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몇 년 전,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쓸 때의 일이다. 그 소설은 안진이라는 도시의 어떤 소문난 유치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그곳에 입학시키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때문에 나는 당연하게도 주인공을 꽤나 고생시켰다. - P9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언젠가부터 나는 같은 질문을 받곤했다. "혹시 안진은 당신의 고향인 전주를 모델로 한 곳인가요?" 나의 대답도 늘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이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전주를 떠났다. 하지만 그때까지 계속 그곳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전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 직후 삼 년은 익산, 정확히 말하면 개칭 이전의 지명인 이리에서 살았고, 이후 웅포에서 일 년을 지낸 뒤 다시 이리로 갔다가 순창에서 반년간 살았다. - P10
바로 안진. 안진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 내가 잘알고 있는 장소이다. 내가 아는 모든 장소의 이런저런 면모를 합치고 가공하여 새롭게 만들어낸 곳. 그러니까 안진은 내가 살아온 모든 곳이자 완벽하게 상상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니꼴라 유치원은 달랐다.
그곳은 실재했다. - P11
전라북도 이리시 창현동 성당 옆에는 부설 유치원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을 모두 그 유치원에 보냈다. 천주교인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니꼴라 유치원에서 묘사했듯 그 유치원이 이리에서 꽤 유명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래의 남동생이 다닐 무렵에는 덜했던 모양이지만, 내가 입학할 때는정말로 경쟁이 치열했다. - P15
내게 창현동의 그 유치원이 정말로 좋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평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빨리 집에 가서 혼자 만화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부류의 아이였기 때문에, 매일 모두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하는 그 생활이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 P16
내가 소설에서 써먹은 것, 그러니까 강렬한 영감을 받은 것은 그유치원의 교육적 목표나 성과가 아니었다.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입학 경쟁이 치열했고 내 부모님 역시 거기에 뛰어들었다는 일화였다. 뭔가 좀 웃기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 P16
물론 이런 일은 흔하다. 사실,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매우 감정적인 상태다. 엄청난 소재를 발견했다는 착각에 흥분해 있다. 하지만 감정과 소재가 뭉쳐진 덩어리를 자르고 다듬는 과정에서 내가 진짜 다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주하게 된다. 질문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쓰려 했던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 그에 답하며 더듬더듬 걸어나가다보면 어떤 실루엣이 조금씩 보인다. - P17
왜냐하면 나는 이 소설을 쓰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집힌 창작 의도, 스타일,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써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그냥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그래. 단 한 줄도.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다. 나는 컴퓨터 앞에 정지된 상태로아주 오래도록 앉아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슬럼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첫 책도 출간하지않은 신인 작가였다! - P18
‘니꼴라유치원‘. 아,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곳. 사람들이 몰려들고, 욕심을 부리고! 경쟁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내 아이, 오직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기억한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고통스러운 소음이 귓속에서 길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나는 상像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제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과 적막만이 있었다. - P19
여섯 살 무렵, 아주 어렸던 그 시절, 나는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은 나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나를 짓밟고 싶어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얼마나 방심했던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멀어졌다고! 나는 감히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잊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 하자마자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 다시 달려든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악의 - P20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유치원 건물 지하에는 음악실이 있었다.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온도가 낮은 곳이었다. 둥근 돔 형태의 천장 때문인지, 노래를 부르면 소리가 커다랗게둥둥 울렸다. 그럴 때면 건물이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짐승의 뱃속에 들어온 듯했다. 꿈틀거리며 음산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붉은 벽돌, 그 소름 끼치는 한기와 불안하고 은밀한 선율은 매력적이면서도 공포스러웠다. - P21
그래서 기억이 구분되지 않는 것일까.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나의 착각과 핑계란 말인가. 나는 오래 고민했으나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할 이야기도 내가 분명히 겪은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 P22
