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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작가,
마리아 아녜시 생가를 찾다

◆◆ 굳이 가시겠대서 말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아녜시의 저택은 400년째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밀라노의 북동쪽 언덕 꼭대기에서 ‘빌라 아녜시Villa Agnesi‘라는 이름의별장으로 운영되고 있었지요. 지도를 확인한 갈로아 작가는 "매우 멀군요. 하지만 할게 없으니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P91

◆◆ 아녜시가 교과서용 미적분학 책을 쓴 이유


마리아 아네시가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성직자였던 가정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 P93

 일주일에 두 번은 공공병원을 방문해 만성 질환에 걸린 여성들을 도왔습니다. 그중 갈 곳 없는 환자를 집으로 자꾸 데려오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숙식을 제공할 환자의 수를 제한당하기도 했지요.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한 미적분학Instituzioni analitiche ad uso dellagioventit italiana』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이 같은 삶의 지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아 아녜시는 수학을 청년들이 배워야 할 필수 과목이라고 여겼습니다. - P94

마리아 아녜시는 해석학을 가르칠 선생님이 거의 없는 데다 관련자료도 이런 저런 책에 흩어져 있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만 보면 미적분학 완성!‘이라고 할 만한 교과서를 썼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당시 미적분학을 둘러싼 논쟁을 살피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P94

1748년 책이 출판되자 곳곳에서 찬사가 나왔습니다. 영국은 물론이고 라이프니츠 지지자가 많은 프랑스에도 번역본이 출판됐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 학계 곳곳에서 책에 대한 칭찬이 자자해지자교황 베네딕트 14세 또한 책의 우수성을 높이 사며 축하 편지를 마리아 아녜시에 보냈습니다. 1750년에는 마리아 아녜시를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임명하겠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교황의 뜻은10월 5일 이탈리아아카데미 회의에서 선언되며 마리아 아녜시는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 교수가 됩니다. - P95

유일한 여성 편집장,
엘리자베스 바이튼

◆◆ 역사학자도 몰랐던 여성 편집장

≪숙녀들의 수첩>이 발간된 140여 년간 여성 편집장은 단 한 명, 엘리자베스 바이튼Elizabeth Beighton 이었습니다. 여성 편집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200여 년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P106

여성의 참여를 최초로 진지하게 분석한 과학사학자 테리 조차 1975년 논문 「숙녀들의수첩 혹은 여성들의 책력, 1704~1841」을 발표하며 엘리자베스 바이튼이 1743년부터 1745년까지 임시로 편집장을 맡았다고 잘못된 정보를기록했습니다.  - P107

◆◆ 편집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

테리 펠의 논문 내용과 달리, 엘리자베스 바이든은 편집장 자리를 고작 2년 만에 넘길 만큼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경쟁자는 물리치고 조력자를 찾아내며 16년이라는 긴 임기를 지킨 전투적인 편집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바이튼은 공식 직함을 얻은 뒤에도 2년 이상이 자리를 위협받았습니다. 1746년, 일출 시각과 달의 모양 등을 계산해주던 수학자 토마스 쿠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엘리자베스 바이튼은 자신의 적수와 "힘든 투쟁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 P407

결국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수학자 로버트 해스가 나서기로 했습니다. 1737년 호부터 ≪숙녀들의 수첩≫에 수학 문제와 답을 보냈던 로버트 해스는 뒤끝이 있고 시비를 걸기 좋아해 자주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 P108

◆◆ 헨리 바이튼과 여성 독자의 소외

여러 과학사학자들은 헨리 바이튼이 무려 30년간≪숙녀들의 수첩≫ 편집장을 지내며 잡지의 정체성을 바꿔놓았다고 평가합니다. 초대 편집장 존 티퍼가 일하던 시절에는 수학 문제가 대부분머리를 싸매면 풀 수 있는 산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숙녀들의 수첩>을 ‘심심풀이용 퍼즐 잡지‘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헨리바이튼을 거치며 <숙녀들의 수첩≫은 명실상부 ‘진지한 아마추어수학자‘를 위한 잡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 P109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선언과 달리, 헨리 바이튼의 노력은 때로 여성 독자를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틴어를 잡지에 도입한 것입니다.  - P110

이런 소동에도 헨리 바이튼은 라틴어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급기야는 라틴어 수수께끼를 싣는 바람에 독자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혔습니다. 편집장이 혼자 쓰는 서문과 달리 수수께끼는 인기가 많은 코너였기에 여성 독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해결책은 라틴어를 없애는 게 아니라 파트를 나누어 수수께끼의 라틴어판을 따로 싣는 방향이 되었습니다.  - P111

과학사학자 론다 쉬빈저는 「두뇌는 평등하다」에서 <숙녀들의 수첩>이 라틴어와 산문체를 받아들이며 남성적인 이미지를 얻게 된 과정이 유럽에서 여성의 과학적 능력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과 함께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 P111

