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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과 번역으로 현재까지도 계속 출간되는 데미안. 더없이 심오하며 관념적인 책으로 간주되는 데미안. 전혜린 타계 60주년 기념을 맞아 북하우스에서 복원하여 출간한 이 책은 독문학을 전공한 전혜린님이 독일어 원문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색적이면서 사유하기 좋은 고전 소설일수록 번역이 매끄러운 책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책의 내용도 어려운 마당에 번역마저 매끄럽지 않다면 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고 가독성이 떨어질 뿐이다. 이 책은 독일어 원문의 느낌을 최대한으로 살려 번역한 것인데 모든 문장이 매끄럽지는 않다는 것을 밝혀 둔다. 책의 끄트머리에는 헤세의 작품들과 데미안에 대한 전혜린님의 해석이 실려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왜 싱클레어는 막스 데미안에게 집착하는가. 싱클레어는 십 대와 이십 대를 거치는 동안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다. 프란츠 크로머 같은 악마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이 데미안이긴 하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싱클레어 생의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었던 사람이 데미안이다. 다른 사람 눈에 데미안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데미안은 싱클레어만 볼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인가.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데미안은 싱클레어 내면에 존재하는,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임을 눈치챈 것 같다.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해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사람도 데미안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 인해 빛과 어둠, 참과 거짓 같은 대립되는 두 개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살아가는 내내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해 있어야 할지를 갈등하고 고뇌한다. 싱클레어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정으로 본인이 나아갈 길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데, 그 와중에도 데미안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그의 집착이 무의식까지 확장되어 결국엔 초월적 존재이기도 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카인과 아벨에 이어 데미안으로부터 세 개의 십자가와 두 도둑 이야기를 들은 싱클레어는 신앙과 종교에 대한 회의감과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전히 데미안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은 똑 떨어지게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데미안 덕분에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게 되고 공허함에 빠지게 된 싱클레어. 데미안이 카인 같은 존재가 아닐지 의심하고, 예전처럼 평온한 세계로 돌아갈 것을 꿈꾸지만 단단하고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데미안 앞에서는 어쩐지 작아지는 싱클레어다.
p.138[그 여자는 내 앞에 자기 모습을 뚜렷이 보였고, 성스러운 영역으로의 문으로 나를 인도해갔다. 나는 사랑하고 공경할 무엇을 가졌었고, 다시 이상을 가졌었으며, 생은 다시 예감과 형형색색의 신비스러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느 날, 베아트리체를 알게 되고, 말 한 번도 나눠본 적 없는 그녀를 삶의 이상으로 삼아 내면의 세계를 재정립하려는 싱클레어. 그런데 형형색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니. 이 부자연스러운 문장은 무엇인가. 이러한 평온한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리는 하나의 복선 같은 문장 같다.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한 장의 쪽지를 받고, 그 쪽지에 씌여진 글을 이해하고 나서야 내면에 잠자고 있던 평온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경험한다. 가엾게도, 그는 다시 괴로운 시절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우리에게 각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내면을 성장시켜 자신의 길로 소신 있게 나아가라는, 이미 틀에 박혀 널리 알려진 주제 말고, 이것을 개개인 자신의 삶에 대입시켜 보자. 분명 깨달음과 깊은 울림을 주는 메시지가 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의 자아, 외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대립하고 협상하면서 살아간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갈등하고 고뇌하는 것이다. 내면의 신념과 외면의 행동이 일치할 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이 발휘된다.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싱클레어의 내면이 본능적으로 데미안이 내뿜고 있는 강한 내면에 다가가고자 한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