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설백물어 세트 - 전4권 (리커버 특별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심정명 옮김 / 비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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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이치 일행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괴담을 역이용하여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죄책감과 공포에 질려 파멸하게 만든다. 그럴싸한 장치와 심리전을 이용해 진짜 악인을 단죄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짤랑. 어행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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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 동화 클래식 리이매진드
야코프 그림.빌헬름 그림 지음, 얀 르장드르 그림, 민지현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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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동화들을 아주 독특하고 현대적인 비주얼로 재해석한 판본으로서, 표지 디자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림의 비중과 스타일에 신경 썼다는 것이 확 느껴지는 그림 동화이다. 일반적인 소설책보다 판형이 크고 디자인이 화려해서 책장에 꽂아두거나 가끔 꺼내 보기에 좋은 아트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림 형제의 원작 동화는 사실 아이들을 위한 예쁜 이야기라기보다 훨씬 기괴하고, 잔혹하며, 원초적인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디즈니 스타일의 순화된 버전에 익숙하다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원작 특유의 서늘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꽤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현대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풀어내어 글을 읽는 재미만큼이나 그림을 뜯어보는 재미도 크다. 스무 가지 이야기 중에 처음 보는 이야기도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고,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짧게 구성되어 있다 보니 뒷이야기가 궁금할 만큼 여운이 남는 작품도 있다. 더불어 익숙한 이야기를 낯선 시선으로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숨은 상징들을 찾아내며 읽는 즐거움도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유독 마법에 걸린 왕자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왕자가 저주에 걸려 개구리나 백조 등으로 변신하는 소재가 특히 많은데, 이것은 왕자가 동물의 모습을 벗고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 즉 인간이 시련을 겪으며 인격적으로 완성되는 단계를 상징하는 것일 테다. 또한, 겉모습이 흉측한 동물일 때조차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남으로써 조건 없는 사랑과 내면의 가치를 시험받는 장치가 된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왕자가 스스로 마법을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공주나 평범한 소녀 같은 외부 조력자가 나타나는데, 이는 고립된 자아가 타인과의 관계와 헌신을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서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읽은 [유리병 속의 정령]은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이 주인공이다. 공부를 중단하고 아버지를 돕던 청년이 낡은 참나무 아래 유리병에서 정령을 깨운다는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정령이 자신을 꺼내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할 때, 아들은 그 거대한 몸이 어떻게 이 작은 병에 들어갔는지 믿기지 않는다며 정령을 도발해 다시 병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주인공이 단순히 신분 상승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혜로 얻어낸 도구를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훌륭한 의사가 된다는 결말은 일종의 성공 서사 같은 만족감을 준다. 또한, 유리병 속에서 일렁이며 쏟아져 나오는 기괴한 정령의 일러스트는 책 내용과 잘 어우러져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요술 식탁과 황금 당나귀, 자루 속의 몽둥이] 또한 재밌게 읽은 작품 중 하나이다. 보물을 빼앗긴 형제들을 대신해, 막내 형제가 지략을 써서 여관 주인을 혼내주는 이야기인데 자루 속의 몽둥이가 튀어나와 악인을 두들겨 패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먹고 살 걱정 없는 식탁과 마르지 않는 돈 주머니라는 설정은 서민들의 소박하고도 절실한 욕망을 가장 잘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보다 더 현실적이면서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단순하고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도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단순히 판타지적인 설정을 넘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렬하다는 점이 지금까지도 그림 동화가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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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최희성 편역 / 아이템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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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예전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은 이윤기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인문학적 해석이 어우러져, 단순히 신들의 계보를 훑는 것을 넘어 신화가 우리 삶과 예술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짚어주고 있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이다. 이 책, [하룻밤에 읽는 오디세이아]는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 모험담 및 귀환길에 이르는 여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트로이 전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알고 보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10년 전쟁을 끝낸 결정적 계략인 목마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이다. 그가 단순히 힘센 용사가 아니라 지략가라는 점을 알고 보면, 모험 도중에 만나는 괴물들을 힘이 아닌 꾀로 물리치는 과정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귀환 직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는데,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복수하는 과정은 오디세이아 곳곳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본받아야 할, 혹은 경계해야 할 사례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전쟁 당시 그리스 편을 들었던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를 계속 돕고, 오디세우스의 귀환길에도 그를 끊임없이 돕는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하자 포세이돈은 분노한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의 귀환길을 계속 방해하여 아테나 여신과 대립한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바다의 신에게 미움을 사 10년을 떠도는 과정은 인간의 뜻과 의지가 거대한 신의 섭리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는 단순히 똑똑한 영웅이 아니라, 때로는 비겁해 보일 정도로 생존 본능이 강하고 인간적인 결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결점을 드러내며 나약해질 때마다 아테나 여신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한다. 아버지 없이 자라 기가 죽어있는 텔레마코스에게 아테나가 다가가는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아테나는 눈부신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텔레마코스가 직접 배를 띄우고 스파르타와 필로스로 여행을 떠나도록 등을 떠밀어준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멘토(Mentor)‘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신비로움이 현실과도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은 사실 ‘오디세우스의 복수‘라고 제목을 붙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후반부에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혼자들이 남의 집 안방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조롱하는 상황에서도,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복수를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장면에서는 나까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거지로 변장한 아버지를 곁에 두고 구혼자들의 온갖 모욕을 견뎌내는 텔레마코스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 거지 옷을 입고 음식 찌꺼기를 던지는 조롱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아테나 여신의 조언대로 때를 기다린다. 이 인내심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이라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신도 돕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책은 신탁이나 신의 도움이 단순히 요행이 아니라, 오디세우스 부자가 보여준 지혜와 용기에 대한 신의 응답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칼립소라는 여신이 불로장생을 약속하며 붙잡아두지만,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결국 죽음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선택 자체가 신과 인간의 경계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지점인 것 같다. 생생한 그림과 신비로운 이야기가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오디세우스의 모험담. 평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는 독자, 트로이 목마 후일담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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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정이화 옮김 / 이화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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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6세기 영국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여인, 메리 스튜어트. 츠바이크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라는 두 여왕의 대립을 마치 숙명적인 연극처럼 묘사해서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인다. 또한, 16세기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 종교 개혁 등이 등장하는데 츠바이크는 당대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소설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아 평소 고전이나 현대 문학의 심리 묘사를 즐기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왕으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슈테판 츠바이크 역시 그녀의 비극이 단순히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그로 인한 격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인근 여러 나라의 언어에 유창할 정도로 명민했으며 음악, 문학, 예술 분야 등에서도 다재다능했다고 한다. 메리 스튜어트의 용모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봤는데 180cm가 넘는 늘씬한 키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녀는 말을 타며 매 사냥을 할 정도의 기백도 갖추고 있었다. 단순히 용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팔방미인이자, 기인으로서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왕이었던 것이다.