독학으로 탄생한 수학자,
토마스 심슨

◆◆ 그땐 독학만으로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 누군가는 재앙의 전조라 했고 누군가는 신의 나라에서 일어났을 일과 관련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15살의 토마스 심슨은 강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일식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겠다는 열광을품었습니다. - P122

아마추어 수학자가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기미가 보인 건 1730년대입니다. 점성술가에게 배운 대로 점을 치려다 사고를 치는 바람에 토마스 심슨은 뉴니튼을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점성술을 그만두고 1735년부터 수학에 온 시간을 쏟았습니다. 독학하는 아마추어 학자들의 성지인 ≪숙녀들의 수첩≫도 즐겨 봤는데, 1736년 호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 명성을 얻었습니다. - P123

이처럼 토마스 심슨은 기술학교나 대학 학위 없이도 수학자가 됐습니다. 공식적인 교육이라곤 영어를 배운 게 유일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학위 없이 수학자와 과학자가 되는것은 불가능하지만, 18세기는 과학이 학문으로 새롭게 등장해 과학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과학이 무엇인지,
누가 과학자인지,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태였는데요. 이는 여성이 수학과 과학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던 배경으로작용하기도 했습니다. - P124

◆◆ ‘심슨 공식‘은 토마스 심슨이 만들지 않았다

토마스 심슨의 업적이라 하면 ‘심슨 공식‘이 가장 먼저 언급되지만, 이는 사실 토마스 심슨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녜시의 마녀 곡선과 같은일이 토마스 심슨에게도 있었던 겁니다 - P124

심슨 공식은 토마스 심슨이 태어나기도 전인 1639년에 이탈리아수학자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 Bonaventura Cavalieri가 먼저 사용한 기록이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 심슨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수학책이 무척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 - P125

정작 토마스 심슨이 기여한 이론에는 그의 이름이 붙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미적분학에서 쓰는 ‘뉴턴 방법Newton‘s law‘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외에 확률 이론에도 토마스 심슨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 번 관찰해서 얻은 관측값보다 여러 번 관찰해서 얻은 관측값을 평균하는 게더 믿을 만하다는 주장이 가장 유명합니다. 예를 들어, 천문학자가 천체를 관측할 때 얻은 관측값은 친체의 실제 위치와 다를 수 있습니다.
대기 상태 때문에 빛이 굴절할 수도 있고, 망원경의 렌즈가 빛을 흩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섯 번 이상 관측을 해서 얻은 천체 위치의 평균값이 한 번만 관측해서 얻은 값보다 더 참에 가까울 거라는게 토마스 심슨의 주장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독학으로 풀다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
1776-1831
수학자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수학계에서 제르맹이노린 건 파리과학아카데미의 논문 공모전이었다. 탄성력과 관련한 논문으로 상을 받은 뒤, 1816년에는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일부 풀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7세기 아마추어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낙서처럼 적고는 "여백이 부족해 증명은 생략한다"고 말한 문제로 유명하다. 간단해 보이지만 350년뒤에야 완전한 해답이 나왔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라제르맹의 풀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이 풀이는 현재 ‘소피 제르맹 정리‘라 불린다. - P237

"대학이 아무리 우리를 거부해도"
‘남장한 여자들

◆◆ 의대 수업을 도강하다, 마가렛 킹

대학 교실에서 기초 지식을 쌓은 마가렛 킹은 1814년 이탈리아 피사로 가서 뛰어난 외과의사 안드레아 바카 베를린기에리를 만나 함께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지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와 약국도 열었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은 간호사만이 아니라 의사도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실천한 겁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의 신체 교육에 대해 할머니가 젊은 어머니에게 하는 조언Advice to Young Mothers On the Physical Education of Children Bya Granmother』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 P139

죽어서야 성별이 드러난 군의관, 제임스 베리

새롭게 태어난 제임스 베리는 마가렛 킹과 달리 체구가 작아서 사춘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외모에 맞게 나이를 속여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높고 가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피부 탓에 나이가 더 어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습니다. 심지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할 위기에 놓이자 삼촌의 귀족 계급 친구가 교수들을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 P140

가파른 승진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완고한 성격을 바탕으로 각 점령지의 의료 환경을 눈에 띄게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베리는 위생 상태가 좋아야 질병을 예방한다고 믿어 다친 군인이 머무는 병원은 물론이고 노예와 죄수, 나병 환자가 있는 곳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소위 ‘하찮은 사람들의 공간까지개선할 것을 상관과 공무원에게 요령 없이 요구하는 바람에 때로 지위가 강등되거나 체포를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 P141

제임스 베리는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외과 의사로는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을 성공시키기도 했습니다. 산모와 아기를 모두 살려낸 이 수술은 케이프타운에서 이뤄져 아프리카의 첫 제왕절개술로 인정되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제왕절개술은 산모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위험하고 어려운 수술로 여겨졌습니다.  - P141

