬투리 삼아, 유산을 남겨 달라고 고로 씨를 협박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고로 씨가 유언장에 쓰루오카의 이름을 올린 건 순수한 고인의 의사라고 봐야겠지. 반대로 쓰루오카에게는 예상치 못하게 호박이넝쿨째로 굴러떨어진 셈이고." - P175

"탐정님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남의 집 비밀을 파헤치려는 건데요?"
"엇?! 무슨 권한이라니...... 권한?!" 그런 단어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다카오는 고개를 꼬며 말했다. "그, 그야, 그러니까 그거죠.
그, 뭐더라. 어...... 아버지가 오카야마 현경의 수사1과장이라는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유코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 P176

(전략). 한편 탐정은 방금까지 오갔던 대화를 듣고 문득 현실을 인식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확실히 유코 씨 말씀이 옳습니다. 제게 이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한 사람은 없죠. 즉, 진실을 밝혀 본들 땡전 한푼안나오는 거야!"
결국 돈 문제구나! 속으로 핀잔을 준 사야카는 그의 가치관을 일부 엿본 기분이었다. - P178

3

(전략).
다카오는 1인용 의자에 떡하니 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아무렇게나쭉 뻗은, 예의 바르지 못한 자세로 "아이고, 어쩐지 피곤하네"라고 한숨을 섞어 약한 소리를 내뱉었다.
"피곤하기는 뭐가 피곤해요. 아직 사건의 수수께끼는 하나도 해명되지 않았다고요."
사야카도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카오는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말했다. - P178

사야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 탐정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 수신음이 울렸다.
(중략).
다카오는 또 무슨 생각인지, 청소 도구함으로 들어가서 문을 탁닫았다. 청소도구함이 일시적으로 전화부스가 된 셈이다. 어지간히도 통화 내용을 남에게 들려주기 싫었나 보다.
"뭐, 뭐예요. 진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훔쳐 들을 리………………"
사야카는 큰소리를 지르며 망설임 없이 청소 도구함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중략). 두 사람의 통화가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네....... 네...... 압니다....... 네, 물론・・・・・・ 네, 저 고바야카와다카오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건의 수수께끼는 반드시 제가……………. 네...... 어,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앗, 어머니?! 그건 그렇고 방금 어떤 만화의 아주 유명한 대사(*『소년탐정 김전일』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를 뜻한다)를 대놓고 표절하지 않았나?!‘
여러모로 놀라서 사야카는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문 안쪽에서 말이 뚝 끊겼다. - P181

그러자 다카오가 맹렬한 기세로 말을 쏟아냈다.
"소장님이야, 소장님. ‘고바야카와 탐정 사무소‘의 위대한 소장님!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소장님이 사건을 해결하고 와라. 경찰에 지지 마라 하고 내게 지시했어. 그러니 사건을 해결하는 수밖에. 탐정 사무소의 위신을 걸고! 일찍이 명탐정이라 불렸던 소장님의 이름을 걸고!" - P182

4

(전략).
"사건을 조사하려는 거죠? 어디로 가는 건데요?"
사야카의 질문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탐정은 복도를 나아가며 대답했다. "유코 씨와 게이스케 씨에게는 일단 이야기를 들었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첫째인 에이코 씨 차례겠지. 에이코 씨 방에 갈 거니까 당신도 가자. 나 혼자 가면 경계할 우려가 있으니까."
"확실히 그렇긴 해요. 탐정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살인범일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요." - P183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사야카는 새삼 소박한 질문을 꺼냈다. "저기, 고바야카와씨. 이 계단 묘하지 않아요? 1층의 내 방에서 1층에 있는 식당으로곧장 갈 수가 없다니까요. 이 계단으로 일단 2층에 올라가서 복도한복판에 있는 나선계단을 내려가야 1층 식당에 다다르는 구조에요. 대체 왜?"
"나한테 물어본들 알겠나. 나도 이 저택에 온 후로 내내 신기했어.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이유도 없이 이런 구조로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기묘하다. - P184

"에이코 씨, 혼자 계셨어요? 집안의 가장은 어디에?"
실제로는 에이코가 주인마님이고, 아쓰히코가 머슴 같은 이미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렇게 물어보았다. 에이코는 정면의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남편은 미사키 방에 있어요. 딸아이가 걱정되는 거겠죠."
"무리도 아니죠. 쓰루오카 씨를 죽인 범인은 아직 섬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섬이 아니라 이 저택에 있을지도모르니까." - P185