남성들에게 메리 스튜어트를 차지한다는 것은 사랑을 얻는 동시에 권력의 정점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 점이 수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구애하게 만든 강력한 촉매제가 된 것이다. 메리의 인생을 뒤흔들게 되는 세 명의 남편들은 드라마틱하다. 첫사랑이자 요절한 프랑수아 2세는 메리에게 여왕으로서의 화려함을 안겨주었다. 단리 경은 메리가 첫눈에 반한 남성이지만, 질투와 야망으로 그녀를 괴롭힌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메리의 몰락이 시작된다. 세 번째 남편인 보스웰은 단리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었음에도 메리가 강렬하게 빠져들었던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이 대목에서 메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오직 열정에만 치중한 과정을 아주 처절하게 묘사한다.

책의 전반이 메리 여왕의 영예로운 삶과 후광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은 그녀의 몰락이 어떤 형국으로 이어질지에 초점이 잡혀 있다. 소제목만 봐도 예측이 되면서도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평생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지만, 서로의 존재에 사로잡혀 살았던 두 여왕의 심리전이 이 책의 핵심이자 압권이다. 메리 여왕이 젊은 날에 여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통제한 얼음 같은 군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는 것이 두 여왕의 대립되는 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유럽 강대국들(스페인, 프랑스 등)을 조종하는 최고의 외교적 미끼로 활용했으며, 결혼하지 않았기에 누구와도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열어두어 잉글랜드의 안전을 지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여왕이 결혼한다는 것은 왕편에게 실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정치적 라이벌로서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누리는 자유로운 열정을 남모르게 동경하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엘리자베스가 메리에게 내린 잔혹한 판결들이 사실은 가지지 못한 삶에 대한 깊은 결핍과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p.23 ˝여인에게서 물려받은 왕관이 또 다른 여인과 함께 사라지리라˝