제임스 베리의 비밀은 영영 묻힐 예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벗기지 말고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이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청소부가 제임스 베리의 시체를 확인하고 성별을 폭로했습니다. 영국 전체가 떠들썩해지자 영국군은 군의관이 여성인 것을 몰랐던 사실을 감추려고 100여 년간 모든 기록을 숨겼습니다.  - P142

◆◆ 성별을 숨겼던 여성 과학자들

19세기에는 겉모습을 남성으로 바꾸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성별을 숨겼던 여성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해부학자 마리 티로 다르콩빌은 모든 책을 익명으로 출간했습니다. 프랑스 수학자 소피 제르맹은
‘앙투안 오귀스트 르블랑이라는 남성적인 가명으로 남성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훗날 소피 제르맹은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비웃는 것이 두려워 가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남성의 가면을 쓰는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도움이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활동도 제약했습니다. 제임스 베리는 죽을 때까지 속을 털어놓을 동료를 사귈 수 없었고, 소피 제르맹은 뛰어난 학자와 서신을 교환하는 것으로만 연구를 이어나가 최신 수학을흡수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 P143

"생물은 멸종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뒤집다
메리 애닝
◆Mary Anning
✦ 1799-1847
화석수집가, 고생물학자

성경을 믿던 사람들은 기이한 뼈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화와 멸종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이후에도 애닝은 익룡과 플레시오사우루스의 뼈 화석을 최초로 발견하고 공룡의 똥 화석도 찾아냈다. 애닝의 발견으로 학계는 화석으로 지구의 과거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 P153

18세기 독일에는
여성 과학자가 많았다

◆◆ 가내수공업자의 딸, 곤충학자가 되다

어릴 적 메리안은 모든 애벌레를 채집한 것도 모자라 누에를 데려다 키우기까지 했습니다.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길드화가였던 의붓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류층 여성처럼 교양으로 배운 게 아니라 일을 돕기 위해 배웠습니다.
길드 장인의 딸들에겐 흔한 일이었습니다. - P154

나비의 변태 과정을 알에서부터 관찰한 것도 혁신이었습니다. 당시는 곤충이 진흙에서 저절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이 널리 지지받고있었습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연발생설을 두고 곤충은 신이 아니라 악마가 만든다고 말했는데, 17세기에도 곤충은 ‘악마의 짐승‘이라는 악명 높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 P155

이렇게 탄생한 『수리남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on』는 자연사 도서관에 반드시 놓이는 필독서가 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학계에서도 찬사를 받았습니다. 독일 천문학자 크리스토프 아놀트는 "게스너, 워턴, 펜, 뮈세프가 무시한 것이한 현명한 여성을 통해 활짝 피어났다"고 평가했습니다. - P156

◆◆ 근대과학의 절반은 수공업자가 만들었다

 마리아 쿠니츠는 행성 위치를 계산할 때 쓰던 천체 목록을단순화했고, 마리아 아이마르트는 6년에 걸쳐 달의 모양 변화를 관찰해 250점의 그림에 담았으며, 엘리자베타 헤벨리우스Elisabeth Hevelius는 1888개 별자리를 책 한 권에 정리했습니다.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새로운 혜성 ‘Comet of 1702‘를 발견한 마리아 빙켈만이었습니다. - P156

앞서 설명한 천문학자 중 지주의 딸이었던 마리아 쿠니츠 외에는 모두 상류층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상류층도 아닌데 과학적 업적을 낼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의 곤충학계와 천문학계가 모두 가내수공업자들의 조합인 길드와 비슷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157

수공업 전통에서 훈련 받았다고 해서 대학을 나온 학자에 비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마리아 빙켈만의 남편인 고트프리트 키르히도 대학이 아닌 헤벨리우스의 개인 천문대에서 관측 기술을 배웠습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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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유혹하기

바람직한 특질을 빠지지 않고 모두 소유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깊은 골짜기 아래에 무성하게 열린 잘 익은 딸기를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는 딸기를 입에 집어넣을 수 없듯이, 매력적인 배우자를 가려내는 것만으로는 성공적인 짝짓기에 도달할 수 없다. - P31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보다 강하고, 크고, 교활한 수컷 바다코끼리들만이 성공적으로 배우자를 차지했다. 더 크고 더 공격적인 수컷들이 암컷에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기 아들들에게도 이러한 자질을 지정하는 유전자를 물려준다. 사실 수컷들은 몸무게가 대략 1,800킬로그램이나 나가며 이는 보통 암컷의 4배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암컷들이 교미하다가 찌부러지지나 않을까 짐짓 걱정이 들 정도다. - P31

인간의 짝짓기 행동은 바다코끼리와는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바다코끼리 수컷 가운데 겨우 5퍼센트가 85퍼센트의 암컷들과 교미하지만, 인간에서는 90퍼센트 이상의 남성들이 생애 어느 시점에선가 자기 배우자를 찾는다.⁸ 바다코끼리 수컷들은 암컷들로 이루어진 하렘을 독점하려고 애쓰며 그 승자는 기껏해야 한두 계절에 걸쳐 하렘을 차지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지속되는 애정 관계를유지한다. 그러나 인간 남성과 바다코끼리 수컷 모두 공유하는 핵심 특질이 있다. - P32