2
창현동 유치원 입학에 실패했던 바로 그해의 일이다. 1991년이었고, 나는 여섯 살이었다. 엄마는 나를 집에서 가까운 유치원에 보냈다. 미미유치원? 나나유치원?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그 유치원에 보내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창현동 유치원이 아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유치원 옆의 허름한 적산가옥에 어떤 ‘사기꾼‘이 살고 있기때문이었다. - P23
이모는 이리 출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세 살에 인천에서 이리로 이사왔다. 그러니까, 이모가 이리에 살았던 시간은 실제로는겨우 이 년 남짓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지만,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형제는 없었다. 오직 어머니와 새아버지, 그리고 이모뿐이었다. - P24
보애 이모는 박지훈 앞에서 늘 주눅이 들었다. 뭔가를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에 시달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싹싹하게 굴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남들을 대접했다. 덕분에 보애 이모는 어디서든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한일이었다. 보애 이모가 가장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정작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 P25
음. 아니다. 알았다 해도 아마 박지운은 감행했을 것이다. 서슴없이 이삿짐을 쌌을 것이다. 박지운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새 남편과 딸아이에게 이사를 통보했고, 그들 가족은 인천을 떠나 아주 멀리 떨어진 전라도의 소도시로 왔다. 박지운은 의기양양하게 하숙집을 차렸다. - P25
"여기 사람들은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 안 되겠어. 다시 인천으로 가자." 당시 보애 이모의 새아버지는 속된 말로 막노동꾼이었고, 아주 건강하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를 많이 이해했다. 그런 남자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별말 없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아버지는 보애 이모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췌장암으로 세상을떠났다. 급성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날까지 그는 친구들과 씩씩하게 술을 마셨다. 너무 건강했기 때문일까. - P27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때문에 엄마와 보애 이모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박지운은 놀라울 정도로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보애이모의 많은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사람에게 서로가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 P27
이모가 인천으로 돌아간 뒤,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연락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고교 시절에는이 주에 한 번으로 줄었지만, 엄마가 취업을 하고 이모가 대학에 간 후에도 편지는 이어졌다. 종종 전화통화도 했다. - P28
엄마의 우정은 보애 이모가 다 가져갔다. 그러니 두 사람은 다시만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다는 건 계속 기억한다는 것이니까. 두 사람은 쉰두 살이 되던 해 다시 만났다. 엄마가 결혼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으니 거의 이십오년 만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꽤나 드라마틱했다. - P29
소설가로 막 데뷔했던 그해 여름, 엄마와 보애 이모의 식사 자리에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봤다. 그리고 보애 이모도 처음 만났다. 우리는 람청루는 유명 중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었다. 사실, 람청루에 간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와 옛 친구의 만남에 내가 뭐하러 낀단 말인가. - P31
아무튼 그날, 나는 이청화를 봤다. 아니, 본 정도가 아니었다. 그날 그 시간에 코스 요리를 먹은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던 건지, 아니면 손이 부족했던 건지, 또 그게 아니면 우리가 마음에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리가 나올 때마다 이청화가 우리 자리로 직접 서빙을 해줬다. 심지어 음식에 대해 일일이 설명까지 해줬다! 세상에, 나는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에 조금 넋이 나갔다. 반면 엄마와 이모는 이청화에게 관심이 없었다. - P32
그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 그러니까 진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그에게 급한 일, ‘상사의 부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우리 셋만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이 밥을 먹고우롱차를 마시며 옛이야기를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듣던 대로 보애 이모는 다정했고, 농담을 잘했다. - P33
그날, 람청루 음식값은 엄마가 냈다. 보애 이모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곳은 인천이었고, 때문에 엄마가 밥을 산다는 건 이모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 람청루를 예약한 사람도 이모였고, 코스 요리를 먹자고 한 사람도 이모였다. 그러나 이모는 엄마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엄마가 이모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한 번쯤은 네 고향에서 대접하고 싶었어." 그러자 이모의 표정이 변했다. 기쁨과 슬픔으로 복잡하게 일그러진, 말 그대로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얼굴로. - P34
보애 이모의 친아버지는 청인이었기에 한국 국민으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1958년, 보애 이모는 외국인으로 태어났다. 이모의 고향은 중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인천 토박이였다. 엄마가 말한 ‘네 고향‘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 P35
(전략).
