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수다와 속삭임 - 보다, 느끼다, 채우다
고유라 지음 / 아이템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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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는 않아도 작가의 담백하고도 진솔한 말들이 그림과 어우러져 읽는 내내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에 대해 이해하고 화가의 정신이나 배경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덤비면서 읽으려 한다면 작가의 의도와 어긋날 것이다. 눈으로는 그냥 편안히 그림을 감상하고 작가가 차근차근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서양 명화 140편이 실려 있는데 의외였던 것은 목차를 보니 그 순서가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는 것. 이런 그림책을 접하면 흔히 작가별이나 시대별로 순서가 짜여 있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렇다고 그림 분위기나 화풍이 목차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그냥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목차인가 보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 역시 객관적인 정보나 사실에 근거한 글보다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있어 마치 한 편의 시를 감상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아 그 안에 묵직한 여운이 흐른다.

​p.320 "너무 행복한 것은 너무 가까이서 보면 행복이 저만치 달아날 것만 같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보라고 사람들은 권한다. 사과 따는 사람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140편의 다채로운 명화가 실려 있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등등 잘 알지 못하는 작품이 더 많았지만 익숙한 그림이나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나오면 반가웠다. 또한 샤갈이나 고흐, 클림트 등 잘 알고 있는 화가뿐 아니라 생소한 화가의 작품도 많아서 오히려 좋았다.

P.267 "나는 폼 잡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그림이 좋다"는 르누아르의 말처럼, 그의 그림에는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혹이 있다.

나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담백한 색조로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구현하고 풍부한 색채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장밋빛 불그스름한 어린 소녀나 여인을 사랑스럽게 그렸는데 기교 없는 수채화 같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맑아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그림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고 힐링과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느냐에 따라 그림 속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배움과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 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도 하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웠던 마음이 따뜻해질 수도 있다. 코로나 블루로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그림을 감상하고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템하우스 #고유라 #그림과수다와속삭임 #힐링 #명화 #그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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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들 - 인생의 판을 바꾸는 무의식의 힘
정도언 지음 / 지와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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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과거는 한 가지 판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바꿀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매력은 살아온 이야기의 판을 개작, 고쳐 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이 문장을 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내 선택이 현재의 결과이고 미래에 영향을 미치긴 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의 판을 바꾸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정신분석은 살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판을 바꾸도록 돕는 학문이자 기술이다. 저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를 읽는 관점은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정신 분석을 받는 사람은 분석가와 함께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재해석함으로써 현재를 보다 자유롭게 살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분석가들은 상담자의 과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쳐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음의 심층에 자리 잡은 병증을 파헤치고 무의식을 연구한다.

책은 인생의 판을 바꾸는 8개의 무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상실감, 환상, 자기애, 정체성, 초자아, 열등감, 공격성, 고독감. 이렇게 총 8개의 무의식은 우리 마음속 아주 어둡고 깊은 곳에 자리하여 쉽게 표출되지 않는다.

P.242 "열등감은 무조건 나쁠까요?열등감의 힘이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아들러도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혜택을 자신이 직접 누렸습니다.

나는 특히 열등감 챕터를 흥미롭게 읽었다. 읽다 보면 정신분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가 자주 언급된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프로이트와 아들러, 융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아들러는 결국 프로이트와 너무 다른 이론과 사상으로 그와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그가 느꼈을 열등감을 생각해 보니 안쓰럽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과거와 무의식, 개인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들러는 현재와 의식, 사회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아들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개인심리학이라는 명칭 아래 관련 학회와 학술지를 만들었다. 프로이트와 대립하면서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승화시킨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300"외로움을 고독감으로 바꾸려면 외로움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의미를 알면 관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부정적 혼돈이고 고독감은 긍정적 몰입입니다."