일반적으로 여성 간의 경쟁은 남성 간의 경쟁에 비하면 덜 요란하고 덜 폭력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짝짓기 체계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저술가인 H. L. 멘켄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여자들이 서로 키스하는 모습은 언제나 검투사들이 서로 악수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 P34

배우자 지키기

배우자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한 적응적 문제다. 이미 내가 차지한 배우자라도 경쟁자에게는 여전히 바람직한 상대일 수 있다. 일단 배우자를 빼앗기게 되면 그동안 그를 유혹하고, 그의 환심을 사고, 그에게 헌신해 온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간다.  - P35

번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수컷이 배우자 암컷을 지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수컷들과 힘들게 경쟁하여 마침내 암컷을 유혹해 낸 능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다른 종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은 며칠동안 배우자를 부둥켜안고 섹스를 계속하지는 않지만, 배우자를 붙들어두는 것은 장기적인 애정 관계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 P36

반면에 우리의 조상 여성들은 아무리 남편이 부정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친어머니일 가능성이 낮아질 염려는없었다. 내가 내 아이들의 어머니일 가능성은 언제나 100퍼센트 확실하기 때문이다.  - P36

질투는 마치 로봇처럼 기계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고정 불변의 본능이 아니다. 맥락과 환경에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리 전략이다.
질투라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해 마련된 수많은 갖가지 행동안이 존재하며, 이들 덕분에 인간은 어떤 상황의 미묘한 느낌에 따라 탄력적으로 질투 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을 보인다. - P37

배우자 교체하기

. 때로는 차라리 배우자와 헤어지는 것이 타당한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거나, 섹스를 거부하거나, 신체적인 학대를 가하기 시작하는 상황 등이 이에 해당된다. 경제적인 곤란이나 성적인 부정, 잔혹한 학대를 인내하면서 배우자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그 한결같은 마음씨 덕분에 칭찬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원치 않은 배우자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행위는 유전자를 후세에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P38

배우자를 갈아 치우는 경우는 동물 세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산비둘기는 올해의 번식기는 물론 다음 해까지도 보통 일부일처제를 유지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파경을 맞곤 한다. 산비둘기들은 매해 대략25퍼센트의 이혼율을 보이며, 이러한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불임이다.¹²

좋은 배우자를 고르고, 유혹하고, 지키는 성 전략이 진화했듯이.
나쁜 배우자를 청산하는 능력도 우리에게 진화하였다. 이혼은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질이다.¹³ - P38

일단 현재의 배우자를 버리기로 결정하면, 또 다른 일련의 심리전략들이 작동한다. 결별하기로 내린 결정은 현재 부부 관계가 계속 지속되는 것에 비상한 관심을 두는 양가 친족들에게도 복잡 미묘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결별은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많은 노고를 필요로한다. - P39

결별은 불량한 배우자를 다루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지만, 새로운 배우자를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오기도한다. 대부분의 포유동물처럼 인간도 오직 한 명의 배우자하고만 평생 짝짓기하지는 않는다.

성 간의 갈등

어느 한 성에 속하는 개체들이 이성 배우자를 선택하고, 끌어들이고,
지키고, 혹은 교체하기 위해 구사하는 성 전략이 종종 이성 개체들과의갈등을 유발하는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밑들이 암컷들은 구애하는 수컷이 큼지막한 혼인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교미를 하려 들지 않는다.¹⁴ 죽은 곤충 등으로 이루어진 혼인 선물을 받은 암컷이 이를 먹어 치울 동안 수컷은 암컷과 교미한다.

인간 남성과 여성도 자원과 성 관계를 두고 충돌한다. 인간 짝짓기를 진화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한성이 택한 짝짓기 전략은 다른 성이 택한 전략의 발목을 잡아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를 전략 간섭(strategic interference)이라고 한다. 일시적 혹은 지속적인 성 관계 상대를 구할 때 남녀의 성향 차이를 생각해 보자.  - P41

개인차도 있고 예외도 많지만, 대개 남성의 경우 섹스까지 도달하는 역치가 상대적으로 낮다.¹⁵

결혼식장에 들어서서 혼인 서약을 한다고 해서 갈등이 그치지는않는다. 결혼한 여성들은 남편이 잘난 척하고,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불평한다. 결혼한 남성들은 아내가 너무 분위기만찾고, 자기한테 의지하려고만 들고, 성 관계를 자주 거부한다고 불평한다. 남녀 모두 가벼운 시시덕거림에서 심각한 정사에 이르기까지 배우자가 저지르는 부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의 진화된 짝짓기 전략을 고려하면 이러한 모든 갈등은 쉽게 이해된다.