정말 소름 끼치지 않는가?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임종 직전 남긴 이 한마디는 스튜어트 왕조의 비극을 관통하는 가장 잔혹하고도 정확한 예언이었다. 제임스 5세는 병상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 말을 남겼다. 그는 아들이 아닌 딸이 왕위를 잇는다는 것이 왕조의 몰락 혹은 단절을 가져올 것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다. 메리가 처형당하고 훗날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앤 여왕에 이르러 가문의 대가 끊기며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보면, 이 예언은 정말 무섭도록 들어맞는 것 같다.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관을 물려받았지만, 그 왕관은 그녀에게 축복이 아닌 무거운 짐이자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던 여왕이 단 한 번의 격정적인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감정적 파장을 준다.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처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통치자로만 살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그 솔직함이 정치적 약점이 되어 라이벌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비록 왕좌에서는 내려왔지만, 그녀의 드라마틱한 몰락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강력한 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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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들
이동원 지음 / 라곰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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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책은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작가는 ‘그것이 알고 싶다‘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메인 PD이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아 읽기도 전에 기대가 컸다. 작가는 어느 정도 실화를 기반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각기 다른 열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냥저냥 무난한 이야기도 있는 반면, 충격적이면서 엽기적인 이야기도 있다. 나에게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가 맨 마지막 작품에 해당되었다. 제목이 ‘가해자 H의 피해 일지‘인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해자인데 피해 일지라니! 평범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30대 우체부 남성은 어느 봄날에 늘 다니던 교회에서 운명의 여자와 만난다. 그녀와 깊이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하기에 이르지만 그녀는 결혼만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지만 남성은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덤덤히 그녀 곁을 지킨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매일 아침 우편 등기가 오고 있고, 그녀 역시 매일 누군가에게 우편 등기를 보낸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인플루언서인 그녀에게 SNS로 악플을 남긴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소장을 날리고 협박하며 보상을 받고 있었다. 남성은 묵묵히 그녀를 도우며 어느샌가 같이 그녀와 함께 보상금을 받는 기쁨을 누리고 재산이 늘어가는 걸 즐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가 만취한 사이에 그녀의 핸드폰과 경찰서 사이트에 몰래 접속해서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아버리고 그는 패닉에 빠진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속이고 뒤에서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다면 어떨까.



나는 요즘 OTT로 크리미널 마인드를 시즌 1부터 보고 있다. 그래서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왔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도 하고 주변 지인 중에도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리라.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으로만 봤을 뿐. 하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 프로파일링은 그냥 덤덤한 루틴이다. 범죄 현장 속 사진과 서류상의 기록만 보고 범인을 유추하고 브리핑하는 것인데 매번 운 좋게도 그녀가 말한 대로 용의자가 좁혀지고, 주위에서는 그녀를 치켜세운다. 비법은 따로 없다. 그냥 임기응변에 강한 것이 장점일 뿐. 그녀는 사건 해결을 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헤어지자는 남친의 문자를 받고 분개한다.


삼십대의 인턴기자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고군부투하는 이야기도 있다. 대학교수가 여제자를 성추행한 사실을 알고 이 일을 기사로 낼지 고심한 끝에, 피해자 가족들과 출세를 위해 기사를 내버리고 만다. 정규직이 되긴 했는데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는건 교수쪽 변호사가 제기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소송이라는 씁쓸한 결말.


소설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소설을 읽고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는 씁쓸해 할 것이며,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며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내면이 고개를 들고 발현되었을 때 불행이라는 것이 어김없이 쫓아오는데 이것을 인지할 때쯤이면 이미 늦는다. 그래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불행만을 논하고 있지 않다. 인생의 밑바닥을 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우연한 일을 계기로 행운을 거머쥐고 역전하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돌이켜보면, 불행이라고 여겼던 일이 의외로 행운으로 작용해 좋은 쪽으로 흘러간 적이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언젠가 그 불행의 씨앗이 나에게 날아온다는 서늘한 교훈을 남겨주는, 정신이 번쩍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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