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맥락의 힘

대영제국이 북미 대륙에 처음 자리를 잡는 과정은 험난했다. 캐나다 최동단에 있는 뉴펀들랜드섬의 세인트존스에는 1583년 8월5일에 "그의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으로 새로이 발견한 이땅을 점유하고 "그림으로써 이곳에 영국의 해외 제국을 세운 험프리 길버트 경의 상륙을 기념하는 현판이 있다. - P11

엘리자베스 여왕이 롤리에게 맡긴 임무는 식민지를 세우라는 것, 여왕의 표현으로는 "월터 롤리의 재량에 따라 그곳에 거주하거나 남아 있으면서 건설하고 요새를 만들라"라는 것이었다. 롤리가 직접 북미에 간 적은 없지만, 1587년에 그가 보낸 원정대가식민지를 건설했으니 그곳이 바로 현재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다. 그러나 원정대는 거기 ‘남아 있지‘ 않았다. - P12

1990년대 말에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패 원인을 설명할 만한 흥미로운 증거가 등장했다. 어느 연구팀이 버지니아주 남동부에 있는 몇 백 년 된 사이프러스 나무들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다가,
로어노크식민지가 사라진 3년의 기간 동안 그 지역이 800년 만에찾아온 혹독한 가뭄에 시달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² 그런 시기에는 극단적인 식수 부족 때문에 주민들이 살아남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 P13

1장 맥락의 힘

2 Stahle, D. W., Cleaveland, M, K., Blanton, D. B., Therrell, M. D., & Gay, D.
A. (1998), 잃어버린 식민지와 제임스타운 가뭄The Lost Colony and Jamestowndroughts. Science, 280, 564-567. - P426

1960~1970년대에 사회심리학자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외부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의힘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관찰자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거짓말을 했을 것이 분명할 때조차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성격 탓이라고 생각한다. - P13

 로어노크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을 평가할 때도 이런 식의 귀인 오류*가 일어나, 식민지 주민들의 죽음은 가뭄이라는 상황 요인 때문으로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데도 주민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맥락 요인이 행위 당사자의 성격 못지않게 중요할 때조차도, 인류에게는 사람이 처한 맥락보다는 사람 혹은 행위 당사자의 영향력을 알아보기가 훨씬 더 쉬운 모양이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엉뚱한 무언가로 돌리는 것. 특히 어쩔 수 없는상황 요인이 있음에도 사람의 행동 원인을 무조건 그의 기질이나 성격 탓으로돌리는 것을 ‘기본적 귀인 오류‘라고 한다. - P14

물론 로어노크식민지의 실패를 순전히 기후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잘못이다. 로어노크 식민지가 생기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건설된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민들 역시 그 지역에 750여 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을 겪었음에도,⁵ 그 식민지는 (비록 가까스로지만) 살아남아 80년 넘게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 역할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 P14

5 Stahle et al., 1998. - P426

본성 대 양육 대결의 종말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에 관한 책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이 말을, 사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부모 밑에서 한 경험에 따라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가 결정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 부모가 물려준DNA 분자들도 우리에게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물학적사실이 발견되었다. - P15

나의 전작 《의존하는 유전자 The Dependent Gene》는 어째서 유전자가 우리의 특성을 결정하는 단독 요인일 수 없는지에 관한 책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닌 특징적 본성은 유전자가 결정한다는주장인 유전자 결정론에 반대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P15

 사실 얼굴 모양 같은 신체적 형질과 성격 같은 심리적특징 등 사람의 특징은 생물학적 분자들과 그 사람이 처한 맥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다.⁷ 전에도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이 분야를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본성 대양육 논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항상 유전적 요인과 상황적요인이 모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 P16

7Schneider, S. M. (2012). 《결과의 과학: 결과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고, 뇌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세계에 효과를 남기는 방식 The science of consequences: Howthey affect genes, change the brain, and impact our world). Amherst, NY: Prometheus Books. - P426

 하지만 내가 ‘후성유전‘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 용어가 어쩐지 못마땅하다고 하셨다.
‘epi‘라는 접두사가 그리스어로 ‘위에‘, ‘겉에‘, ‘위쪽에‘라는 뜻임을 알고 있는데, 유전자 위에 뭔가가 있다는 개념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였드. - P16

 과학자들이 후성유전에 관해 이런식으로 말할 때는, 한 유기체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비유전적 요인들, 예컨대 호르몬이나 동물이 살아가는 사회적 맥락 등을 염두에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의사인 아버지는 이런 은유적 설명을 부적절하게 여겼고, ‘후성유전적epigenetic‘ 이라는 단어를 쓰려면 그건 물리적으로 유전자 위에 존재하는 것만을 지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17