문화와 맥락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사바나 초원이나 동굴 속, 혹은 모닥불 옆에서 짝짓기 전략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독신자 술집이나파티, 인터넷, 혹은 교제 알선 업체에서 전략을 실행한다. 현대의 짝짓기 환경은 먼 과거의 환경과 크게 달라졌지만 성 전략은 예전과 다름없이 우리 마음속에서 작동한다. 진화된 짝짓기 전략은 그대로다. - P43

생존 전략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진화된 짝짓기 전략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현대에는 부적응적일 수 있다. 예컨대 에이즈(AIDS)의 등장은 조상 환경 때에 비하여 일시적 성 관계가 생존에 훨씬더 위험한 손실을 끼치게끔 만들었다.

각 개인이 처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문화적 상황도 달라지며, 이러한 변화는 성 전략의 전체 레퍼토리에서 특정한 성 전략을 끄집어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떤 문화권은 한 남성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게 하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한다. 다른 문화권은 한 여성이 여러 남편을 거느리게 하는 일처다부제를 시행한다. - P45

또 다른 중요한 상황적 요인으로서 성비, 곧 가능한 여성의 수와가능한 남성의 수의 비율이 있다. 파라과이의 아체 인디언들에서 보듯이 여성이 남아돌 때에는 남성들은 한 여자에게만 헌신하는 것을 별로내켜 하지 않으며 많은 여자들과 일시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쓴다. 현대중국의 도시 사회나 베네수엘라의 히위 족에서처럼 남자가 더 많을 때는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며 이혼율도 급락한다.⁴⁵

인간의 성 전략을 이해하기위해서 이 책은 과거에 계속 작용했던 선택압에 의한 적응적 문제들,
그리고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전략적 해결책으로서의 심리 기제, 그리고 어떤 특정한 해결책만을 활성화시키는 현재의 맥락들을 살펴본다. - P46

인간 성 행동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

우리의 조상들은 먹이를 찾고, 보금자리를 유지하고, 실내를 따뜻하게 하고, 배우자를 고르고 경쟁하고, 아이를 보호하고, 동맹을 맺고,
높은 지위를 얻으려 애쓰고, 약탈자의 침입을 막는 일처럼 그때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기 때문에 짧은 시간척도 안에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수천 세대에 걸쳐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축적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 P47

자연주의적 오류는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기술(記述)을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 당위와 혼동한다. 자연 세계에는 질병, 전염병, 기생충,
영아 사망과 같이 우리가 없애거나 감소시키려고 애쓰는 수많은 자연현상이 존재한다. 이들이 자연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들이 응당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자연주의적 오류를 뒤집으면 반자연주의적 오류(antinaturalistic fall-acy)가 된다. 어떤 이들은 무엇이 인간적인가에 대해 지나치게 숭고한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관점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인간은 자연과 하나 되어 서로서로 화합하며, 동식물과 더불어 평화롭게 상생하도록 태어났다. - P48

변화에 대해 진화심리학이 암시하는 바를 잘못 추론하는 데서 또다른 저항이 생긴다. 어떤 짝짓기 전략이 진화생물학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 전략은 바꿀 수 없고, 고칠 수 없고, 불변하다고 흔히 간주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맹목적인 로봇처럼 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환경적으로 결정되는 것, 두가지 서로 독립적인 범주로 잘못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 P49

진화심리학에 대한 또 다른 저항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온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진화적 설명은 남녀의 불평등을 암시하고, 남성과여성이 맡을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을 가하고,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부추기고, 여성을 권력과 자원으로부터 영원히 배제시키려 하고, 현상태를 타파하기가 어렵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확산시킨다고 우려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때로 진화적 설명을 거부한다. - P50

진화심리학은 어떠한 정치적 의제도 없다. 내가 이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들에 대해 약간이라도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이나 인종, 혹은 사용되는 성 전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 간에 평등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인간 성 행동의 스펙트럼에 대하여 폭넓게 관용이 베풀어지고, 진화 이론이 유전적 혹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환경적 영향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이론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 P51

인간
짝짓기의
미스터리

이 장에서는 인간 짝짓기에 얽힌 일련의 미스터리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아직까지도 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미스터리, 지금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미스터리, 폭발력이 너무 강해서 냉정한 과학적 탐구가거의 불가능한 미스터리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첫 번째 미스터리로우리는 동성애라는, 일견 진화적 설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다룰 것이다. - P481

두 번째 미스터리로 우리는 강간이라는, 즉 논쟁과 정치와 열띤 감정에 휩싸여 있으면서 정작 체계적인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 - P482

동성애는 어떤가요?