"어머, 탐정님. 혹시 제 알리바이라도 조사하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알리바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애당초 알리바이를 조사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쓰루오카의 시신을 살펴본다카자와 선생님은 막연하게 범행이 어젯밤에 일어났다는 의견을제시했을 뿐, 사망추정시각을 자세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법의학 쪽은 전문이 아니겠죠. (후략)." - P186

다카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이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늦은 시각? 아니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침대에 누워서 푹 잠들었을 시간이니까요. 남편은 함께 있었지만 코를 골며 잠들었으니 분명 저보다 더 숙면을 취했겠죠. 가령 이게 알리바이 조사라면 우리 부부는 둘 다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겠네요. 호호호." - P186

사야카는 질문을 망설이는 다카오를 곁눈질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저기, 어제 늦은 밤에 중정에서 뭔가 못 보셨나요?"
"흠, 중정에서 뭔가라니요? 중정에 뭔가 있었나요?"
"어,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두막이랄까, 정자랄까......."
"정자?!" 에이코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라면 중정이 아니라 뒤뜰에 있잖아요? 거기서 가즈야 오빠의 시신이 발견됐고요. 그게 왜 중정에 있어요?" - P187

 에이코는 고개를 설레설레흔들더니, 사야카에게 딱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중정에 정자라니, 그런 게 있을 리없잖아요."
"그, 그렇죠......." 사야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에이코에게 불만을 툴툴 늘어놓았다. ‘애당초 당신 딸이 그걸 봤대서 물어보는 거잖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꿈일 거야! 당연하잖아!" - P188

그런데 그 직후에 갑자기 중대한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다카오가
"아아, 그렇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하고 대뜸 물었다.
"저기, 에이코 씨. ‘그때‘는 언제입니까?"
그 순간 에이코는 분명 움찔했다. 하지만 바로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제가 언제 그런 말을?"
"그게, 에이코 씨가 하신 말씀은 아니고요. 마사에 씨가 에이코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고용인 고이케 기요시 씨가 이번 살인사건을 사고로 위장하면 어떻겠느냐고 근사한 제안을 했을 때요.
에이코 씨가 ‘어때요, 마사에 고모? 하고 의견을 묻자 마사에 씨는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기요시의 생각에는 동참할 수 없어. 그때와는 달라‘라고요. 저한테는 마사에 씨의 대답이 약간 이상하게 들렸는데, 에이코 씨는 아무래도 수긍하신 눈치였습니다."
"그,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 P189

이 일을 중대한 문제로 삼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가 에이코의 태도에서 엿보였다.
그래도 다카오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흠, 마사에 씨의 머릿속에 딱 떠오른 ‘그때요? 아, 혹시 그 ‘비밀‘에 관련된 일 아닙니까?"
"비밀?! 아아,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가즈야 오빠가 떠벌렸던 그거요?"
"그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떠벌렸던 그거요." - P190

더 이상 깊이 추궁해 봤자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다카오는 "에이코 씨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태도를 싹 바꾸어 이해심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커피를 조용히 들이마셨다. - P190

 5장

 23년 전의 사건

1

(전략). 사야카는 불만에 찬 표정으로 옆에 있는 탐정을 쳐다보았다.
"고바야카와 씨.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네요. 왜죠? 에이코 씨는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거예요. 척 보기에도 심하게 동요했다고요."
"맞아. 하지만 너무 자극해도 역효과가 나겠지. 그들이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면 앞으로 일을 풀어 나가기가 힘들어. (후략)." - P191

사야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앞서서 올라가던 탐정이 말했다.
"오히려 사이다이지 가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가망이 있을지도 모르지." - P192

당구대 옆에는 남자 두 명이 큐대를 들고 서 있었다. 다카자와 나오토와 도라쿠 스님이었다. 다카자와는 흰색 와이셔츠에 감색 바지스님은 베이지라기보다 차라리 ‘낙타색‘이라고 하고 싶은 구성진 색상의 전통 작업복 차림이었다. 순수한 일본풍 복장으로 큐대를 들고 당구대 옆에 서 있는 모습은 실로 초현실적이라고 할까, 허무개그 같다고 할까, 아니면 경건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 P192