외로움과 고독감이라는 단어는 언뜻 비슷한 뜻인 것 같아도 분명히 다르다. 전자우편, sns, 화상회의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장기간 외로움에 빠져 있다고 한다. 언택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히키코모리는 증가하고 있고 외로움을 벗어나려 소속감을 느끼고자 모임을 가져 보지만 인간관계에서 상처만 받고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낄 뿐이다. 반면에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대신에 고독감을 느낀다. 저자는 외로움은 남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고 고독감은 나와 내가 관계를 맺은 상태라고 말한다. 우선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과의 소통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내 안의 우주를 느끼며 무의식과 내가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인간이 한 인간을 대상으로 그 안에 숨겨진 무의식을 읽어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를 찾아간다. 책은 분석가와 상담자 간에 소통하는 노하우가 간간이 실려 있기 때문에 혹시 정신의학이나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유용할 듯싶다. 누구나 마음속에 어두운 면이 있을 것이다. 이 어두운 면을 당장 밝은 면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과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더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희망적인 일이 아닐까.

#당신이숨기고있는것들 #지와인 #심리치료 #정신분석 #정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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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들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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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일삼지만 법망을 피해 다니며 호의호식하는 악덕 재벌 총수 및 파렴치한 정치인들을 겨냥한 사회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이다. 책 제목처럼 국정과 사법을 농락하는 일명 '나라의 도적들'을 응징하기 위해 집행관들이 나서기 시작한다. 등장인물 관계도가 있어서 초반에 등장인물 파악에 이해가 쉬웠다.

어느 날, 역사학 교수이자 칼럼니스트인 최주호에게 동창이었던 허동식으로부터 25년 만에 연락이 온다. 허동식은 최교수에게 뜬금없이 노창룡의 친일행위와 고문 자료를 요청한다. 노창룡은 일제 강점기에 악명을 떨친 고등계 형사로서 악질적인 친일파였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친일파다. 최주호는 떨떠름했지만 동창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자료를 찾아내 허동식에게 보낸다. 하지만 며칠 후에 노창룡은 잔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것도 수십 년 전 자신이 직접 사용하던 고문 방법으로 살해된 것이다. 최교수는 그제야 노창룡 살인사건과 자신이 보낸 자료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닫고 당혹스러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닌 제2와 제3의 희생자가 나온다. 국정과 사법을 농단한 적폐들이 한 명씩 살해되기 시작하고 나라는 발칵 뒤집힌다. 특수부 검사가 투입되어 용의자들을 추적하고 쫓고 쫓기면서 용의자들에 대한 정체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잔혹하기는 하지만 나쁜 놈들이 집행관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장면은 통쾌하기도 하고 속 시원하다. 권력자들의 악질적인 일들은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누구나 이들에 대해 분노하지만 선뜻 행동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나는 최주호가 집행관에 의외로 쉽게 가담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는 부정부패를 행하는 자를 피를 묻히지 않고 오직 글로만 비난하는 고상한 칼럼니스트이자 역사학 교수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최주호와 허동식이라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 말이나 글로만 비난하는 자 vs 직접 행동으로 응징하는 자로써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다름을 독자들이 깨닫게 한다. 방관자로서의 최주호가 집행관에 몸을 담기까지 의식이 바뀌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가 제일 먼저 용의자 선상에 오르면서 수사망을 피해 나가는 과정도 쫄깃하다.

집행관들은 어떻게 이런 큰일을 치르게 된 것인가? 그들이 이렇게 만나 서로 엮이게 된 경위는? 집행관들의 개인적인 사연은 소설 속에 잔잔히 나온다. 누군가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는 순전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법의 심판대에 올라 온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만났지만 이들의 목적은 하나. 오직 뜨거운 심장 하나로 악인들을 응징하는 것!!