그즈음 이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좌익 활동을 하던 시동생에게 생활비를 받았다는 이유로 전주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어느 할머니가 자신을 고종 황제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출소 후 이리에 살고 있었다. 이름은 이문용. 전주 이씨 문중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단 증거가없었다. 출생 기록도 없고, 고종 황제 역시 생전에 그러한 딸의 존재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른 황실 사료들을 아무리 뒤져도 그녀와 어머니 엄상궁의 흔적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 P36
학교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곧장 산둥성이 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이리 사람들은 외곽의 판자촌을 그렇게 불렀다. 산등성이 마을. 좌석에 앉아 가파른 고개를 오르며 엄마는 흥분했다. 옹주, 황녀, 황족. 그 단어들은 마법과도 같았다. 옹주를 만나러간다니! 인정받지 못한 황족을 만난다니! - P37
. 엄마는 아주 막연히 그녀가 아름다울 것이라 기대했다. 아, 잉그리드버그먼, 그녀는 엄마에게 너무 큰 환상을 심어주었다. 옹주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체구가 작고 등이 조금 굽었으며, 하얀 한복을입고 있었다. 머리는 쪽을 쪄서 비녀를 꽂았는데, 숱은 그리 많지않았다.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얼굴이 조금 넙데데했다. 가냘프지도 어여쁘지도 않은 그 노인이 너무 낯설어, 엄마는 문 앞까지 나온 그녀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고 쭈뺏거렸다. - P38
혹시 선생님의 편지에 우리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건 아닐까. 그래, 나와 보애만 콕 집어서 심부름을 시켰잖아. 어쩌면 오로지 우리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하려는 것일지도 몰라. 그때 옹주가 무뚝뚝한 말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뭐 좀 먹고 가거라." 이모가 반갑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와, 정말 그래도 돼요?" 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살짝 풀어져 있었다. - P39
옹주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당연히 처음이었다. 엄마는 무척 놀랐다. 옹주의 바느질 솜씨가 아주 훌륭했던 것이다. 엄마는 가느다란 바놀이 옷감에 촘촘하고 야무지게 박힐 때마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세상의 무언가가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랬다. - P40
이모는 심부름을 시켰던 담임 선생님에 대해서는기억했지만, 그날 두 사람이 산등성이 마을까지 심부름을 갔던 일은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아 맞아, 그랬지. 그날 눈이 많이 오지않았어? 그랬던 것 같다! 하면서 옛일을 아주 잠시 더듬어볼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리에 한 명더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사기꾼-. - P42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그 ‘사기꾼‘을 미워했던 이유는, 아마 그녀가 엄마의 소중한 추억, 그 겨울날의 풍경을 파괴하는 사람이기때문이었던 것 같다. 만일 ‘사기꾼‘이 진짜 문용 옹주라면 그간 엄마가 믿어왔던 것이 무의미해질 테니까. 세 사람이 한방에 조용히앉아 있던 시간. 그 다정함. 믿음. 누군가가 잘되기를 바랐던 진심 어린 날의 추억. 그 모든 것이 말이다. - P43
3
다음해 나는 창현동 유치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사고가 났다. 방학식 날이었다. 유치원 현관은 대부분의 관공서 건물처럼탁 트인 넓은 형태였는데, 그날 나는 현관 한쪽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다. - P50
다급히 웅크린 덕분인지 나는 다치지 않았다. 팔다리와 배, 가슴에 유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손등을 조금 긁힌 것 빼고는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정말로 마음을 졸인 순간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아빠가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조심스레 안아올리자, 내가 말했던 것이다. "아빠, 소리가 안 들려 - P52
청력은 이틀 만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귓속에 유릿조각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는데도 내가 계속 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으니까. 엄마는 많이울었다. 그리고 내가 적막 속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과 달리 이틀의 시간이 그저 조용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시끄러웠다. 세상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 P53
나이를 먹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듣는 일은 줄어들었다. 사고는 몇 번 더 있었다. (중략). 하지마누내 안에 뭔가 남아 있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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