곧바로 게임룸에 이완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탐정은 공을 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당구 규칙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대체 어디서 큐대를 다루는 기술만 배운 걸까. 사야카는 고개를 갸웃거리지않을 수 없었다.
다카오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큐대를 스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뭐, 규칙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당구를 치려고 여기 온 건아니니까요. 그렇지, 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 P194

(전략). 하지만 다카오는 그런 스님에게 등을 휙 돌려 다카자와와 마주 보았다.
"실은 어젯밤 일을 여쭤보고 싶어서요. 만찬 때 쓰루오카와 유코씨가 말다툼을 벌였고, 유코 씨가 식당을 떠났죠. 그 직후에 선생님도 유코 씨를 뒤쫓듯 식당을 나가셨고요. 그때 두 분이 어떤 말씀을나누셨는지 아무래도 궁금하더라고요.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아아. 그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요. 식당을 나선유코 씨를 따라잡아, 그대로 어둠 속에서 유코 씨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헤헷."
"저기요, 스님, 입 좀 다물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 P195

다카자와는 화난 듯 은테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분명 그때 유코 씨를 쫓아갔습니다. 모욕을 받고 슬퍼하는유코 씨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거든요. 저는 2층으로 향하는 나선계단에서 유코 씨를 따라잡았습니다. 따라잡기는 했지만 뭐라고 할말을 못 찾겠더군요. 게다가 원래 유코 씨는 그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에요. 속내는 어떻든 겉으로는 굳세게 행동했습니다. 제가 괜찮냐고 물어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죄송해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하고 대답했어요. 그뿐입니다. 유코 씨는 제게 인사한 후몸을 돌려 계단을 총총히 뛰어 올라갔습니다." - P195

(전략). 사야카는 궤도에서 이탈한 화제를 되돌리기 위해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그 후에 어떻게 하셨어요?"
"더는 유코 씨를 쫓아갈 수가 없겠더군요. 떠나가는 유코 씨의 뒷모습이 혼자 놔두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마 유코 씨는그대로 자기 방으로 갔겠죠. 전망실에 갔을지도 모르고요."
"그럼 선생님은 어디로? 식당에는 안 돌아오셨잖아요."
"네. 그 상황에서 혼자 터덜터덜 식당으로 돌아가도 멋쩍기만 할테니까요. 하는 수 없이 저택을 나서서 정원을 산책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거든요. 기분 내키는 대로 잠시 중정과 건물 주변을 돌아다녔습니다." - P196

"저어, 좀 엉뚱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때 중정에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없었나요? 어, 그러니까예를 들면 ‘낯선 오두막‘이 있었다든가."
너무 직설적이지 않느냐는 듯이 탐정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직설적이라서 상대의 의혹을 사지 않은 것도 같았다. (중략).
다카자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니요, 중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 - P197

이번에는 다카오가 물었다. "그럼 뒤뜰에는 가셨습니까? 정자가있는 뒤뜰요."
"네 갔습니다. 어슬렁어슬렁 걷다 보니 자연스레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죠."
말을 마치자마자 다카자와의 단정한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확번졌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겠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앗, 착각은 하지 마세요. 탐정님. 그때 저는 혼자였습니다. 정자도 그냥 지나쳤을 뿐이에요. 누구하고도 안 만났습니다." - P197

"하지만 동기는 있죠. 분명 기회도요. 선생님, 어젯밤 늦은 시각에 알리바이도 없지 않나요?"
탐정은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다카자와는 더욱 감정이격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야 누구든지 늦은 밤에는 혼자 방에 있을 테니까요. 누구에게나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동기도 저한테만 있는 건 아닐 테죠. 다른 사람들에게도 뭔가 동기가 있지 않을까요?" - P198

"그렇습니다. 즉, 쓰루오카는 그 비밀을 지키고 싶은 사람 손에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선생님, 쓰루오카가 언급한 ‘비밀‘
에 관해 뭔가 짚이는 점은 없으십니까?"
탐정이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다카자와는단정한 얼굴에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도라쿠 스님이 소외된 설움을 풀풀 풍기며 말했다. - P199

다카자와는 닫힌 문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자물쇠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안에서 잠기자 게임룸은 이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이 되었다.
고요해진 밀실에서 탐정이 다카자와를 다그쳤다.
"비밀 이야기라고요?! 그럼 선생님은 역시 뭔가 비밀을 아시는거로군요" - P202

