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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표본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저명한 나비학자이자 나비 분야의 권위자로 불리는 사카키 시로. 도입부는 시로가 어렸을 적 산 속에서 겪었던 일들이 시로의 시점에서 쓰여진다. 산 속에 처박혀 매일 아틀리에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와 뒷산에서 나비 채집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는 시로. 어느 날, 아버지는 시로에게 제안한다. 나비 표본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아버지는 시로에게 채집 방법과 표본 만드는 방법까지 설명해주며 시로를 나비의 세계로 더욱 깊이 인도하고, 어머니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부자를 지켜볼 뿐이다. 시로가 표본 배경으로 나비 그림을 그린 것을 본 아버지는 액자를 주문하겠다고 하며 아들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다.
그때쯤 아버지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며 인간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표본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을 거라는 의뭉스러운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영향일까. 시로는 뒷산에서 그 사람의 시체를 꽃밭 속에 내려놓는 상상을 한다.
p.37 ˝하반신이 제거된 하얀 나체는 가슴 한복판에 꽂힌 은빛쐐기로 땅에 박혀 있고, 두 손은 날개처럼 우아하게 활짝 펼치고 있다.˝
인물들의 대화와 문장 속에는 이처럼 복선이 드러나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근거리며 설마, 에이 아니겠지. 진짜?? 이런 말들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헐, 미쳤네 미쳤어. 정신병자네. 혀를 차게 된다.
산속에서 시로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한 사람, 그녀의 이름은 루미이며 아버지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 사와코의 딸이다. 시로는 루미에게 생애 처음으로 작업한 나비 표본을 직접 선물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루미 또한 미술을 전공하며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미국에 살고 있던 루미는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고 시로의 아들 이타루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그림 수업을 위해 이타루도 합숙하지 않겠냐며 제안한다. 결국 이타루는 다섯 명의 소년들과 합숙하기로 한다.
어느 날, 소년들의 시체가 수색견에 의해 발견되고, 사카키 시로는 수기를 통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시로는 아들까지 죽이면서 나비에 미쳐있는 사이코패스라고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뒤이어 이타루의 수기가 이어진다. 시로가 이타루의 노트북을 몰래 열어보고 ‘여름방학 자유 탐구 인간 표본‘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을 읽어본 것이다. 즉, 시로는 아들 이타루의 범행을 자기가 한 것으로 꾸며 가짜 수기를 쓴 것이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시로는 이타루를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나비로 만들기로 계획하고, 자기의 업보라고 생각하며 아들 대신 죗값을 치르기로 한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죽이다니.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면 시로는 정말 인간 말종 사이코패스였을 텐데, 감방에 갇혀 있는 그에게 면회를 온 사람이 있었다. 루미의 딸 안나. 그녀는 시로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갔을까. 결말 부분이 진짜 미친 것 같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아들과 아버지의 부정이 느껴지기도 했고,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조종한 범인이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이유가 나오지만 납득할 수 없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사람이 무언가에 맹렬히 미치면 이럴 수도 있나 싶다. 미나토 가나에답게 가독성과 흡입력이 장난이 아니다. 이야미스 장르답게 충분히 기분 나쁘고 찜찜한 스토리지만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미스터리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