소설은 맥빠지는 결말로 치닫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이기도 하면서 예측이 가능한 그런 결말. 나름 왕년에 언론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집행관들이 어벤져스처럼 뭉쳐서 호기롭게 복수를 꿈꾸지만 계속 한계에 부딪혀서 안타까워진다. 읽으면서 나도 내내 집행관들을 응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악의 힘을 걷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지금도 갑질 세상에서 권력자들은 말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권력자들의 범죄를 공정하게 다뤄서 더 이상 솜방망이 처벌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집행관들 #다산책방 #조완선 #사회미스터리소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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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돈을 말하다 - 당신의 부에 영향을 미치는 돈의 심리학
저우신위에 지음, 박진희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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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심리학의 관점에서 오랜 기간 인간과 돈의 관계를 연구한 저자의 수많은 실험과 연구가 집대성되어 있다. 돈과 관련된 재밌는 현상이 실려있어서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내가 돈에 관해 이렇게 생각했었구나, 돈이 이렇게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구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 복권에 당첨되면 행복할까?

복권에 당첨되고 오히려 불행해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렇게 원하던 부자가 되었지만 행복의 유효기간도 잠시,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거지가 되고 사람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돈을 제대로 쓰는 방법을 알아야 우리는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돈의 노예가 될 것인가, 돈의 주인이 될 것인가? 돈의 속성을 이해하고 정확한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에 더 민감하며 이익보다 손실을 경험했을 때를 더 영향력 있게 받아들이는데 이는 손실 회피의 근본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좋은 일의 80퍼센트는 돈과 관계없지만, 비극의 80퍼센트는 모두 돈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행복을 느꼈을 때를 생각해 보니 확실히 돈과는 관련 없는 일들이 많이 떠오른다. 돈의 순기능이 중요한 이유다. 분명 돈이 많다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등 좋은점이 많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이성적 소비를 하지 못하거나 사치나 투기를 일삼는다면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당장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물건을 사고 나서의 물질적 소비에 대한 만족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떨어진다고 한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사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 욕구가 충족되면 또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갖고 싶었던 것들을 사놓고 나면 또 다른 물건에 눈을 돌린다. 저자는 행복해지려면 물건보다는 경험을 사라고 한다. 하긴, 행복했을 때를 떠올렸을 때 물건으로 인한 행복을 떠올리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행복, 어떤 영화나 책을 보고 느꼈던 감정, 요리나 악기를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했을 때 그 성취감은 소확행이자 돈이 있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돈은 소비자와 기업 간의 판매전략에서도 작용한다. 사치품을 파는 회사들은 브랜드의 가치뿐만 아니라 물건의 실용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소비자에게 사게 한다. 덕분에 소비자는 비싼 브랜드여서가 아니라 성능이 좋아서 사는 거라고 변명을 하며 마음속 죄책감을 덜 수 있다. 홈쇼핑에서 기간 가격 책정 방식으로 제품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300만 원짜리 제품이지만 분할 납부로 한 달에 25만 원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상술이었다. 25만 원은 300만 원보다 확실히 부담 없는 숫자이기 때문에 이는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교묘한 구매 유도 수단이다.

해마다 온라인에서 블랙프라이데이 때 엄청 할인을 해 주는 날이 있는데 이때도 기업의 상술에 속으면 안 된다. 일부러 원가를 높이고 할인 폭을 크게 하여 소비자가 싸게 싼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책에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화장품이 더 잘 팔리는 이유, 남에게 돈을 요구할 때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방법, 돈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재밌는 실험과 연구가 많이 실려 있다. 저자는 어떤 사람의 인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라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나의 수입과 소비, 지출, 저축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심리학이돈을말하다 #저우신위에 #미디어숲 #돈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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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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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출간된 신경숙님의 장편소설. 표절 문제가 불거지고 나온 작품이라서 그녀의 작품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화두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벌써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책 좀 읽는 사람이라면 신경숙 작품을 띄엄띄엄 볼 수는 없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펑펑 울던 날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번에도 책을 완독하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스쳤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왜 책 제목이 <아빠에게 갔었어>가 아닐까. 아빠와 아버지가 주는 어감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아빠라는 단어보다 무겁고 뭔가 더 책임감이 느껴지는 단어랄까.