그러자 다카자와는 게임룸에 있으면서 어딘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 먼 옛일을 이야기하듯 더듬더듬하는 말투로 사야카와 다카오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대는 23년 전의 비탈섬이고요. 사이다이지 출판의 초대 사장님인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를 찾아온 갑작스러운 죽음에 얽힌 일이죠." - P203

2

(전략).
그 말에 다카자와 나오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밀하게 말하면 조금 다릅니다. 1995년 당시에 이 별장은 아직 ‘화강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거든요. 다들 그냥 ‘비탈섬의 별장‘이라고불렀던 것 같습니다. 형태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고요. 지금은 コ 모양의 건물에 공처럼 둥근 전망실이 얹혀 있는 특이한 형태지만, 당시는 별 특징 없늨 2층짜리 직육면체 건물이었어요." - P203

"총 열두 명입니까. 이번 사십구재 법사 참석자와 꽤 많이 겹치는군요." 다카오는 젊은 의사에게 얼굴을 쑥 들이밀고 말했다. "만약을 위해 물어보는 건데, 방해만 되는 스님은 없었습니까? 도라쿠스님 또는 그의 선대 스님은 참석하지 않은 거죠?" - P204

"오, 아직 열세 살이라. 선생님은 그 무렵부터 사이다이지 가문사람들과 어울리셨던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은 제가 소년 시절 그 가문분들과 제대로 만났던 건 23년 전 봄방학 때 딱 한 번뿐이에요. 사이다이지 가문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아버지가 주치의로서 드나들었을 뿐저는 친척도 뭐도 아니니까요. 아버지는 사이다이지 가문분들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저는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장래에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었을 때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저를 사이다이지 가문에 소개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래서 아직 중학생인 저를 굳이 비탈섬에 데려갔을 거예요. 나이상으로도 게이스케 씨와 또래니까요." - P205

"네. 한적하고 평온한 시간이 사흘쯤 이어졌습니다. 다들 그렇듯 평화로운 시간이 휴가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그런데 그런 평온한 나날이 단번에 돌변했어요.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네요. 섬에 건너간 지 나흘째가 되는 날 밤이었죠." - P206

사야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카오도 잠자코 다카자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스름한 방에는 베갯머리의 전기스탠드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정면에 한층 호화로운 침대가 보이더군요. 두툼한 이불은 몹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이불 끄트머리로 잠옷 차림의 남자가 보였죠.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진 듯한, 아주 부자연스러운 자세였습니다. 두 다리만 침대 위에 걸친 상태로, 상체는 바닥에 누워 있었죠.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풍성한 백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드디어 알아차렸습니다. 그 남자가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라는 사실을요. (후략)." - P208

. 한편 다카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23년 전, 당시 사이다이지 가문의 가장이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고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만. 사실이라면 당연히 지역 뉴스에서 크게 다루었을 텐데요."
하지만 다카자와는 "사실입니다" 하고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오는 더 이상 자세하게 캐묻지 않고 이야기를 재촉했다. - P209

"범인을 쫓아갔다고요?!"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다카오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쫓아간대도, 어떻게요? 그것보다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요?"
"아니요, 범인이 누구인지는 물론 모릅니다. 하지만 봤어요. 보였습니다."
"보였다니요?" - P209

"이야, 아주 용감하시군요." 다카오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나왔다.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것 아닌가요?!" 사야카는 기가 막혀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생님, 그때 중학생이었잖아요."
"네. 장래에 의사가 되어서 탐정의 조수로 들어갈까, 아니면 탐정이 되어서 의사를 조수로 삼을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중학생 남자아이였죠."
잘생긴 의사는 뜻밖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이건 이것대로 충격적이었다. - P210

"선생님, 수상한 사람을 쫓아 숲속으로 들어가신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추적에 성공했나요?"
"물론 쫓아가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탈섬은사이다이지 가문의 별장을 제외하면 불빛 하나 없는 외딴 섬이니까요. 다만 그날 밤은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주변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어요. 덧붙여 앞에서 도망가는 범인은 의외로 얼빠진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범인은 손에 조명 기구를 들고 있었습니다. 손전등이나 펜 라이트 같은 조명 기구를요. (후략)." - P211