심리학과 생물학

발달심리학자인 나에게는 심리적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발달하는지가 큰 관심사다. 그 발달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 공부가 아주 유용했다. 심리학에 생물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성격, 행동, 감정, 생각이 모두 생물학적 기관인 뇌의 구조와 기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관들도 심리적 특성에 영향을 미친다. - P18

 예컨대 보통의 건강 상태를 지닌 어떤 사람의 심박수 변화를 하루 동안 살펴볼 때, 갑작스레맥박이 치솟은 것은 요즘 반해 있는 사람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를 몰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경험이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이 체중 증가에 미치는 영향⁸이나 심리적 스트레스가 심장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⁹ 등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경험이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 P19

8 Needham, B. L., Epel, E. S., Adler, N. E., & Kiefe, C. (2010), gTrajectories of change in obesity and symptoms of depression: TheCARDIA stud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00, 1040-1046.

9 Dimsdale, J. E. (2008).
Psychological stress andcardiovascular disease. Journal of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 51, 1237-1246. - P426

행동 후성유전학의 통찰에는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방식을 바꿀 만한 잠재력이 담겨 있다. 그러니 이 학문은 생물학자들만의 영역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이 지식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P20

후성유전학의 혁명적 발견들

내가 주로 집중할 분야는 후성유전학 중에서도 후성유전의 효과가 감정적 반응성, 기억과 학습, 정신 건강, 행동 같은 심리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연구하는 분야인 행동 후성유전학이다.¹² 나의 강조점이 이렇다 보니, 암이나 노화 같은 주제는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 P22

12Lester, B. M., Tronick, E., Nestler, E., Abel, T., Kosofsky, B., Kuzawa, C. W.,
Wood, M. A. (2011).
York Academy of Sciences, 1226, 14-33.
Behavioral epigenetics. Annals of the New - P427

여기서 주의 사항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행동 후성유전학을 둘러싼 흥분이 워낙 급속도로 커지다 보니 벌써 몇몇 저자들이 이 뜨거운 새 분야가 너무 성급하게 앞서 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¹⁴ 최근 몇몇 논문은 행동 후성유전학을 둘러싼 "들뜸"에 우려를 표했고,¹⁵ 존경받는 과학자 8명은 2010년<사이언스>에 실린 "후성유전체 프로젝트의 과학적 근거에 진중한 유보의 뜻을 표명"하는 서한에 서명했다.¹⁶ - P23

14 141516Miller, G. (2010). The seductive allure of behavioralepigenetics, Science, 329, p. 24.

15 15a. Albert, P. R. (2010). 정신질환에서 후성유전, 희망인가 과대광고인가?
Epigenetics in mental illness: Hope or hype? Journal of Psychiatry and Neuroscience,
35,366-368.
15b. Buchen, L. (2010). 190 In their nurture, Nature, 467, 146-148.

16 Prashne, M. (2010). 후성유전체 프로젝트의 과학적 근거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ver the scientific basis of epigenome project, Nature, 464, p. 487. - P427

2

DNA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양쪽 가슴을 수술로제거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는 완전히 건강한 상태였다. 그가<뉴욕타임스>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자신에게 "유방암과 난소암의 발병 위험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결함 있는‘ 유전자 BRCA1"¹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 P25

2장DNA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1 Jolie, A. (2013, May 14). 나의 의학적 선택 My medical choice. New York Times. - P427

졸리가 쓴 글을 보면 결정을 내리기 전 자신이 처한 상태를 꽤 상세히 이해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유전자는BRCA1 (브라카-원이라고 읽는다)이라는 두문자어로 지칭하지만,
이는 더 공식적인 ‘유방암 1(Breast cancer 1)‘이라는 단어를 줄여만든 별칭이다. 이런 이름을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 유전자가 유방암을 유발하는 비정상적 유전자라고 속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생각은 두 가지 중요한 면에서 틀렸다. 첫째로 BRCA1은 비정상이아니다. 이 유전자는 모든 사람의 몸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손상된DNA를 수리하는 필수적인 기능이자 꽤 자주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므로, 이것이 우리 몸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일이다. 둘째, BRCA1의 다양한 변이형 중 암과 연관된 것들조차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암을 유발하지는않는다. - P26

 어떤 사람의 눈에 졸리는 유방암에 걸리지 않을 실질적 가능성이 존재하는데도과도한 수술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과학 및 건강 분야 필진 세 사람이 지적했듯이, 일부 의사들은 졸리가 수술 사실을 공개한 것이 일부 여성들에게 오해를 일으켜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유방 제거 수술의] 유행을 부추길수 있다고 우려했다.⁴ - P27

4 Grady, D., Parker-Pope, T., & Belluck, P. (2013, May 14).
술에 대한 졸리의 공개로 부각된 딜레마Jolie‘s disclosure of preventive mastectomy highlights dilemma, New York Times.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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