엄마의 입원으로 J시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나’ 가 5년 만에 기차에 오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고로 딸을 잃고 한동안 고향집에 가지 않았던 '나'는 딸에 대한 슬픔 반, 아버지를 보살펴야겠다는 마음 반으로 J시 집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그때 알게 된다. 아버지가 한밤중에 잠에 깨어 수면장애를 겪는 것도, 예전에 죽었던 고모를 언급하며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것도. 자신만의 슬픔에 갇혀 지내고 있다가 아버지의 노쇠함과 병증에 당황스러워하던 그녀는 아버지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도 하고 형제자매들과 아버지의 병에 대해 의논하기도 한다.

P.70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누구도 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방패를 치고 살아온 시간들. 그러나 방패는 쳐지지 않았다. "매일이 죽을 것 같어두 다른 시간이 오더라. 봄에 모판에 볍씨를 뿌릴 때는 이것이 언지 자라서 심고 키워서 추수를 하나 싶어도 하루가 금세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어느 한밤중에 아버지가 담담히 내뱉은 말이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을지. 아버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고향에 내려갔던 그녀지만 오히려 아버지라는 존재에 위로를 받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아버지를 괴롭히는 병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가 위암이라는 육체적 병을 얻는 것과 달리 전쟁통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아버지는 그 기억이 평생 트라우마로 따라다닌 것인지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이다.

가족이긴 하지만 제 삼자의 눈으로 아버지의 일생을 들여다보며 몰랐던 사실을 점점 알아가게 되는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한때는 꿈 많은 청년이었을 텐지만 부지불식간에 4남 2녀라는 자식들을 거느리고 가장이 되어 버린, 지금은 노쇠한 아버지. 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산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형제들과 엄마가 전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전쟁통에서 만나 서로 의지했던 박무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아가게 된다.

나 역시 부모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인 줄 알았다. 내 부모님도 부모이기 전에 어린아이 시절을 겪고 꿈 많은 청춘을 지내온,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보통의 사람이었을 텐데 나는 부모님의 과거나 지나온 시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도 부모 역할이 처음이었을 텐데 당연하게도 나는 자식 노릇에만 충실한 채, 부모님의 인생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살아왔으니까.

P.409 나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오래 굽어 살펴온 것들을 둘러보는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어룽져 있던 빛이 내게까지 번져왔다. "이런 날이 올 줄을 모르고 살었구나. 밭이 있어도 고구마를 안 심고 논이 있어도 농사를 못 짓고..."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뿜어내지만 가장 쓸쓸했던 느낌을 주었던 것은 적막한 시골 풍경을 묘사한 장면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수면장애로 밤에 깊은 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낮잠을 못 자게 하고 낮에 아버지와 산책을 한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노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날들에 대한 인사가 있다. 사람 없는 빈집에 노인 혼자 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풍경은 너무 흔해졌고, 멧돼지와 고라니가 사람들보다 더 많아져서 산에서 내려와 동네로 출몰하고, 산밭에 매실을 심어놔도 따먹는 사람이 없어 다음 해에는 더 풍성하게 열린다는 아버지의 말은 애잔하고도 슬프다.

꾹꾹 눌러왔던 슬픔이 터진 것은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생전 자신이 아껴왔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자식들에게 남기고 넷째인 그녀에게는 헛간에 세워둔 자전거를 남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웠고, 학교가 끝나고 늦은 밤에 혼자 집에 돌아올 때도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데리러 왔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새 자전거를 사놓고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P.414 아버지는 자전거를 사놓고 너를 기다렸다,고 했다. 니가 오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새 공기를 마시며 달려보려고 했는데 늦은 일이 되었다,고. 아버지는 니가 밤길을 걸을 때면 너의 왼쪽 어깨 위에 앉아 있겠다, 했다. 그러니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식들이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는 일도 많아 언제나 자식들은 뒤늦게 후회한다. 이제는 작고 초라해진 부모님의 몸을 보며 더 잘해야겠단 생각만 들 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세상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와 버팀목의 존재가 된다. 소설 속 아버지는 자식들 덕분에 용케도 살아냈다고 말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한 인생을 살아내왔던 세상 모든 아버지의 생과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신경숙 #신경숙소설 #아버지에게갔었어 #창비 #아버지 #가족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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