"딱히 겁먹은 건 아닙니다. 머리를 좀 썼을 뿐이죠. 균열이 생긴부분에 놓인 다리는 하나뿐. 그리고 다리 건너에는 아무것도 없습
"니다."
"아무것도 없다니요?! 진공이라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카자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도망칠 곳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비탈섬은 이름대로 섬 남쪽에서 북쪽이 오르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가장자리에서 오르막이 끝나죠. 거기서부터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거의 수직으로 바다와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단애절벽이죠." - P213

"기껏해야 15분이나 20분 정도였을 겁니다. 아버지와 고로 씨는이대로 다리 앞에서 가만히 기다릴지, 누군가 범인을 찾으러 다리를 건너갈지를 의논했습니다. 물론 누군가 다리를 건너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리 앞에서 감시할 필요가 있었죠. 그렇다고 해도 중학생 혼자 남아서 감시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두 분이 상의하고 있을 때, 숲속에서 지원군이 한 명 더 나타났습니다. 쓰루오카 가즈야였어요. (후략)." - P214

"고로 씨와 쓰루오카는 30분쯤 후에 저희가 있는 통나무 다리로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쓰루오카가 다리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고로 씨도 바위 뒤편이나 나무 덤불을 빈틈없이 살펴봤지만 쥐새끼 한 마리 못 봤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두 사람은 제게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말로 범인이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봤느냐고요. 저는 물론 똑똑히 봤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죠. 그렇다면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학생의 머리로도 간단히 이해가 가더군요." - P215

"다리를 건넌 범인은 섬 북쪽 벼랑, 통칭 ‘도깨비 뒤집기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 정황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죠. 즉,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를 살해한 범인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끝에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겁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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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종류

티저 포스터 본 포스터가 공개되기 전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기 위해 만든 포스터

메인 포스터 영화의 본 포스터

캐릭터 포스터 영화 속 주연 캐릭터를 부각시켜 만든 포스터

아트 포스터 포스터를 만든 디자이너와 작가의 개성이드러나는 스페셜 포스터

모션 포스터 영상 혹은 모션그래픽을 활용한 움직임이 있는 포스터

리뷰 포스터 영화를 본 언론가, 평론가, 관객의 리뷰를 담은 포스터

재개봉 포스터 이미 개봉했던 영화를 재개봉할 때 다시 디자인한 포스터 - P8

영화 용어


상업 영화 대규모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를 뜻한다.

다양성 영화 영화의 작품성, 예술성이 뛰어난 소규모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배급이나 상영도 소규모로 진행되며, 장르에 제한이 없어 다양한 소재나 현상을 자유롭게 다루는 실험적인 시도가 이뤄진다. 다만,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과정을 거쳐 영화의 성격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상업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가 국내에서 다양성 영화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기준에 대한 모호함은 여전하다.

스크리너 영화가 공식적으로 개봉하기 전 비평가, 심사위원, 관계자,
유통업자들에게 먼저 제공하는 영상 파일을 뜻한다.

워터마크 불법복제를 막기 위해 저작권 정보를 디지털 이미지, 비디오파일에 삽입하는 비트 패턴을 뜻한다.

키아트 영화의 마케팅을 위해 사용하는 이미지, 포스터, 영상, 인터넷광고, 옥외 광고 등에 쓰인다.

직배영화 해외 영화 제작사가 국내 배급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배급하는 영화. 전 세계 동시상영하는 영화가 해당된다.

Palm Dog Award 칸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Palme d‘Or의패러디로, 칸국제영화제 상영작에 출연한 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개에게 수여하는 시상식이다.

시네콘 일본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뜻한다.

버디무비 두 명의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칭한다.

