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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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출간된 신경숙님의 장편소설. 표절 문제가 불거지고 나온 작품이라서 그녀의 작품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화두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벌써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책 좀 읽는 사람이라면 신경숙 작품을 띄엄띄엄 볼 수는 없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펑펑 울던 날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번에도 책을 완독하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스쳤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왜 책 제목이 <아빠에게 갔었어>가 아닐까. 아빠와 아버지가 주는 어감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아빠라는 단어보다 무겁고 뭔가 더 책임감이 느껴지는 단어랄까.

엄마의 입원으로 J시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나’ 가 5년 만에 기차에 오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고로 딸을 잃고 한동안 고향집에 가지 않았던 '나'는 딸에 대한 슬픔 반, 아버지를 보살펴야겠다는 마음 반으로 J시 집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그때 알게 된다. 아버지가 한밤중에 잠에 깨어 수면장애를 겪는 것도, 예전에 죽었던 고모를 언급하며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것도. 자신만의 슬픔에 갇혀 지내고 있다가 아버지의 노쇠함과 병증에 당황스러워하던 그녀는 아버지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도 하고 형제자매들과 아버지의 병에 대해 의논하기도 한다.

P.70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누구도 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방패를 치고 살아온 시간들. 그러나 방패는 쳐지지 않았다. "매일이 죽을 것 같어두 다른 시간이 오더라. 봄에 모판에 볍씨를 뿌릴 때는 이것이 언지 자라서 심고 키워서 추수를 하나 싶어도 하루가 금세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어느 한밤중에 아버지가 담담히 내뱉은 말이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을지. 아버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고향에 내려갔던 그녀지만 오히려 아버지라는 존재에 위로를 받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아버지를 괴롭히는 병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가 위암이라는 육체적 병을 얻는 것과 달리 전쟁통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아버지는 그 기억이 평생 트라우마로 따라다닌 것인지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이다.

가족이긴 하지만 제 삼자의 눈으로 아버지의 일생을 들여다보며 몰랐던 사실을 점점 알아가게 되는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한때는 꿈 많은 청년이었을 텐지만 부지불식간에 4남 2녀라는 자식들을 거느리고 가장이 되어 버린, 지금은 노쇠한 아버지. 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산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형제들과 엄마가 전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전쟁통에서 만나 서로 의지했던 박무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아가게 된다.

나 역시 부모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인 줄 알았다. 내 부모님도 부모이기 전에 어린아이 시절을 겪고 꿈 많은 청춘을 지내온,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보통의 사람이었을 텐데 나는 부모님의 과거나 지나온 시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도 부모 역할이 처음이었을 텐데 당연하게도 나는 자식 노릇에만 충실한 채, 부모님의 인생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살아왔으니까.

P.409 나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오래 굽어 살펴온 것들을 둘러보는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어룽져 있던 빛이 내게까지 번져왔다. "이런 날이 올 줄을 모르고 살었구나. 밭이 있어도 고구마를 안 심고 논이 있어도 농사를 못 짓고..."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뿜어내지만 가장 쓸쓸했던 느낌을 주었던 것은 적막한 시골 풍경을 묘사한 장면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수면장애로 밤에 깊은 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낮잠을 못 자게 하고 낮에 아버지와 산책을 한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노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날들에 대한 인사가 있다. 사람 없는 빈집에 노인 혼자 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풍경은 너무 흔해졌고, 멧돼지와 고라니가 사람들보다 더 많아져서 산에서 내려와 동네로 출몰하고, 산밭에 매실을 심어놔도 따먹는 사람이 없어 다음 해에는 더 풍성하게 열린다는 아버지의 말은 애잔하고도 슬프다.

꾹꾹 눌러왔던 슬픔이 터진 것은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생전 자신이 아껴왔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자식들에게 남기고 넷째인 그녀에게는 헛간에 세워둔 자전거를 남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웠고, 학교가 끝나고 늦은 밤에 혼자 집에 돌아올 때도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데리러 왔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새 자전거를 사놓고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P.414 아버지는 자전거를 사놓고 너를 기다렸다,고 했다. 니가 오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새 공기를 마시며 달려보려고 했는데 늦은 일이 되었다,고. 아버지는 니가 밤길을 걸을 때면 너의 왼쪽 어깨 위에 앉아 있겠다, 했다. 그러니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식들이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는 일도 많아 언제나 자식들은 뒤늦게 후회한다. 이제는 작고 초라해진 부모님의 몸을 보며 더 잘해야겠단 생각만 들 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세상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와 버팀목의 존재가 된다. 소설 속 아버지는 자식들 덕분에 용케도 살아냈다고 말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한 인생을 살아내왔던 세상 모든 아버지의 생과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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