"이성애 지향은 심리적 적응의 한 범례(範例)이다." 성적 지향을 연구하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베일리가 한 말이다. 그의 논거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레즈비언 여성이나 동성애 남성처럼 성적 지향이 일차적으로 오직 동성으로만 향하는 사람들이 적은 빈도로나마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은 진정 풀기 힘든 진화적 문제이다. 인간의 성 전략에 대해내가 지금껏 해온 수백 번의 대중 강연 중에 가장 흔히 들은 질문은 바로 "동성애는 어떤가요?"라는 질문이었다. - P483

동성애를 설명하는 초기의 진화 이론 가운데 하나는 에드워드 윌슨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던 혈연 이타성 이론(kin altruism theory)이다.⁴
이 이론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이 비록 직접적인 번식률은 낮지만 그들의 조카 같은 유전적 혈연들에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포괄 적응도를 높이기 때문에 동성애 지향을 만드는 유전자는 자연선택에 의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 P484

그러나 혈연 이타성 이론에는 심각한 개념적, 실험적 문제점이 있다. 우선 이 이론은 왜 사람들이 애당초 동성 구성원들에게 성적으로 끌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유전적 혈연에게 이득을주게끔 설계된 기제를 만들었다면, 왜 굳이 잠재적으로 손실을 끼치는동성애적 욕망을 그 안에 집어넣었을까? 그냥 단순하게 혈연에 대한 이타 행위자는 번식을 하지 않게 만들었으면 되지 않았을까?⁵ - P485

과학 이론의 타당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는 오로지 건조무미한 실험 자료들이다.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바브로와 진화심리학자 마이클 베일리는 이 이론에 대한 검증을 실시했다. 이들은 나이, 학력,
인종 등을 동등하게 맞추어 동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남성들의 표본을 수집한 다음에 그들이 혈연에게 투자하는 형태와 그 정도를 조사했다.  - P485

여전히 우리에게는 어떻게 동성애가 기원하여 계속 유지되었는가라는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몇 가지 새로운 이론들이 최근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제안되었다. 우선 진화심리학자 프랭크 무스카렐라는동성애적 지향보다는 동성욕적(同性感的, homoerotic) 행동, 즉 생식기를 접촉시켜 쾌감을 얻는 동성 간의 성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냐 한다고 주장한다. - P458

 무스카렐라는 동성욕적 행동이 동맹 형성이라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는데 이러한 기능은 몇몇 진화영장류학자들도 이미제안한 바 있다. 동맹 형성 이론(alliance formation theory)에 따르면, 동성욕적 행동은 동성 간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진화했다. 동성 간의동맹이 진화 역사상 청춘 남성들에게 특히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다. - P486

하지만 대다수 문화권에서 젊은 남성의 절대 다수가 나이 든 남성들에게 성적 쾌감을 일상적으로 제공해 준다는 증거는 없다.  - P486

왜 동성 간 섹스라는 비용을 지불할 필요 없이 동맹만을 깔끔히 맺는 행동은 진화하지 않았을까? 사실 동성 간의 비성적(性的, non-sexual)동맹은 비인간 영장류뿐만 아니라 인간에서도 매우 흔하며, 이는 동성간의 동맹이 굳이 성적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⁷ - P487

또 다른 새로운 이론은 경제학자 에드워드 밀러가 제안한 좋은 남자 이론(nice-guy theory)이다.⁸ 지금까지 살펴본 이론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그는 먼저 동성애도 동성욕적 행동도 그 자체로는 적응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동성애는 다른 기능, 즉 공감이나 감수성, 자상함, 친절함 같은 ‘여성적인 자질‘을 발현하는 기능을 수행하게끔 설계된 유전자로 인해 비교적 드물게 존재하는 부산물이다. 밀러에 따르면, 이런
‘좋은 남자‘ 자질을 지닌 남성은 좀더 마초적인 자질을 지닌 남성보다더 좋은 부모가 되고 자원을 더 많이 공급해 주기 때문에 여성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평가된다.  - P487

유감스럽게도 좋은 남자 이론 역시 개념적, 실험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개념적으로 동성애 지향이 끼치는 번식적 손실을 감안하면,
왜 자연선택은 ‘좋은 남자‘ 자질이 이성애와 공존하게끔 만들어 주는 변경 유전자(modifier gene)를 택하지 않았을까? 이 이론은 자연선택이남자를 마음씨 좋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남성에게 여성성 유전자를 장착시키는 길밖에 없을 때만 유효하다. ‘마음씨 좋은‘ 이성애자는 있을수 없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 P488

한때 X 염색체의 Xq28 부분에서 이른바 ‘게이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일면서 학계를 흥분시켰으나, 다른 연구에서 재현되지 않아 곧 잦아들었다.¹⁰ 몇몇 학자들은 동성애가 인간이 진화해 온 과거 환경과 현대 사회의 비정상적인 면들의 괴리로 생긴 새로운 현대 환경의 부산물일지 모른다고 제안하였다. 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그토록 어긋나는 환경적 특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명쾌하게 밝히지 못했다. - P489

또 다른 최근의 한 이론은 가히 ‘올해에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킨상‘을 수상할 만하다. 이 이론은 동성애 지향을 낳는 일차적인 유전적 토대는 아마 없을 것이며, 동성애 지향이 성적 혹은 비성적 수단을 통해 전파되는 전염성 질병의 매개체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일 것이라고 제안한다.¹² - P489