와이드 릴리즈 배급 방식의 일종으로 개봉 전 비용을 들여 영화를 홍보한 후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 P9

프로파간다의
공기

프로파간다최지웅, 박동우, 이동형



좋아하니까,
영화를 좋아하니까
계속합니다


어떤 영화의 공기가 현실의 공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당장감독의 이름과 영화의 제목을 말하지 못해도 한 번쯤은 있었다고대답할 수 있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반면 영화의 공기가 짙어 현실을 잠시 잊는 경우도 있다. 다른 지점이지만, 두 가지 모두내가 생각하는 잘 만든 영화의 조건에 포함된다. 공기는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다. 오직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다. - P43

최지웅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박동우 실장과 함께 상업 영화와 큰규모의 영화 포스터 작업을 많이 하는 곳에서 일했어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어떻게 될까 걱정도 많았지만,
디자이너들은 자기만의 스튜디오를 갖고 싶은 꿈을 꾸잖아요.
평소 다양성 영화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요. 우리만의스튜디오를 만들고, 우리만 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프로파간다를 만들었죠. - P44

 단둘이 스튜디오를 운영할 때는 힘든 일이 이만저만아니었다. 한 명이 휴가를 가면 남은 한 명은 살인적인 작업량과 일정을견뎌야 했다. 그래도 휴가는 꼭 챙겼다. 최지웅은 웃으며 이야기한다.  - P44

독립 초반에는일이 많지 않아 작업하고 싶은 영화나 공연이 있으면 먼저 연락을 하기도했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의뢰를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일 테지만, 누구나 첫 시작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 P44

국내 영화 포스터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디자이너의 역할이 방대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영화사에서 제공하는 사진을 받아 디자인한다는 인식은 많이 풀어졌지만, 세세한 면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 P45

최지웅

촬영마다 함께할 스태프를 꾸릴 때 가장 중요한 건, 각자 그동안 해왔던 작업물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는 거예요. 해당 영화의 콘셉트에 맞는 분을 찾아서 하는 편이고요.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들어가죠. 평소 잡지나 책을 보다가 사진이 좋아서,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이 좋아서 연락하는 경우도 많아요. - P46

세 사람의 역할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부산행> 연상호, 2016 처럼 큰 규모의 상업 영화는 세 사람 모두 투입되어 시안을 잡는다. 상업 영화는 한 편당 적게는 10개 이상, 많게는 20~30개의 시안을 만든다. - P46

박동우 캘리그래피가 저는 잘 안되더라고요. (웃음)

이동형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최지웅 주로 제가 쓰는데….

이동형 그러니까 다 같이 써 놓고 펼쳐서 보면 주눅 들어요.
특히 최지웅 실장님 캘리그래피를 보면요. 제가 쓴 것은아마추어의 글씨처럼 느껴지고요. 소소하게 조금씩 연습하고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웃음) - P48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사전적 의미는
‘선전宣傳‘이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 지식을 대중에게 알린다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로 풀이되는 공산주의 사상의 선전이 아닌 긍정적인 의미로서의선전이다. 그러니까 특정 영화를 알리기 위한, 포스터를 이용해 관객을 유혹하겠다는 의미의 선전이다. - P48

박동우 최근에는 다양성 영화를 수입하는 수입사에서도 국내 버전으로 포스터를 다시 만들기를 원하는 추세에요. 경쟁이죠.
예전에는 메인 포스터 한 장만 노출 시켰다면 요즘에는 티저,
캐릭터, 스페셜, 아트 포스터까지. 소규모라고 해도 일이 점점 많아져요.


최지웅 다양성 영화는 상업 영화보다 노출 빈도가 낮잖아요. SNS를동한 홍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죠. 그래서 영화와 관련된굿즈도 만들기 시작한 거고요.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누가 누가예쁘게 만드나. - P49

어쩌면 관객은 메인 포스터의 상업적인 이미지에서 목말랐던 부분을 아트포스터에서 충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의 상업성과 예술성을 떠나 그 자체는 극장에서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것을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안에서 좀 더 색다르고,
좀 더 예술적인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다.  - P50

박동우 일본에는 영화 굿즈만 모아 놓은 책, 로고만 모아 놓은 책,
전단지만 모아 놓은 책 등 아카이빙이 참 잘 되어 있어요.
국내에서는 출판된 형태로 보기 힘들었죠. 출판물로 나온자료는 없지만, 원래 전단지라든가, 관련된 것들을 모으는 분들이 꽤 많이 있어요. SNS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암암리에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고, 지금도활발하죠. 영화 전단지만 전문으로 인쇄하는 인쇄소가 몇곳 있는데 그곳에 매일 오시는 분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전단지만 수집하러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 P53

대중이 좋아하는 것, 관람객을 혹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의 프로파간다도 있지만, 쉽게 치유될 수없는 동시대의 아픔을 담은 다큐멘터리 세 편의 포스터를 작업하기도 했다. - P54

최지웅 재밌죠. 저희가 맡은 세 편 모두 블랙리스트에 있었어요.
한 편을 하고 나니까 비슷한 장르의 작품 의뢰가 많이들어오더라고요. 2017년 개봉한 <노무현입니다> 이창재, 2017라든가, <미스 프레지던트> 김재환, 2017 라는 작품도 했고요. - P54

시네필Cinephile, 프랑스어로 영화광을 의미한다. 특정 장르의 영화를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최지웅은 시네필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새벽에 몰래 극장에 가 포스터를 뜯어오기도 했고, 각종 전단지는 지금도 열심히 모으고 있다. 영화가 그의 삶이다. - P56

이동형 영화의 내용이 주는 아픔이나 슬픔에 빠져서 작업하기보다 제작사나 감독님이 원하는 바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많아요. 현실의 아픔을 얘기하는 영화일수록 이성적으로생각하고,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잘 주목받도록노력합니다. 작업을 할 땐 영화 자체에 굉장히 충실해지는 거죠.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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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에는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애당초 여기에는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 고이케 부부와 다카자와 선생님은, 뭐, 협력해 준다고 치더라도, 예를 들면 아주 입이 가벼워 보이는 스님이 있지. 과연 스님의 입을 막아 놓을 수 있을까?"
"그건 무리지요." 도라쿠 스님은 바로 인정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 입은 가볍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렇게 중대한사건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는 힘들겠지요." - P151

 "그리고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 탐정도 있어. 저 사람은 우리 거짓말에 기꺼이 협력해 주겠지. 다만 그 대가로 대체 얼마를 요구할지 몰라. 분명 죽을 때까지 뜯어먹으려고 할 거야."
"그런 짓 안 합니다! 마사에 씨, 탐정이라는 직업에 편견이 있군요!"
다카오는 뿔난 표정으로 항의했다. - P151

"잘됐네요, 고바야카와씨. 당신이라는 존재가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가.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탐정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거실에서 열린 파란만장한 회의는 겨우 마무리된 듯했다. 마사에가 모두의 의견을 정리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할게. 괜찮지?"
안 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 P152

고바야카와 다카오가 경찰에 신고한 후? 무거운 분위기가 거실을 장악했다.
(중략).
하지만 아까 다카오가 중얼거린 말이 사야카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태풍이 접근 중인 외딴 섬에 과연 경찰은 어떻게 출동할까.
한 가지가 더 생각났다. 어제 벤텐마루호로 섬에 왔을 때 상고머리선장이 한마디 하지 않았던가. 비탈섬 부근 바다에는 숨겨진 암초가 많아서 물결이 잔잔할 때도 안심은 금물이다. - P153

 "잠깐, 유코. 어디 가는 거야?"
"어디냐니, 내 방이지." 유코는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래도 상관없잖아, 오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바로 나와서 맞이하면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아니, 문제 있어." 게이스케도 소파에서 일어나서 동생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혼자 있으면 위험해. 아까 못 들었어? 외부에서 침입한 살인범이 섬을 어슬렁거릴 가능성이 있다고." - P154

고용인 부부 중 남편인 고이케 기요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코 앞에 나섰다.
"저어, 만에 하나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저희는 가나에 님곁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가나에 님 혼자 계시는 게어쩐지 걱정돼서…………."
"알았어요. 가 봐요." 에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충분히 조심하도록 해요." - P155

그때 사야카 옆에서 느닷없이 ‘릴릴릴리‘ 하고 전자음이 울려퍼졌다. 깜짝 놀라 시선을 주자 분홍색 집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중략).
"아, 여보세요. 사이다이지 씨 댁입니까?"
(중략).
"아, 네. 댁이랄까, 사이다이지 가문의 별장인데요……... 어, 누구세요?"
"아참, 소개가 늦었네요." 전화 저편에서 이마를 찰싹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는 오카야마 현경 수사과의 과장으로 있는 소마 다카유키라고 합니다." - P156

그러자 전화 저편의 남자는 "아니요 아니요. 저야말로요" 하고 송구스러워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그쪽에 신세를 지고 있을 텐데요."
"앗, 아드님이요?!" 사야카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곳에 형사의 아들이 있었나.  - P158