마찬가지로 성적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의 나이에 성적 지향의 초기 발달 과정이 거의 완성된다는 사실은 전염성 매개체가 성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있지만 전염성 매개체가 비성적 수단을 통해 전달될 가능성은 배제할수 없음을 시사한다. 남성 동성애를 설명하는 전염성 매개체 이론을 확실하게 검증하려면 좀더 상세한 예측과 그에 따른 실험적 검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P490

동성애의 진화적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면, 마이클 베일리, 프랭크 무스카렐라, 제임스 댑스 같은이론가들이 말했듯이 동성애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중요한 명제를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여성 동성애와 남성 동성애는 본질적으로 매우 다르며 그 발달 경로도 다르다. 남성의 성적 지향은 발달 초기에 나타나서 이미 상당 부분 고정되지만, 여성의 성적 지향은 일생을 통해 남성보다 훨씬 더 유연한 것처럼 보인다. - P490

또한 앞으로 제기될 이론은 현재 ‘레즈비언‘과 ‘게이‘로 분류되는 사람들 사이에 내재된 상당한 개인차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신을 "버치(butch, 여성 동성애자 가운데 남성 역을 맡은 이-옮긴이)" 또는 "팜므(femme, 여성 동성애자 가운데 여성 역을 맡은 이—옮긴이)"로 인식하는 레즈비언들은 그에 따라 배우자 선호도 다르다.¹⁴ - P491

동성애 지향과 동성 간의 성 행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최근의 이론적, 실험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의 기원은 여전히 과학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단 하나의 이론으로써 게이 남성과 레즈비언을 동시에 설득력 있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 내부에 존재하는뚜렷한 개인차까지 설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좀더 이 문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진척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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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소유권은 의지의 발현에서 나오며 보편적 동의에 의해재가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루동은 이러한 인간 상호간의동의라는 심리적 논거가 소유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암묵적이든 공식적이든 보편적 동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평등을 전제로 한다. - P444

한편 경제학자들은 소유의 근거를 주로 노동에서 찾는다. 그러나 프루동은 소유의 노동 기반설에 대해 대담하게 반기를 들면서 당대의 경제학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 P445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뉴턴의 물리학 등 남다른 재능의 소산도 근면한 많은 이들의 축적된 노고 덕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자본은 집합적 소산이며 따라서 공동 재산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자는 누구든 사회 구성원 모두에 대한 영원한 채무자일 뿐이며 <자신이 만든 생산물의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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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 위스키

 잭 다니엘스 Jack Daniel‘s와 짐빔 Jim Beam을 미국 위스키의 전부로 알던 시절, 나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음주 경험도 풍부한 선배는
"메이커스 마크를 모르면 위스키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위스키이기에 저렇게 얘기하나‘ 싶었다. - P47

 방문자 센터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처음엔 다른 방문객 누군가가 데려왔나 싶었다. 그런데 녀석이 하는 짓을 보니 그건 아닌 게 분명했다. 태도와 자세가 여유 있고 당당했다. "이봐 얼뜨기, 여긴 바로 내 구역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녀석은 한동안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더니 탁자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 앉아 있는 모습도 기품이 넘치고 우아했다. - P48

고양이 얘기가 나온 김에 잠깐 설명을 하자면 증류소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건 일종의 전통이다. 물론 이유가있다. 증류소엔 위스키 제조에 필요한곡물이 잔뜩 쌓여 있다. 그러다보니과거엔 증류소 주변에 쥐가 들끓었다.
곡물 창고를 들락거리는 쥐를 잡으려고 증류소에선 고양이나 개를 길렀다.
이처럼 증류소에서 쥐를 잡는 고양이를
‘워킹 캣Working Cat‘, 즉 ‘일하는 고양이‘라고 불렀다. - P49

이 증류소 부지만 808에이커, 주변의다른 땅까지 다 합하면 무려 1000에이커(약 400만 제곱미터)라고 한다. 1000에이커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싶어 잠깐 계산을 해봤다. 축구장 570개 면적이다.
이 드넓은 땅에 증류소 시설은 5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퍼센트 땅은 건드리지 않고 놀리고 있다. 왜 그냥 두느냐고 물었더니 환경 보호 때문이란다. 개발을 할수록 자연은 파괴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위스키 품질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 P50

철저히 환경을 보호해서일까? 증류소 건물 사이로 흐르는 개울만봐도 깊은 산속 계곡물처럼 맑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지리산 뱀사골이나 덕유산 구천동 계곡 수준이다. 증류소 직원은 "우리는 이곳을 위스키 개울 Whisky Creek이라고 불러요. 매일 아침이면 주변에 서식하는사슴들이 몰려와서 맑은 물을 마시고 돌아가죠. 내일 아침에 한번 와보세요. 사슴이 아주 많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 P51