"거기서 기다려야겠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경찰은 당분간 그섬에 갈 수가 없으니까. 적어도 이번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불가능해. 하기야 하나가 지나가도 다음 태풍이 접근하는 중이지만, 후후."
"후후? 에이씨, 지금이 웃을 때야?"
"안 웃었어. 방금 그건 낙담의 한숨이야. 후우."
수사1과장은 수화기에 대고 일부러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게 됐으니 뒷일 잘 부탁한다. 저택 사람들이 의심에 사로잡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데, 목소리가 귀여운 아가씨에게 혹해서 추근거리면 안 돼." - P159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침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화기를 든 그의 주변에는 사야카는 물론이고 사이다이지 가문의 관계자들이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들 아버지와아들의 희한한 통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수사1과장의 더럽게 큰 목소리는 전부그들의 귀에 들어갔다. - P160

4장

고립된 저택에서


(전략).
"확실히 지독한 악천후네요. 이래서는 경찰이 못 올 만도 한가......."
돔 모양의 전망실. 사야카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창문으로 거칠어진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옆에서 창문을 바라보던 사이다이지 마사에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어. 하필 이럴 때 경찰에 의지하지 못할 줄이야……………" - P161

다카오는 눈꼬리를 추켜올리며 양복 가슴께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에게 말 못 할 가정사 같은거 없어. 난 태어났을 때부터 소마 다카오였다고."
"이야, 그쪽이 본명이로군요." 사야카는 뜻밖이라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소마 다카오 씨가 굳이 고바야카와라는 성씨를 쓰는 이유는 뭔가요? 목소리가 큰 아버지와 잘 안 맞아서?" - P162

"(전략). 뭐, 일종의 예명 같은 거지. 아니면 탐정명이라고 해야 하려나."
‘명탐정‘이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탐정명‘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그야 어쨌든 그가 말하는 바는 사야카도 이해가 갔다. 분명 진실일 것이다. - P163

"아니, 그건 나도 몰라. 애당초 범인이 쓰루오카를 살해한 동기도 모르는걸. 아참, 그와 관련해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난 개봉하는 자리에 입회하지 못해서 유언장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쓰루오카의 몫이 꽤 짭짤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가.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쓰루오카는 기분이 아주 좋았으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 - P164

 마사에는 진심으로 낙담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듯 사야카를 물고 늘어졌다. "난 가즈야 군의 이모야. 그래도 안 되나?"
"네, 안 돼요. 쓰루오카 가즈야가 유언장에 ‘유산을 이모 사이다이지 마사에에게 물려준다‘라고 적었으면 별개지만요. 설마하니 그런 문서는 없죠?"
"뭐, 없겠지." 마사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아아, 아쉬워라!" - P165

"그래. 그럼 분명 과장해서 말한 거겠지. 가즈야 군은 중대한 비밀을 쥘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 정도는 탐정님도 알텐데?"
"흠, 확실히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에서 중요한 존재였다고 볼 수는 없겠죠. ‘화장‘에도 23년 만에 방문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어쩐지 묘해요. 대체 어떤 비밀을 가리키며 그런 소리를 한 걸까요."
그 점은 사야카도 마음에 걸렸다. 다카오 말대로 유산 상속이 쓰루오카를 살해한 동기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그가 입 밖에 낸 ‘비밀‘이라는 말이 부각된다. - P166

2

(전략).
"이야, 두분도 여기 계셨군요. 탐정님, 바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탐정은 남쪽 창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별문제 없습니다. 평소보다파도가 좀 높고, 너울이 심하게 일고, 시야가 안좋을 뿐입니다."
바로 그게 큰 문제잖아! 사야카는 무심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다카오는 개의치 않고 슬쩍 질문을 던졌다. "두 분도 바다 상태가궁금해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는 유코가 대답했다. - P168

다카오가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가가미 마사유키의 『감옥섬』을 추천합니다."
그 작품들은 분명 걸작이지만, 지금 비탈섬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추천 못 해. - P168

어제도 사야카와 다카오 사이에서 잠시 화제가 된 유리 케이스다. 안에는 책 모양 오브제가 들어 있다.
다카오가 물었다.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책입니다." 게이스케가 성실하게 답변했다.
사야카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영어 교과서 첫 페이지가 생각나서 묘한 감개에 젖었다.
이렇게까지 수준 낮은 대화를 지켜볼 기회는 평생 한 번 있을까말까 할 것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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