새뮤얼스 가문의 땀과 눈물

이 멋진 증류소는 누가 세운 걸까? 증류시설로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며 메이커스 마크 탄생 일화를 들었다. 메이커스 마크의 역사는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인 새뮤얼스와 그 후손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이야기다. - P53

새뮤얼스 증류소는 4년 숙성 위스키를 제조해 판매하다가, 금주법시행으로 1919년에 문을 닫는다. 1933년 금주법 폐지 이후 생산을재개했지만, 오랜 공백 때문인지 위스키 품질은 엉망이었다. 한마디로 거칠고 쓰기만 한 맛없는 위스키였다. - P54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라 메이커스 마크증류소에 있는 증류실 세 곳은 크기나 구조, 설비까지 모두 똑같다는 점이다. 거울에 비춘 듯 세 곳의 증류실은 모든 게 똑같다. 내부에 있는 당화조 cooker, 발효조fermenter, 증류기의 크기와 모양이 똑같을뿐더러 놓여 있는 자리도 똑같다. 완벽히 닮은 증류실 세 곳을 가리켜 롭새뮤얼스는 "일란성 세쌍둥이"라고 표현했다. - P56

그렇다면 메이커스 마크는 왜 똑같은 증류 시설을 세 개나 지어서 따로따로 가동하는 걸까? 누가 봐도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데 말이다. 롭 새뮤얼스는 이렇게 답했다.

"이 증류소를 세운 제 할아버지와 저에게 증류소를 물려준 아버지의 생각은 똑같았습니다. 장인으로서 그들의 목표는 기업을 키우는것도 아니었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용이 더들더라도 맛있는 위스키를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기업이성장해 시설을 확장해야 할 때도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원래 있던것과 똑같은 증류 시설을 지어서 똑같은 공정으로 만들면 당연히 맛도 똑같을 테니까요. 더 큰 발효조와 더 큰 증류기를 쓰면 돈이 덜 든다는 건 우리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칫 위스키 품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 P57

‘황금 레시피‘를 찾아서

대대로 전해온 제조법을 태워버렸으니, 이젠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없었다. 다음날부터 빌 새뮤얼스는 "새롭고 부드러운"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레시피 개발에 착수한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곡물 배합 레시피인 매시빌mash bill을 찾는 것이었다. 어떤 곡물을 어떤비율로 섞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 P59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빌 새뮤얼스는 결국 해법을 찾아냈다. 바로
‘빵‘이었다. 진짜 위스키를 만드는 대신, 이런저런 곡물 조합으로 빵을 구워본 것이다. - P59

낡아빠진 곡물 분쇄기

증류소 직원 애기가 곡물을 빻을 때 쓰는 분쇄기를 보여줬다. 한눈에봐도 상당히 낡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구석기 유물‘이나 다름없다.
대체 언제부터 이 기계를 썼는지 물었다. 직원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만큼 오래됐다는 얘기다. 위스키도 잘팔리는데, 왜 이런 골동품을 계속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 P61

호밀 대신 밀을 써서 만든 버번 위스키°는 많지 않다. 버번의 본고장인 켄터키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밀을 쓰는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로는 당연히메이커스 마크를 들 수 있다. 또 돈이 있어도 못 구할 만큼 희소하고 천정부지로가격이 오른 패피 밴 윙클Pappy Van Winkle°° 도 호밀 대신 밀을 넣는다. 이 두 제품말고는 웰러W. L. Weller (버팔로 증류소)와 라서니Larceny(헤븐힐 증류소) 정도가 유명하다.

° 이처럼 호밀 대신 밀을 사용한 버번 위스키를 ‘휘티드 버번wheated bourbon‘ 혹은 ‘휘터wheater‘라고 부른다.
°°『빅 위스키Big Whiskey』라는 책에 따르면,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 창업자인 빌 새뮤얼스에게 호밀 대신 밀을 쓰라고 조언한 사람이 버번 위스키 장인 패피 밴 윙클이다. - P60

솔직히 여기 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증류할때도 다른 곳과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도수를 많이 끌어올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었다. 1차 증류를 마치면 60도(120프루프), 2차 증류까지 다 끝낸 뒤에도 65도(130프루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버번 업계에선 거의 최저 도수라고 할 수 있다. 최종 증류 도수를 기준으로우드포드 리저브 79도, 버팔로 트레이스 74도, 포 로지스Four Roses 역시 70도까지 증류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다. - P63

미국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가 쓴 『술 취한 원숭이 TheDrunken Monkey』라는 책에 따르면, 영장류와 인간의 후각이 발달하게된 건 알코올 때문이라고 한다.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된 과일을 먹고싶어 했던 원시인들이 코를 킁킁대며 알코올 냄새가 나는 곳을 찾다보니 저절로 후각 능력이 진화했다는 거다. 그러니 증류소 숙성고에서 코를 킁킁대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천수만 년 동안 알코올에 탐닉해온 인류가 대대로 이어온 DNA 때문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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